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종철/김석종/고영재

[고영재의 천관산 편지]숫자의 마술

세상은, 대중은 진실과 ‘맑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사람들은 ‘적당한 자연’ ‘적당한 정의’만을 원한다

요즘 사람들은 숫자의 감옥에 갇혀 산다. 숫자는 현상을 간명하게 설명하는 도구이자 상징이다. 숫자는 현대문명의 밑거름으로 작용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현대인들은 숫자에 울고 웃는다.

가을걷이가 끝났다. 메주콩 600㎏을 거뒀다. 1㎏에 5000원씩, 300만원을 손에 쥐었다. 농사에 들어간 경비가 꽤 많다. 품삯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홀로 감당하기엔 콩밭이 다소 넓었던 터다. 밭갈이와 김매기, 가을걷이 등 콩 농사 전 과정에 걸쳐 이웃의 도움이 불가피했다. 파종기와 탈곡기, 선별기 등 기계 힘도 빌렸다. 씨앗 값에 비료 대금, 장마철을 전후해 두 차례 뿌린 농약 값을 보태면 경비는 거의 200만원에 이른다. 수입 300만원에 경비 200만원이니, 올 콩 농사로 100만원쯤 수익을 기록한 셈이다. 물론 콩 농사에 쏟은 정성과 땀의 비용은 빠졌다.

일러스트 | 김상민

마을 어른들의 진담 반 농담 반 핀잔이 쏟아진다. “내년에는 차라리 땅을 놀리게나.” 그래도 가슴 뿌듯하다. 숫자 이상의 쏠쏠한 소득이었다. 한 해 농사를 지어보았다는 경험이 내년의 농사를 기다리게 한다.게다가 ‘천풍산 거사’는 큰 위안이다. 천풍산 골짜기에서 홀로 ‘맑은 영혼’을 닦는 그는 물질적인 욕심을 잊고 산다. 그의 얼굴에서 탐욕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다. 대신 은은한 여유가 흐른다. 그의 삶은 간결하다. 그리고 자연적이다. 최소한의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의 집은 7평짜리 귀틀집. 부엌 칸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을 둔 3칸 집이다. 장작 몇 개비로 군불을 지피면 구들방은 이내 뜨뜻이 달아오른다. 천풍산 골짜기는 그의 정원이자 생계의 터전이다. 100평 텃밭엔 무와 배추, 야생차나무, 푸성귀가 자란다.

1평 남짓한 별채는 그의 작업장이다. 이따금 나무를 깎아 수저나 함지박 따위 생활용품을 만든다. 야생 녹차와 함께 목각 작품은 그의 주요 수입원이다. 그의 연간 현금 수입은 100만원 남짓이다. 그러나 그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며 미소 짓는다.

집 모퉁이 옹달샘에선 언제나 맑은 기운이 솟아오른다. 재래식 화장실은 정갈하다. 역겨운 냄새는 물론 없다. 그의 배설물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래선지 텃밭 푸성귀는 유난히 탐스럽다. 집 안에 문명의 이기, 디지털기기는 아무것도 없다. 그는 전깃불 대신 밀랍으로 직접 만든 양초를 밝힌다.

-그 수입으로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가.

“대부분 자급자족한다. 그래도 이모저모 돈 쓸 일 있다. 이른 봄 야생 녹차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보내면 5만~10만원 현금으로 돌아온다. 목각 작품도 생활비에 보탬이 된다. 아궁이 놓아 주고 약간의 수고비를 받기도 한다. 살아가는 데 충분한 돈이다.”

-사람들은 이런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탐욕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자연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도, 인간성이 날로 황폐화하는 것도 끝없는 욕심이 그 근본 원인이다. 욕심을 줄이면 누구나 풍족함을 느낄 것이다.”

-귀농현상을 희망적인 조짐으로 볼만한가.

“귀농현상 바람직하다. 정책적으로 뒷받침할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연의 삶이 아닌, 도시의 삶 그대로의 귀농은 진정한 귀농이 아니다.”

-도시의 삶이란.

“도시인은 머리로 살 궁리만 한다. 손발을 움직일 생각은 아니한다. 똥 묻혀 가며 자연으로 거름을 내는 ‘순환의 섭리’를 잊고 산다. ‘맑은 마음’을 잊은 그들에게 자연은 보기 좋은 그림일 뿐이다.”

-맑은 마음이란.

“자연의 마음이다. 맑은 마음이 꼭 ‘순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닥나무로 만든 한지는 본래 누리끼리하다. 사람들은 화학적 처리과정을 거쳐 표백된 종이를 깨끗한 것으로 오해한다.”

-세상과는 담을 쌓고 있는 생활이다.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한 일간지를 우편으로 받아 보고 있다. 천리 밖 서울시민들의 마음도 헤아리는 데 신문으로 충분하다. 서울시장 선거 결과도 기꺼이 전해 들었다. 그러나 한 편으론 끔찍했다. ‘문제의 정당’에 40% 넘는 서울 시민들이 표를 던지는 기이한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탐욕과 환상이 무섭다.”

-세태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아닌가.

“사회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대책을 세우고 혁신을 말하지만 ‘작은 저울질’로 현상을 모면하는 데 급급하다. 제대로 된 ‘씨앗’이 없다. 씨앗을 싹 틔우고 가꿀 ‘밭’도 병들어 있다. 장래가 걱정될 따름이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세상과 부딪쳐야 하지 않나.

“나도 전에는 믿었다. ‘설득과 대화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세상은, 대중은 진실과 ‘맑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요즘 생태를 말하고 진실과 정의에 대한 관심이 높지만 세상 사람들은 ‘적당한 자연’ ‘적당한 정의’만을 원한다.”

-가정을 꾸리는 일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필요하다.

“물론이다. 1년에 두 번씩 맞선을 보고 있다.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인연의 오묘한 끈을 누가 알겠는가. 당분간 연례적인 맞선 행사는 계속할 생각이다.”

그는 ‘외계인’이 아니다. 공고를 졸업한 그는 평범한 시민의 길을 걸었다. 한동안 다양한 사회를 경험하기도 했다. 방앗간, 일간지 지국, 서점, 설계사무소 등이 그의 일터였다. 그는 사회적 비리를 대범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동안 방황했다. 귀농운동본부에서 강의를 듣기도 했다. 10년 전 한 수행자를 만난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자연에 대한 고뇌와 사색의 방향이 외곬으로 치달았다. 그는 어머니의 땅, 자연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미친 사람’도 아니다. 다만 ‘맑은 정신’을 상실한 현대인과 문명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를 따름이다. 그의 삶은 숫자에 옥죄인 현대인을 나무라는 듯하다. “악마의 숫자 놀음에서 해방을.” 그의 나이 아직 서른아홉이다. 한 젊은이의 고뇌하는 모습은 희망이다. 그것은 또한 시대의 아픔이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