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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김석종/고영재

[고영재의 천관산 편지]절망의 땅, 희망의 땅

고영재 | 언론인

워낭소리는 들녘에서 사라졌다. 트랙터의 굉음이 요란할 따름이다. 기계가 사람 일을 척척 대신하는 ‘멋진 세상’이다. 땅 갈아엎기도, 모심기도, 가을걷이도 거대한 ‘쇳덩어리’의 몫이다. 무서운 제초제는 삼복더위 속 김매기의 고통에서 농민을 해방시켰다. 부지깽이도 춤춘다는 농번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40~50년 전만 해도 머슴을 두지 않으면 열 마지기 농사도 쉽지 않았지.”

칠순의 ‘60년 농부’ 고광호 할아버지(76)도 기계의 효용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세상일 묘하다. 몸은 확실히 편해졌는데 삶은 팍팍해졌다. 할아버지는 ‘현역’이다. 4000평 논밭을 손수 일군다. 경운기 1세대인 그는 지금도 경운기를 직접 몬다. 마을 청년회 회원이기도 하다. 청년회원을 고집하는 뜻이 있다. “늙기도 서럽거니와, 갈수록 어려워지는 농촌 앞날이 걱정이야.”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이앙기 값 2000만원에, 콤바인 값은 5000만원에 이른다. 그나마도 1년 중 기계가 움직이는 기간은 고작 보름 남짓이다. 대형 트랙터는 한 대 값이 1억원을 훌쩍 넘는다. 빚더미는 농민에게 숙명이다.

한·EU, 한·미 FTA 쓰나미는 또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꼬.

‘쌀 한 되’는 오랫동안 농촌에서 불문율로 내려온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지금은 그 열 배인 한 말로도 어림없다. 그 ‘한 되와 한 말’의 괴리 속에 한국농촌 문제의 부조리와 고난이 숨어 있다.

“그래도 추곡수매 시절이 좋았어. 매상 날이면 수매장 부근 음식점이 흥청거렸지.”

그는 대도시 삶을 버리고 차동마을로 귀농한 김학선씨(45)에게도 마뜩잖은 시선을 보낸다. “농촌에서 무엇을 이루겠다는 것인지. 남의 일이지만 답답해.”

김씨는 맞벌이 부부의 상당한 수입을 마다하고 귀농을 결단한 터다. 그에겐 중1, 초등1짜리 두 딸이 있다.

- 귀농 5년째다. 만족하는가.

“도시에서는 누리기 어려운 자연과 ‘시간’을 만끽한다. 아이들도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키워가는 듯해 대견하다.”

- 아이들 교육은 모든 부모들의 주요 관심사다.

“농작물 재배와 아이들을 키우은 일은 닮은꼴이다. 웃자람은 건강한 성장을 저해할 따름이다. 어린 나이에 살벌한 경쟁체제에서 비켜 서 있다는 점은 아이들에게 축복이다.”

- 아이들에게 자연은 무엇인가.

“자연은 에너지의 창고이자 혼탁한 사회의 ‘산소탱크’라고 믿는다. 농촌생활의 기억이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아이들이 쓸모있는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 아이들이 시골학교에서 어찌 변했나.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작은아이는 매사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자기주장도 분명하다. 큰아이도 ‘1등에 대한 집착’ 없이 다양한 독서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듯하다.”

- 문화적 소외감을 말하기도 한다.

“전혀 불편 못 느낀다. 도시의 삶 자체가 문화생활을 보장하지 않는다. 도시인들은 어쩌면 ‘거짓의 문화’에 도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의 섭리와 질서, 인터넷, 책은 시골에도 충분하다.”

- 육체노동은 힘들다.

“물론이다. 그러나 견딜 만한, 아니 즐거운 고통이다. 정해진 시간 동안,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임금과 바꾸는 노동과는 다르다. 농사일은 정신과 육체의 결합, 곧 전인격적 활동의 과정이자 결과다.”

- 귀농을 권할 텐가.

“도시에서의 창업과 비견할 만하다. 도전의 대상으로 매력적이다. 다만 자기만족과 확신 없인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고 본다. 지자체가 경쟁적으로 내놓는 귀농 지원 프로그램이나 매스컴이 전하는 ‘성공 사례’를 믿을 것은 아니다.”

- 귀농 성공을 위한 조언을 한다면.

“도시인의 색깔을 지우고, 자연스럽게 농촌에 녹아드는 자세가 중요하다. ‘풍광 아름다운 전원살이’의 꿈은 깨야 한다. 도시인의 정교한 이해타산은 쓸모없다. 막걸리 잔 나누며 ‘도와주십시오’ 부탁할 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게 농촌 인심이다.”

- 정부의 농민·농촌정책에 대한 생각은.

“기업농, 대농 중심의 정책으로는 농촌문제 해법이 될 수 없다. 정부 정책의 중심을 기업농에 두는 한 중소농 자립의 길은 없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농업노동자로 전락하는 비극은 막아야 한다.”

- 대안은.

“이른바 ‘생산성’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마땅하다. 농촌의 가치를 인정하고 농촌 리모델링을 위한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모색할 때다. ‘농산물 가공권’을 농민들에게 되돌려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농업이 대기업에 예속된 구조 아래서는 농촌을 살릴 수 없다. 농업은 이미 ‘잃어버린 직업’으로 전락하고 있다. 농민들이 최소한의 소득과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정책방향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 대기업의 경쟁력, 자본에 길들여진 소비자 인식의 벽을 뚫을 수 있나.

“안전성은 식품 경쟁력의 으뜸 변수다. 최소한의 첨가물, 최고의 신선도는 대기업에 맞설 수 있는 훌륭한 무기다. 농산물이 창출하는 이윤을 농민들이 차지하는 것은 ‘정의’이기도 하다. 건강한 농산물을 지속적으로 공급받기 위해서라도 건강한 농촌이 살아남아야 한다.”

- 농촌의 가치는 무엇인가.

“전통 농촌 마을은 ‘폐기물’이 아니다. 현대문명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상상력의 원천이자 현대병을 어루만져줄 치유의 공간이다. 살아있는 농촌은 불안한 현대인에게는 필수적인 안식처다. 불안한 자본주의 경제체제 최후의 안전판이기도 하다.”

그는 논밭 3000평을 빌려 농사짓는 소작농이다. 논 일곱 마지기에, 밭 1600평이 그의 삶터다. 밭에는 녹두와 콩을 심은 평범한 농사꾼이다. 직장을 버리고 마지못해 따라 내려온 그의 아내도 이제 농사일을 거든다.

- 생계가 중요하지 않은가.

“아직은 버틸 만하다. 간신히 유지할 정도다.”

- 그래도 미래를 확신하는가.

“물론이다. 농사지으며 ‘가공사업’을 펼쳐나갈 생각이다.”

그의 아내는 머잖아 셋째 아이를 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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