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종 선임기자
허길량(58·그림)은 목(木)조각 장인(匠人)이다. 불상, 사찰 장식 등 이른바 ‘불교 장엄(莊嚴)’의 목공예 전통을 이었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 지위를 박탈당한 첫번째 장인이다. 최근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 일단 ‘누명’은 벗었는데, 아직 무형문화재 취소라는 ‘불명예 기록’은 바로잡지 못했다.
허길량은 이 사건으로 9년의 세월을 괴로움 속에 보냈다. 그의 작업장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외곽에 있다. 그동안 여기서 망치와 끌, 조각도를 붙잡고 나무 깎는 일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그래도 분심과 원망이 솟을 때는 쉼없이 경전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공방마다 그가 고행하듯 깎아낸 여래상, 보살상, 비천상(飛天像), 사천왕상, 동자상, 목탱화 등 각양각색의 불상과 조각품들이 숲을 이뤘다. 은행나무로 조성한 33비천상은 꼬박 3년 만에 완성했다. 높이 3m짜리 대형 불상도 깎았다. 그렇지만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불상에는 일체 번뇌를 씻어낸 고요한 얼굴에 환희심이 감돈다. 불상의 작품성을 평가할 안목이 내겐 없지만, 예사롭지 않은 신성(神性)과 예술의 조화가 느껴진다.
허길량은 이 사건으로 9년의 세월을 괴로움 속에 보냈다. 그의 작업장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외곽에 있다. 그동안 여기서 망치와 끌, 조각도를 붙잡고 나무 깎는 일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그래도 분심과 원망이 솟을 때는 쉼없이 경전을 읽으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공방마다 그가 고행하듯 깎아낸 여래상, 보살상, 비천상(飛天像), 사천왕상, 동자상, 목탱화 등 각양각색의 불상과 조각품들이 숲을 이뤘다. 은행나무로 조성한 33비천상은 꼬박 3년 만에 완성했다. 높이 3m짜리 대형 불상도 깎았다. 그렇지만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불상에는 일체 번뇌를 씻어낸 고요한 얼굴에 환희심이 감돈다. 불상의 작품성을 평가할 안목이 내겐 없지만, 예사롭지 않은 신성(神性)과 예술의 조화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전남 순천 선암사에 맡겨져 동자승으로 살았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했다. 서수연 선생에게 일반 목공예를 배웠다. 이인호 선생의 문하생으로 옮겨 불교조각을 공부했다. 절을 떠났지만 결국 부처에 묶인 것도 인연일 터. 근세 불교미술의 대가로 꼽히는 우일 스님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전통양식의 불교 조각 형태, 비례, 색채 등 기법과 의식을 전수받았다.
조선시대 중기의 금호 스님을 시작으로 보응, 일섭, 우일 스님으로 전해진 불교미술 정통 계보를 이어받은 것이다. 스승은 “불상은 기교로만 깎는 것이 아니다. 아만(我慢)을 지우고, 나무가 아닌 마음에다 부처를 새겨야 진정한 부처의 표정과 몸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목조각 외길을 걸어온 지 올해로 43년째다. 1977년 천수천안 관음보살상으로 불교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2001년 목조각장 중요무형문화재가 되는 기쁨을 누린다. 6년에 걸친 작업 끝에 완성한 33관음보살상으로 첫 전시회를 열었다. 문화재 전문가들이 ‘당대의 걸작’이라고 감탄했다. 전시장엔 불교인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불상을 조성하는 사람을 ‘불모(佛母)’라고 한다. 불상은 하나의 통나무에 조성한다. 깎고, 파고, 다듬는 과정을 셀 수 없이 거듭해야 한다. 그는 이 시대 최고의 불모답게 인천 흥륜사 천수천안 관음보살, 밀양 표충사 사천왕상, 제주 관음사 천불전 본존불, 설악산 오세암 오세동자, 오대산 적멸보궁 사자암 오백문수동자·오백문수보살 목탱 삼존불(길이 200m), 해남 대흥사 천불전 삼존불 등 국내외 한국 사찰에 수천점의 불교 성상(聖像)을 조성했다.
수제자 중 한봉석(경기 무형문화재), 임성안(전북 무형문화재)을 무형문화재로 키워냈다. 대학 시절 그에게서 불교 조각을 배운 홍석화는 ‘에이치컬쳐테크놀러지’를 설립,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 사업으로 일가를 이뤘단다. 고집스럽게 장인의 길을 가는 제자와, 전통기법을 현대적 아이디어에 응용하는 제자가 있어 양 어깨가 든든하다.
문화재 자격 박탈이라는 일생일대의 봉변을 당한 내막은 좀 어이없다. 다른 목조각장이 허길량에 이어 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된 일이 있었다. 문화재 전문가들 사이에 후보의 부적격 논란이 일었다. 그도 자격과 선정절차를 문제삼는 민원을 제기했다. 때마침 뇌물수수 소문이 돌았고, 문화재청은 담당직원을 조사했다. 허길량이 소문을 퍼뜨렸다고 의심한 직원은 그에게 협박편지를 보냈다. 둘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옻칠 공예인이 중재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그 직원이 곤란한 입장이다. 문화재청 ‘내부 해명용’으로 제출한다고 하니 ‘허위사실을 퍼뜨렸다’고 인정하는 사과문을 써주고 둘이 화해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미 작성된 사과문을 들고 와 그대로 옮겨 적으라고 했다. 허길량은 한 사람의 공직생활이 끝장나게 생겼다는 말에 마음이 약해져서 부탁을 들어줬다고 한다. 참,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허길량의 선의는 짓밟혔다. 문화재청 직원은 사과문을 증거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묵살됐다. 집행유예로 사법처리됐다. 속전속결, 문화재 해제 조치로 이어졌다. 그는 무엇보다 세속적 자리다툼이나 벌이는 사람으로 취급당한 것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천하에 못믿을 사람’인 중재자는 3년이 지난 뒤에야 “문화재청 직원을 돕기 위해 거짓 사과문 작성을 종용했다”고 인정했다. 지난 5월 법원은 허길량의 승소 판결을 내렸다. 소송이 시작된 지 9년, 문화재 지위를 빼앗긴 지 7년이 흐른 뒤다. 문제의 문화재청 직원은 벌써 퇴직했다.
허길량은 “장인들에게 인간문화재 칭호는 빛나는 명예이자 자부심”이라고 했다. 그는 진상이 밝혀졌으니 인간문화재 자격이 원상회복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요즘은 33비천상 같은 독창적인 대작들을 공개할 전시장 구하는 일로 바쁘다. 규모가 크고 권위있는 박물관, 대형 전시관들은 인간문화재 취소를 이유로 임대를 거절한단다. 하루 빨리 전시를 해야 하는데 안타깝다고 했다. 국내 전시를 마치면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전시도 생각하고 있다. 한국 고유의 불교 미술품이 외국에서도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을 거라고 믿는다.
천년 불교미술 전통을 현재의 문화로 되살리고, 우리 시대 새로운 미의식을 담아 미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후손들에게 남겨주는 일. 허길량 장인의 꿈은 아주 크다.
[ 김석종의 만인보 바로가기 ]
ⓒ 경향신문 & 경향닷컴
'김종철/김석종/고영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영재의 천관산 편지]70평 자갈밭 할머니의 ‘天心’ (0) | 2011.11.11 |
---|---|
[고영재의 천관산 편지]절망의 땅, 희망의 땅 (0) | 2011.11.11 |
[김석종의 만인보]정설을 뒤집는 ‘농부 사학자’ (0) | 2011.11.10 |
[김종철의 수하한화]FTA, 농사 안짓고 살 수 있다는 환상 (0) | 2011.11.10 |
[고영재의 천관산 편지]쌀의 눈물 (0) | 2011.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