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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김석종/고영재

[고영재의 천관산 편지]70평 자갈밭 할머니의 ‘天心’

고영재 언론인

윤씨 할머니 ‘남동댁’은 팔순 고개를 넘어섰다 할머니가 손수 일구는 ‘손바닥 땅’은 고작 70평이다 할머니는 말없이 가르친다. ‘복지’를 놓고 왜 싸워

시골살이 재미는 쏠쏠하다. 이따금 서울 친구들이 전화로 위로의 말을 전해 온다. “스트레스는 없지?” “맑은 공기 마시고 땀 흘리니 건강에 좋겠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찌 재미가 그것뿐이겠는가.

자연과의 교감, 그 가치를 저울대에 올려놓고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동네 아줌마들은 병아리 농투성이를 딱하다는 표정으로 묻곤 한다. “서울에서 편히 사시지, 왜 사서 고생이시오.” 필자는 대꾸한다. “저 천관산 봉우리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제 하루 품삯은 건지고도 남을 겁니다.” 물론 말의 사치다. 그러나 잊고 살아온 자연과의 만남은 정녕코 축복이자 즐거움이다. 땅에 땀을 흘리는 일은 보람을 안겨준다. 누구나 오묘한 자연의 섭리를 곱씹을 수 있는 기회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2000평 콩밭에 나름 힘을 쏟았다. 올여름 장맛비는 왜 그리도 끈질겼는지. 제 세상을 만난 잡초들, 그 ‘독일병정’의 기세를 아는 사람은 다 알 터. 그 잡초와의 전쟁도 무사히 치러냈다. 거의 달포 걸려 콩밭 김매기를 끝내고 추석을 쇨 수 있었다. 물론 제초 작업은 마을 아줌마들의 도움이 컸다. 병충해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콩밭을 바라보노라면 가슴 뿌듯하다. 이만큼 자라준 콩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봄에 심은 매실나무도 어느새 부쩍 자랐다. 새끼손가락 굵기에서 엄지손가락만큼, 한 자 남짓했던 키는 어른 키로 컸다. 한 고랑 고구마 밭도, 아홉 그루 호박도 가을을 기다리며 영글고 있다.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다. “땅이 질퍽한 날, 밭은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반기지 않는 걸.” 핑계도 좋다. 폭우가 아니라면 곧잘 천관산을 오른다. 온몸에 휘감기는 운무 자락 휘날리며 산을 오르는 묘미라니. 화창한 날의 산행과는 또 다른 맛이다. 안갯속에 홀로 갇힌 순간, 생각의 날개는 오히려 퍼덕인다.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은 잠시, 뼈저린 반성과 함께 갖가지 상념에 젖는다. “지식은 무엇이고 지식인은 뭐하는 사람인가.” “논리는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지식 나부랭이의 덫에 걸린 채, 논리의 노예로 살아온 것은 아닌가.”

또 하나의 시골살이 매력은 자연을 닮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연의 섭리가 몸에 밴 그들 삶의 모습은 그 자체로 큰 스승이다. 건강한 삶, 분수를 아는 삶, 더불어 사는 마음, 희생과 측은지심이 밴 삶은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들은 곤궁하지만 결코 일확천금을 기대하지 않는다. 급하다고 거짓을 말하는 법도 없다. 배운 것이 짧아도 순리를 알고, 그 순리를 따른다. 천재지변조차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은 작황이 좋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수확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오만은 자칫 동티를 부를지도 모르는 터다. 농촌의 삶은 갈수록 고단해지고 있다. 그러나 남을 탓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에 넘치는 호강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높은 분의 허풍은 귀에 거슬린다.

윤씨 할머니 ‘남동댁’은 팔순 고개를 넘어섰다. 할머니는 지금도 밭농사를 짓는다. 할머니가 손수 일구는 ‘손바닥 땅’은 고작 70평이다. 그것도 천관산 골짜기, ‘깊은재 고랑’ 자갈밭이다. 경운기 같은 농기계가 들어갈 길조차 없다. 할머니는 맨주먹으로 자갈밭과 씨름한다. 쇠스랑과 삽, 낫과 호미가 할머니의 무기다. 10여년 전 저세상으로 떠난 영감의 쟁기질이 한없이 아쉽다. 그래도 밭엔 고추와 콩, 호박, 배추와 무가 탐스럽게 자란다. 그것들은 올가을에 수확해 아들딸들에게 보내질 것이다.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홀로 꾸려가고 있다. 자식들에게 손을 내미는 법은 없다. 오히려 자식 걱정이 앞선다. 할머니에겐 ‘부수입’도 있기는 하다. 논농사를 직접 짓기엔 무리인 터라 소작으로 내놓은 아홉 마지기 논에서 해마다 ‘임대 수입’이 나온다. 쌀 다섯 가마니와 현금 60만원이 그것이다. 게다가 매달 몇 만원 현금 수입도 있다. 요즘 ‘축소 논란’을 빚고 있는 노령연금이다. 그 알량한 소득을 할머니는 ‘풍족하게’ 쓴다. 할머니 식량 두 가마니를 빼고는 모두 자식들 몫으로 골고루 나눠줄 요량이다. 자갈밭의 콩도 메주가 되어 사남매를 찾아갈 것이다. 막내딸에겐 빠듯한 생활비를 쪼개 마련한 특별한 봉투가 내려갈 것이다. 젊어서 혼자된 막내딸이 마냥 안쓰럽다. “자식들이야 마다하지. 그래도 주고만 싶어. 내 목구멍에게 들어가는 게 아깝지, 자식한테 뭐가 아까워.”

열여덟 새색시는 ‘남동댁’으로 64년을 살아 왔다. 그 64년은 그의 이름 ‘윤감순’이 잊혀진 세월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세상을 잘 모른다. 그러나 이웃 백 할머니의 아픔은 헤아린다. 중소기업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쫓겨 난 아들의 처지에 눈물짓는 어머니의 마음을. 할머니는 진보와 보수를 구분할 줄 모른다. 다만 뜨거움과 냉기를 몸으로 느끼듯, 무엇이 순리인지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처신할 따름이다.

할머니는 말없이 가르친다. ‘복지’를 놓고 왜 싸워. 복잡한 숫자놀음이 왜 필요해. 무릇 복지의 출발점은 어렵게 사는 피붙이를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 마음인 것을. 재원은? 그 다음에 걱정해도 늦지 않다. ‘안철수 쓰나미’인가 뭔가만 해도 그렇다. 그 쓰나미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탁월한 능력인가? 화려한 언변인가? 비전인가? 경륜인가? 그런 것이 아님은 두 말할 나위가 없지 않은가. ‘적이 수더분한 풍모, 가식 없는 말과 행동거지’ 아닌가. “적어도 그는 거짓을 일삼는 사람은 아닐 테지.” 그 쓰나미는 진실성에 대한 목마름의 표현이자, 위선에 대한 사형선고다.

땅은 안다.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의 위선과 거짓, 얄팍한 산술을. 그리고 순리를 저버리는 자, 제아무리 날뛴들 제풀에 자빠지고 마는 섭리를. 정치하는 이들에게 권유한다. 올가을엔 들판에서 땀 흘리며, 자신을 돌아볼 것을. 바쁜 일손도 돕고, 정치 탈바꿈의 길을 찾을 수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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