강광석 | 전농 강진군 정책실장
사람에게 가장 치명적인 아픔은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은 사람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한 인생이 칭찬도 배려도 위로도 없이 메마른 잎사귀처럼 나부끼다 누구의 눈물도 없이 진다는 것입니다.
올해도 수없이 많은 어르신들이 자식들 없이, 친·인척들의 무관심 속에 설을 보냈습니다. 전화는 왔는지, 제사비용이나 용돈은 받았는지, 매년 받던 내복은 도착했는지, 이것저것 걱정하며 까치설날 저녁 8시, 안방 불이 꺼져 있는 이웃의 집들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동네 선배의 집이, 후배의 집이 홀로 계신 어머니의 찬 신음소리를 삼키며 정월 한풍을 견디고 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았고, 겨울밤은 잠들지 못했습니다.
공업입국, 산업화 이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교통이 더 좋아질수록, 평균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세상에 국산 간판보다 CNK 같은 외국 이름 간판이 더 늘어날수록, 경쟁 효율 선진화라는 말이 텔레비전 ‘9시 뉴스’를 도배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 외로워졌습니다.
행성의 속도로 오로지 앞만 보고 세계를 향해 싸우고, 이기고, 환호하고, 축배를 드는 순간에도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글로벌리즘의 시대에 사람은 사람의 사람이 아니고 경제의 부품이고 효율성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살기 위해 평균 노동시간은 지속적으로 늘어납니다. 자식을 키우기 위해 자식과 떨어져 살아야 하고, 건강보험료를 내기 위해 살인적인 24시간 맞교대를 감수해야 합니다. 부모께 용돈을 보내기 위해 야간수당, 휴일수당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명절도 없이 휴가도 없이 직장에 나가야 하고 가게를 지켜야 합니다. 올 수가 없는 사람, 그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모두 세상의 거친 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사람관계는 정과 의리, 보살핌과 보답 같은 인간 감정의 총체적 집합입니다만, 현대적 사람관계는 계약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소득과 기회, 권한과 정보가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사람은 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립니다. 사람관계가 목적과 수단의 도구가 된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사치가 됩니다.
가족이 해체되고 직장 동료들 간의 협력과 의리가 승진의 도구가 되는 사회에서 사람이 느끼는 단절감은 치명적 형태로 폭발합니다. 묻지마 범죄와 집단 따돌림 문화가 팽배합니다. 사회에 대한 극단적 불만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범죄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을 집단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나를 중심으로 한 집단의 공고함을 강화하는 것이 ‘왕따’의 본질입니다.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많은 학생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고령의 농촌 어른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의 질서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믿는 1%의 집단은 이 세상이 변하지 않길 바라겠지만, 이게 정상이라고 믿지 않는 99%는 이 질서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금같이 강자독식의 정글자본주의가 극복되지 않으면 양극화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대기업이 동네골목 순대·떡볶이·빵집까지 장악하는 시대, 농업기업과 투기꾼이 농지를 독식하는 세상, 공장 없는 금융자본가가 수익을 독차지하고 국내 총수익의 50% 이상을 외국의 다국적 자본과 기업이 싹쓸이해가는 한국에서, 아직도 미국 것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믿는, 닥치고 사대주의를 주장하는 저들이 던지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대책은 녹아 없어질 사탕발림에 불과합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시인이 말합니다. 차마 이 말을 외로운 농촌 어르신들에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복무하는 살 만한 세상이 올 총선과 대선을 계기로 시작되길 바랍니다. 승자가 되기 위해 공당이 선관위 홈페이지를 공격하고 국가 기관이 나서서 주가를 조작하며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하자는 조례를 교과부가 반대하고 나서는, 민족의 공동번영을 빨간색으로 칠하고 국가를 보위한다는 법이 민주투사를 감금하는 못된 질서와 체제를 바꾸어야 합니다.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들의 질서가 무너지고 외롭고 가난하고 몸 약한 사람들이 서로 의지해가며 박카스 한 병 진심으로 내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올해도 수없이 많은 어르신들이 자식들 없이, 친·인척들의 무관심 속에 설을 보냈습니다. 전화는 왔는지, 제사비용이나 용돈은 받았는지, 매년 받던 내복은 도착했는지, 이것저것 걱정하며 까치설날 저녁 8시, 안방 불이 꺼져 있는 이웃의 집들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동네 선배의 집이, 후배의 집이 홀로 계신 어머니의 찬 신음소리를 삼키며 정월 한풍을 견디고 있습니다. 아무도 오지 않았고, 겨울밤은 잠들지 못했습니다.
한방에서 예닐곱명이 살던 시절, 싸래기 가래떡을 해서 서로 엉겨붙지 않은 떡국을 죽 마시듯 먹던 그때가 행복했습니다. 세숫대야라고 해야 적당할 것 같은, 쌀 함박 같은 큰 그릇에 밥과 나물과 고추장과 김치와 남은 생선 찌꺼기 몇 조각을 아무렇게나 우겨넣고 시멘트 반죽 삽질하듯 비벼, 숟가락 놓으면 지가 알아서 허천나게 먹고, 형제들이 더 먹으면 그 욕심에 더 우겨넣던 시절에는 외로움이 없었습니다. 멍텅구리 털장갑, 털신을 신고 화약총을 사서 이리 쏘고 저리 쏘고 할 때는 아이들 사이에 가난했지만 구별이 없었습니다.
공업입국, 산업화 이후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국민소득이 올라가고 교통이 더 좋아질수록, 평균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세상에 국산 간판보다 CNK 같은 외국 이름 간판이 더 늘어날수록, 경쟁 효율 선진화라는 말이 텔레비전 ‘9시 뉴스’를 도배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 외로워졌습니다.
행성의 속도로 오로지 앞만 보고 세계를 향해 싸우고, 이기고, 환호하고, 축배를 드는 순간에도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글로벌리즘의 시대에 사람은 사람의 사람이 아니고 경제의 부품이고 효율성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살기 위해 평균 노동시간은 지속적으로 늘어납니다. 자식을 키우기 위해 자식과 떨어져 살아야 하고, 건강보험료를 내기 위해 살인적인 24시간 맞교대를 감수해야 합니다. 부모께 용돈을 보내기 위해 야간수당, 휴일수당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명절도 없이 휴가도 없이 직장에 나가야 하고 가게를 지켜야 합니다. 올 수가 없는 사람, 그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모두 세상의 거친 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사람관계는 정과 의리, 보살핌과 보답 같은 인간 감정의 총체적 집합입니다만, 현대적 사람관계는 계약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소득과 기회, 권한과 정보가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사람은 늘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립니다. 사람관계가 목적과 수단의 도구가 된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을 보살피는 것은 사치가 됩니다.
가족이 해체되고 직장 동료들 간의 협력과 의리가 승진의 도구가 되는 사회에서 사람이 느끼는 단절감은 치명적 형태로 폭발합니다. 묻지마 범죄와 집단 따돌림 문화가 팽배합니다. 사회에 대한 극단적 불만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범죄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을 집단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나를 중심으로 한 집단의 공고함을 강화하는 것이 ‘왕따’의 본질입니다.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많은 학생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고령의 농촌 어른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의 질서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믿는 1%의 집단은 이 세상이 변하지 않길 바라겠지만, 이게 정상이라고 믿지 않는 99%는 이 질서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금같이 강자독식의 정글자본주의가 극복되지 않으면 양극화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대기업이 동네골목 순대·떡볶이·빵집까지 장악하는 시대, 농업기업과 투기꾼이 농지를 독식하는 세상, 공장 없는 금융자본가가 수익을 독차지하고 국내 총수익의 50% 이상을 외국의 다국적 자본과 기업이 싹쓸이해가는 한국에서, 아직도 미국 것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믿는, 닥치고 사대주의를 주장하는 저들이 던지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대책은 녹아 없어질 사탕발림에 불과합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시인이 말합니다. 차마 이 말을 외로운 농촌 어르신들에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복무하는 살 만한 세상이 올 총선과 대선을 계기로 시작되길 바랍니다. 승자가 되기 위해 공당이 선관위 홈페이지를 공격하고 국가 기관이 나서서 주가를 조작하며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하자는 조례를 교과부가 반대하고 나서는, 민족의 공동번영을 빨간색으로 칠하고 국가를 보위한다는 법이 민주투사를 감금하는 못된 질서와 체제를 바꾸어야 합니다.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들의 질서가 무너지고 외롭고 가난하고 몸 약한 사람들이 서로 의지해가며 박카스 한 병 진심으로 내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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