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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김석종/고영재

[김종철의 수하한화]녹색정치의 가능성, 언제쯤 열릴까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총선 결과는 실망스럽기 이를 데 없다. 선거란 무엇보다 집권세력의 공죄를 준엄하게 심판하는 행위여야 하고, 그 심판은 민주주의의 존속에 불가결하다. 이것은 초보적인 진실이다.

그런데 딴 것은 젖혀두고, 현 정권은 민간인 사찰 문제 하나만으로도 엄중한 정치적 단죄를 받아야 마땅했다. 사찰이란 민주주의를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가장 비열한 통치 방식이다. 개인적 약점을 캐내 정치적 저항이나 반대 목소리를 침묵시키려는 게 ‘사찰’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짓을 끊임없이 자행했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는 상황에서의 선거였음에도, 집권세력이 또다시 국회 제일권력을 차지하는 기이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 나라 민주주의의 침체를 보여주는 서글픈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번 선거 결과는 집권당의 승리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미 여러 사람이 지적했듯이, 정당별 득표결과를 보면 범여권에 비해 범야권 쪽의 지지율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야당세력은 이번에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고도 패배한 셈이다. 이 모순은 말할 것도 없이 현행 선거제도의 불합리성 때문이다. 한 지역에서 최다 득표자 1인만 선출되는 제도는 필연적으로 민주적 대표성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패한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뜻은 전혀 반영되지 못하는 구조인 것이다. 이 명백한 모순에 대한 보완책의 하나가 비례대표제지만, 현재 여의도의 비례대표 의석은 보완책이라고 하기에는 그 비중이 너무나 미미하다.

원래 대의제 민주주의는 결함 많은 제도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현실적 대안이 없는 이상, 다양한 보강 장치를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민의를 최대한 바르게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의 확보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긴급한 것은 개헌이 아니라 선거제도의 개혁일 것이다. 대표성의 왜곡이 불가피한 현 선거제로는 최소한의 합리적 정치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의 선거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요식행위일 뿐, 기득권층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장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쉽다.

미국에서 그렇듯이 한국의 정치도 이대로 가면 결국 기본적 정책 방향이 별로 다를 게 없는 양당독재체제로 굳어질 게 틀림없다. 현 선거제는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가진 신생 정치세력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가 직면한 현실이 이제는 기성의 사상, 관념, 가치에 의해서는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갈수록 심화되는 세계적인 환경·자원·에너지·금융위기는 지금까지 화석연료에 기반을 둬 왔던 성장경제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장의 시대를 뒷받침해온 낡은 사고와 제도의 효력이 더는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엄중한 문제를 계속 외면할 때, 그 궁극적인 결과는 집단적 자멸 사태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설령 이번 선거 결과가 야당세력의 승리였다 해도 그게 꼭 의미 있는 승리였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현재 야당세력이라고 해서 시대현실의 심각성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비근하게는 한·미 FTA나 4대강 문제, 원자력에 관한 문제의식만 해도 그렇다. 이 현안들에 대해 그들은 지금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려 있다. 그것뿐만 아니다. 예를 들어, 지속 가능한 삶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농업문제에 대해서 이번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은 놀랍게도 단 한마디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 역대정권에 의해 한국의 농사는 끝없이 홀대를 당해왔고, 노무현 정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동안 농촌인구는 500만에서 350만으로 줄어들었다. 이것은 150만의 인구가 일자리를 잃거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뜻하지만, 실은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농업이 이제 사멸 직전에 이르렀다는 기막힌 사실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권력 엘리트들은 언제나 농업규모의 확대, 농사의 기업화, 경쟁력 강화라는 공허한 말만을 되풀이해왔지만, 그들은 그 경쟁력 논리의 궁극적인 결과가 무엇인지 한번도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해본 적이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제성장이 멈춘 시대의 삶은 어떻게 될까. 확실한 것은 원래 그래왔듯이 소농 중심의 순환적 농사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최후 보루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화석연료 혹은 원자력에 의존하는 성장경제 시대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자원과 에너지 확보를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고, 전쟁까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석유를 확보한들, 장기 지속될 수 없음은 뻔한 일이다.

따라서 경제규모를 확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식적인 방식이 아니라 공생과 상부상조의 원리에 따른 삶을 재창조하는 게 새로운 시대의 핵심과제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현명한 방식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어차피 앞으로는 새로운 농경 중심 사회일 게 틀림없고, 따라서 성장 없는 시대를 대비한다는 의미에서도 지금은 건강한 농사기반의 확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선거제도로는 이러한 장기적인 대책,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위한 치열한 논의를 위한 정치적 틀의 형성이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이다. 시대착오적인 성장논리로부터의 탈각을 말하는 진실로 생산적인 목소리가 이런 선거판에서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녹색당이 처한 처지가 바로 그러했다. 세계 70여개 국가에 존재하는 게 녹색당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번에 최초로 등장하여 선거에 참여했다. 녹색당은 탈핵·탈성장·농업회생을 최대 긴급 현안으로 인식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효과적인 대책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거대 정당들의 그늘에 가려져 녹색당의 목소리와 문제의식은 완전히 변두리로 밀려나고 말았다. 녹색당 자신의 역량부족 탓도 크지만, 거대 정당의 고식적인 목소리 이외에 이단적인 목소리의 시민권을 허용하지 않는 선거제도 하에서 이것은 신생정당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독일의회만큼이라도 비례대표제가 확대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 녹색정치가 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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