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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영성의 뿌리, 유럽 수도원을 가다](하) 무소유 실천 ‘유럽의 예수’ 빈자를

[가톨릭 영성의 뿌리, 유럽 수도원을 가다](하) 무소유 실천 ‘유럽의 예수’ 빈자를 위해 다 버리다

아시시(이탈리아) | 글·사진 조운찬 선임기자 sidol@kyunghyang.com

성인 베네딕토가 6세기 초 수도공동체인 베네딕토 수도회를 창설하면서 유럽 수도원은 시작됐다. 이후 유럽에는 ‘수도원의 시대’가 만개했다. 수도원은 가톨릭 영성의 중심이었고, 중세의 지식과 예술의 산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도원 생활이 위축되었다. 수도원의 규모가 커지고 부가 쌓이면서 부작용이 나타났다. 일부 수도원은 돈 많은 귀족과 영주들에게 팔려나가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과 같은 분열과 파괴도 수도원을 피해가지 않았다. 적잖은 수도자들이 전쟁에 참여했다. 해적들의 수도원 약탈도 자행됐다. 수도원 쇄신운동이 시작된 것은 이 즈음이었다. 10세기 이후 프란치스코회, 클뤼니회, 카르투지오회 등 다양한 개혁 수도회들이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프란치스코회의 활동이 가장 빛났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창시자 프란치스코(1182~1226)는 예수의 삶과 가장 닮았다 해서 ‘제2의 예수’ ‘유럽의 예수’로 불린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이기도 하다. 그가 태어나고 숨진 이탈리아의 중부도시 아시시는 유럽 최고의 기독교 성지로 꼽힌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가 봉안돼 있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전 세계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본부로 1986년부터 세계 종교평화 기도회가 열린다.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은 방탕하게 보냈다. 공부에 매력을 갖지 못한 그의 꿈은 십자군 기사였다. 1202년 아시시와 인근 페루자와 전투에 참여한 프란치스코는 1년간 포로생활을 했다. 3년 뒤에는 꿈에 그리던 십자군 원정대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원정군을 따라가는 도중 그는 메시아의 목소리를 접한다.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에서 네가 할 일을 가르쳐주겠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예수의 삶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집안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자신의 옷과 모자도 걸인들에게 벗어주었다. 화가 난 아버지가 프란치스코를 법원과 교회에 고소하자 그는 군중 앞에서 입고 있던 모든 옷을 아버지에게 건네며 “이제부터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이라며 가족과 결별했다.

프란치스코는 맨발에 누더기를 걸친 채 한센병 환자, 거지 등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예수의 사랑을 전했다. 식사는 탁발로 해결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지갑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고 다니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여벌옷, 신발,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마태복음 10장)는 성경 말씀 그대로의 삶이었다.

탐욕과 전쟁의 시기에 프란치스코의 활동은 손가락질 받았다. 로마 교황도 처음에는 “수도회의 규칙이 너무 이상적이고 엄격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소유의 삶은 로마 교황청을 감동시켰다. 수도회가 교황의 인준을 받으면서 그 세력은 급속히 커져갔다. 프란치스코는 성직자, 평신도, 귀족, 평민,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을 수도회에 받아들였다. 모든 계층을 끌어안은 프란치스코의 정신은 뒷날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클라라 수녀회’의 창설로 이어졌다.

지난달 21일 찾은 아시시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성지였다. 촘촘히 늘어선 크고 작은 성당에는 기도하고 묵상하는 순례자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도시의 골목에서는 신성(神性)이 느껴졌다. 순례자들 사이로 프란치스코 수사들이 걷고 있었다. 갈색 수도복을 걸친 그들은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누더기 옷.


인구 3만의 아시시는 성당만 100여개를 헤아린다. 수도원, 예배당 등을 포함하면 도시 전체가 종교 건축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시시는 수비오산 자락의 구시가지와 평지의 신시가지로 구분된다. 성당 등 대부분의 유적지는 구시가지에 위치하지만, 신시가지에서는 ‘포르치운쿨라 성당’을 내부에 품고 있는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빠뜨려선 안된다. 프란치스코가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처음 수리에 나섰다는 포르치운쿨라 성당은 크기가 4×7m로 작은 예배당 수준이지만 ‘작은형제회’가 태동한 탯자리이다.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곳이기도 하다. 성당 안에는 프란치스코가 마지막까지 둘렀다는 허리띠가 전시돼 있다. 허리띠에 매어진 3개의 매듭이 선명하다. ‘청빈’ ‘순결’ ‘순명’을 뜻하는 매듭은 프란치스코회를 상징하는 표식이 됐다.

아시시 구시가지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성녀 클라라 성당, 루피노 성당 등 성당들이 빼곡하다.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위치는 구도심의 서쪽 끝에 있으나 명실상부한 아시시의 중심이다. 수도회의 본원이 들어서 있고, 성당 내부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성당 2층에는 프란치스코가 새들에게 설교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그림 등 화가 지오토의 프레스코화 28점이 장식돼 있다. 당초 이곳은 사형장이 위치해 ‘지옥의 언덕’으로 불렸다. 프란치스코는 생전에 이곳이 예수가 처형된 골고다를 닮았다면서 사형장 터에 묻히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유언대로 그는 사형장 터에 묻혔고, 뒷날 그 위에 거대한 성당이 들어섰다. ‘지옥의 언덕’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아시시 시민들은 그곳을 ‘천국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성녀 클라라 성당은 프란치스코와 함께 교회 쇄신운동을 벌였던 클라라를 기념하는 성소이자 클라라 수도회의 본산이다. 내·외벽의 꾸밈이 없는 단아한 모습을 한 이곳에는 클라라의 복원된 유해,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누더기 옷, 프란치스코가 기도했던 ‘다미아노 십자가’ 등이 보관돼 있다.

아시시와 프란치스코는 예나 지금이나 한몸이다. 아시시에서 만난 구알티에로 벨루치 수사(67·작은형제 수도회)는 “모든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 봉헌하라는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받들어 수도자의 길을 택했다”면서 “프란치스코는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계신다”고 말했다.

2000년 아시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아시시의 유산이 로마시대의 신전, 중세의 성당과 수도원만은 아니다. 도시를 감싸고 있는 종교적 영성이 더 값진 문화유산이다. 프란치스코가 있어 아시시는 가난한 자들의 성지가 됐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이다. ‘평화의 사도’로 불렸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6년 아시시 프란치스코 대성당에서 ‘세계 종교인 평화 기도회’를 열어 세계 종교 간 대화의 물꼬를 텄다. 지금도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때와 다름이 없다. 도처에서 자본의 욕망이 넘실댄다. 전쟁의 화약 냄새도 끊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맨발에 누더기를 걸친 프란치스코의 기도소리가 들린다. “가난하고 겸손하십시오. 그리고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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