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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김석종/고영재

[김석종의 만인보]아리랑을 떠받들고 사는 김연갑

김석종 선임기자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그를 볼 때마다 참 딱했다. 30년 넘게 ‘주야장천’ 한우물을 팠는데도, 세상이 그런 성과를 하나도 보듬어주지 않으니 말이다. 아리랑 연구가 김연갑(58) 이야기다. 그는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아리랑을 수집하고, 연구하고, 보존하는 일로 젊음을 다 보냈고, 이제 초로에 들었다.

1970년대 최전방 군복무 시절 대남 선전용 확성기를 통해 북한 아리랑을 들었다. ‘저기 저 산이 백두산이라지. 해 뜨고 달 뜨고 별도 뜨네~.’ “가슴 뭉클한 게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따라하게 되더라구….” 제대 후 탄광촌인 사북에서 진폐증 걸린 광부에게 들은 정선 아라리는 곡조나 느낌이 또 달랐다. ‘남양군도 검둥이는 얼굴 손만 검지만, 우리네 탄쟁이는 얼굴 손 가슴까지 검다네~.’ 1980년 5월, 우연히 광주에 갔다가 맞닥뜨린 ‘시위대’들도 아리랑을 목 터지게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빼도박도 못하고 아리랑에 발목 잡힌 팔자다.

나운영, 고은, 허규 선생 등과 함께 ‘아리랑 기행단’을 꾸린 것이 1980년대 초다. 이어 ‘모임 아리랑’을 이끌다가 1994년 ‘한민족아리랑연합회’를 만들었다. 이 민간단체에서 그는 만년 상임이사다. 몇몇 명망가들이 회장, 이사장을 했지만 단체의 살림을 거의 혼자서 꾸렸다고 보면 된다. 그는 ‘아리랑학회’ 이윤구 회장(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이 새로 이사장을 맡기로 했다며 기대가 컸다.

그가 평생 월급이라고 받아본 것은 모두 합쳐 딱 3년이다. 원로 역사학자와 서지학자의 연구소에서 연구실장을 하면서다. 처음부터 “그깟 아리랑에 무슨 연구할 게 있느냐”며 안팎으로 지청구가 따랐다. 결국 집을 나왔고, 딸내미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얼굴도 못봤다. 일찌감치 직장생활을 해야 했던 딸이 어느새 결혼을 했고, 이제는 아버지 편이 돼준다며 그는 울먹였다.

추종자가 있기는 하다. 정선, 진도, 밀양, 영암 같은 아리랑 고장 사람들이다. 김연갑이 나타나면 재워주고 먹여주고, 농사짓는 이는 쌀까지 보내준다. 그런 풍찬노숙, 신산고난은 얼굴에 짙은 그늘로 아로새겨졌다. 이 말을 하면 펄쩍 뛰겠지만 ‘아리랑 청승’이 따로 없다. 그가 뜯어고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아리랑은 청승’이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흥겨워서 부르면 가슴이 뻥 뚫리는 ‘흥의 노래’, 서글퍼서 부르면 애간장이 다 녹는 ‘치유의 노래’가 아리랑이라는 거다.

김연갑이 평생 아리랑을 떠받들고 사는 이유가 거창하다. 그것이 민족의 노래이자 역사이며, 현재를 넘어 미래에 그 가치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한국의 대표적인 파워 브랜드라는 신념이 있어서란다.

김연갑이 국내외에서 수집한 아리랑은 70여가지, 7400수나 된다. 아리랑과 관련된 채록 음반 20여장을 내고, 책도 열 권 넘게 펴냈다. 수백가지 희귀자료도 찾아냈다. 아리랑을 서양에 처음 소개한 선교사 헐버트의 악보, <매천야록>의 아리랑 기록, 외국가수가 재즈로 부른 ‘아디동 블루스’ 같은 자료들은 죄다 그가 모은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같은 받는소리(후렴)를 기본으로 사설을 섞어가며 부르는 것이 아리랑이다. 뗏목꾼도, 심마니도, 여염집 아낙도, 농사꾼도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한 소절로 구성지게 뽑아낸 후 후렴을 붙이면 그대로 새로운 아리랑이 되는 것이다. 자연이 있고, 인생이 있고, 질펀한 성담론까지 등장한다. 말하자면 ‘노가바’의 원조라는 거다. 응원가, 애국가, 혁명가, 군가, 운동권노래, 유행가로도 불렸다. 광복군아리랑, 독립군아리랑, 만주아리랑, 태평아리랑, 파르티잔 유격대 아리랑, 중국아리랑, 치르치크아리랑, 사할린아리랑…. 분단의 아픔은 아리랑에서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 조각 나는데, 38선이 깨지면 한 덩어리 된다네’로 절절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김연갑은 국내외로 셀 수도 없이 발품을 팔아 이런 모든 아리랑을 한 줄로 꿰어냈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주제가’였던 나운규 영화의 ‘아리랑’은 월드컵 응원가로 윤도현밴드와 함께 고래고래 불렀던 바로 그 아리랑이다.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 배경음악으로 아리랑을 썼고, 걸그룹 원더걸스도 해외무대에서 아리랑을 불렀다. 지금도 나라밖 동포들은 모였다 하면 아리랑을 부른다. 한민족을 묶는 단 하나의 노래. 그래서 아리랑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민족의 노래’라는 것을 설명하느라 ‘아리랑 전도사’는 목이 쉰다.

김연갑은 정선, 진도, 서울, 밀양 등 모든 아리랑을 국가무형문화재로 등재시켜야 한다고 내내 주장해왔다. 그런 다음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옳다고 했다. 그러나 정부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든 흥얼거리는 아리랑이 무슨 무형문화재냐며 들은 척도 안 했다. 기능보유자가 없으니 문화재가 될 수 없다는 거다.

외국에서는 K팝 저력이 아리랑에서 나온다는 평가를 한다는데, 이 땅에서는 여전히 찬밥신세다. 김연갑이 지난해 또 억울한 얼굴을 하고 나를 찾아왔다. 중국이 옌볜 등 조선족의 아리랑을 중국 국가무형문화유산에 올렸을 때였다. 국가 차원의 조사·연구가 필요하다고 늘 말해온 김연갑으로서는 속터질 노릇이었다.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말에는 벌떼처럼 들고일어나는 국민들이 아리랑이 중국문화라는 말에는 꿈쩍도 안 한단 말야.”

우리나라 문화 수준은 이 정도다. 당시 문화부 장관은 곧 대책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문화부가 “아리랑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남북한 공동으로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새해 업무보고를 했다. 그에게 올해는 희망을 좀 가져도 되는 것 아니냐는 전화를 했다. 김연갑은 한국이 독자적으로 유네스코 등재를 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반드시 남북한 공동 등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중국이 북한과 손잡으면 돌이킬 수 없다고 했다. 귀담아 들을 만한 이야기다. 어쨌든 아리랑을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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