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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김석종/고영재

[김종철의 수하한화]원자력과 인간성 상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고리 원전 1호기의 냉각 시스템이 12분간 중단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한 달 뒤에야 원자력안전위원회에 보고됐다는 사실이다. 사고 낌새를 우연히 알아챘던 한 시의원이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끝내 은폐됐을 것임이 확실하다. 그렇게 볼 때, 12분 후 전원이 회복되었다는 것도, 회복되었으니 이제는 안심해도 된다는 말도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원전이란 원래 가공할 위험성을 내포한 시설이지만, 고리 원전 1호기는 유별나게 사고가 빈번한 핵 시설로 이미 널리 알려져 왔다. 설계 수명대로 폐쇄해야 마땅한 노후시설을 무리하게 연장 가동함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다. 지금까지 중대사고가 없었던 것은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원전당국이나 정부는, 후쿠시마 이후에도, 고리 원전을 포함한 전국의 원전에 대한 확실한 안전대책을 강구하고 있다는 증거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유일한 조치는 원자력안전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옮긴 일이지만, 그 수장에 평생 원전업계와 함께 일해 온 인사를 임명함으로써 위원회의 존재이유를 정부 스스로 부정하는 몰상식을 드러냈다.

어쩌려고 이러는 것일까. 이 땅에서 중대한 원전 사고가 터지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정말 안 되는 것일까. 일본은 그래도 한국보다 훨씬 영토가 넓다. 만약 한국에서 사고가 난다면 어디로 도피할 수 있을까. 가령 서울은 직접적 방사능 피해지역에서 벗어난다 할지라도 배후지를 잃은 서울이 과연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원자력은 완벽한 관리·통제가 불가결한 기술이다. 사소한 실수 하나가 언제라도 방사능 대량 유출 사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원자력 시설은 겹겹의 방호 설비를 갖추도록 설계되어 있고, 원전당국과 국가에는 가장 엄격한 안전관리 책무가 있다. 그러나 원전은 아무리 엄격히 안전조치를 강구한다 해도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단지 사고 발생 확률이 낮아진다는 것뿐이다. 본래 생명과 상용 불가능한 게 방사능이기 때문에 방사능 방출 사고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낮은 확률’을 ‘절대적 안전성’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컨대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라는 지식인이 그렇다. 전후 일본사회에서 온갖 문제에 관해 발언을 하고, 많은 젊은이들의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돼온 이 ‘지(知)의 거인’은 원자력에 관해서는 평생 일관된 옹호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는 며칠 전 사망 직전에 가진 인터뷰에서도, 후쿠시마 사고의 영향으로 인류가 쌓아온 “최첨단 과학기술의 성과”인 원자력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이 다시 원숭이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얘기라며, 필요한 것은 방사능에 대한 ‘완벽한’ 방어책을 강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인간사에 과연 완벽성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인간이란 원래 실수를 하게 마련인 존재이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인간조건이다. 이 점을 망각할 때 인간은 끔찍한 괴물이 될 수 있다. 일찍이 철학자 하이데거가 원자력에 관해 강한 의문을 품었을 때, 근본적인 논거가 바로 그것이었다. ‘원자력 시대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강연(1963년)에서 하이데거는 말했다. “설령 원자 에너지를 관리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간이 기술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한 관리가 불가결하다는 것이야말로 (중략) 결국 인간이 원자력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근본적인 무능을 은밀히 폭로하는 것이다.”

원자력이라는 대책 없는 기술을 인간생활에 도입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사고의 산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성에 내재된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를 무시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원자력에 대한 완벽한 통제가 가능하다는 믿음은 공허한 관념에 빠지기 쉬운 도시 지식인의 망상에 불과한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원자력 옹호자·추진론자 중에서도, 적절히 관리만 한다면 원전이 절대 안전하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증거는 원전이 언제나 가난한 시골 벽지만을 골라서 건설되어왔다는 점이다. 실제로 원전 부지를 고를 때 정부와 업계가 항상 고려하는 첫째 조건은 “인구가 적고 학력 수준이 낮고 서울에서 먼 곳”(영덕/영양/울진/봉화지역 국회의원 녹색당 후보 박혜령씨의 말)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원자력 체제의 치명적인 비윤리성이 있다. 원자력은 미래의 인간 후손과 이 세상의 숱한 생령들에 대한 배려 없이 오로지 현세대 인간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원천적인 부도덕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동시대의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도 서슴없이 요구하는 폭력적 기술이다. 위험구역에서 생명을 걸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장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원전 지역 주민들도 늘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동네에 원자력 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기꺼이 반길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시골 사람들이 결국 원전을 받아들이는 것은 피폐한 지역경제 때문에 달리 먹고 살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방의 피폐상황은 산업화 이래 농촌공동체의 희생을 강요하며 도시 중심의 번영을 추구해온 일관된 정책노선의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바로 이 농어촌지역의 강요된 빈곤을 이용하여 원전을 받아들이게 하고, 또다시 그 자리에 원전을 증설하려는 게 권력 엘리트들의 습관적인 행태이다. 정부와 업계, 어용학자, 어용언론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흥청망청 전기를 소비하면서도 그 전기 속에 포함된 약자들의 피눈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도시민들의 죄도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원전을 새로 건설하려면 권력의 중심지인 서울의 세종로나 강남의 번화가에 세울 것을, 반어법이 아니라, 진심으로 제안하고 싶다.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어디에서도 세워서는 안 된다고 누구보다 서울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절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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