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경향신문에 처음 글을 쓴다. 언제까지 계속할지 모르지만, 귀중한 지면을 헛되이 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작정이다. 독자들을 위해 칼럼 제목에 대한 설명이 약간 필요할지 모르겠다. 수하한화(樹下閑話)라는 제목을 택한 것은 별다른 이유가 없다. ‘수하’란 원래 보리수 아래, 즉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은 자리를 뜻하는 말이다. 수하석상(樹下石上)이라는 불가의 용어가 있다. 출가 수행자가 세속의 명리를 잊고 무념무상의 자리에 든다는 뜻이지만, 그것은 나 같은 속물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경계이다. 내게는 그냥 여름날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한가로운 잡담을 하듯 두서없는 얘기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을 뿐이다.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 궁리해봤지만, 요즘 내가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미 여러 곳에서 원자력 문제에 관해 많은 말을 했지만, 아직도 크게 미진한 느낌이다. 이 문제에 대한 언론의 이상할 정도의 둔감한 반응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내가 보기에 지금 한국의 언론은 공동체의 안위에 관련하여 심각한 직무유기를 행하고 있다.
우리가 원전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건강피해를 걱정해서만이 아니다. 어차피 원자력산업은 이제 존립 명분을 잃어버렸다. ‘안전신화’는 간단히 붕괴되었고, 경제성도, ‘청정에너지’ 이미지도 모두 거짓이며, 가면이라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핵폐기물을 최종적으로 처분할 합리적 방도가 없다는 원전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도 이제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원자력과 결별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아마도 아직은 대체 에너지가 없고, 또 무엇보다 풍부한 전력 없이는 문명생활이 안된다는 선입관 때문일 것이다. 하기는 지금과 같은 막대한 전력소비를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생활양식을 지속하고자 하는 한, 해결책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무진장한 자연에너지를 확보한다는 것은 지금도, 장래에도, 지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자력 의존 시스템의 폐기는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실현해야 할 과제이다. 왜냐하면 원자력체제는 현세대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미래세대의 생존·생활의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심히 어리석은, 광기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희망적인 것은 이 시스템을 포기할 것을 결정한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덴마크가 그런 나라이지만, 특히 주목할 것은 독일이다. 다른 나라들은 아예 원전을 도입하지 않았거나 도입했다 하더라도 소규모인 것에 비해 독일은 경제대국이면서 17기의 원전을 보유한 나라이다. 당연히 원자력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비중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 독일이 전면적 탈원전을 결의했다는 것은 가히 세계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문명의 방향전환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전환이 기독민주당이라는 보수파 주도의 정부에서 이루어졌다는 게 더 흥미롭다. 돋보이는 것은 지도자의 자세이다. 메르켈 총리의 원전 폐쇄 결정이 임박한 선거 때문이라는 해석도 타당하지만, 총리 자신의 개인적 자질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원래 동독 출신 물리학자인 메르켈은 후쿠시마 원전의 수소폭발 장면을 영상으로 보자마자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뜸 이해했다고 술회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바로 3개월 전에 자신이 주도해서 성사시켰던 원전확대 정책을 과감히 철회하고, 또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맞서서 2022년까지 원전을 완전히 폐기하기 위한 절차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절차도 극히 합리적이고, 민주적이었다. 총리는 ‘원자로안전위원회’와 ‘윤리위원회’가 원전의 기술적·윤리적 문제를 검토하도록 의뢰했고, 이들 위원회는 2개월간의 논의를 거쳐 원전 폐기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안전위원회는 지진, 홍수, 항공기 추락 등에 의한 예상가능한 원전사고를 면밀히 검토·평가한 반면에 윤리위원회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이후에도 원전에 집착하는 것은 윤리적 의무를 방기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부러운 것은 원자력을 기술적·산업적 문제 이외에 윤리적 문제로 파악하는 건전한 양식이다. 게다가 각 위원회에는 정치적 중립성이 철저히 보장되었다. 예를 들어 메르켈 총리는 자신의 정적(政敵)인 전 환경부 장관을 윤리위원회 의장에 임명했다. 누가 봐도 독립적인 전문가, 과학자, 철학자들로 구성된 윤리위원회는 각계 대표 30명을 초청하여 장시간 토론하면서 그것을 텔레비전으로 실황 중계도 했다. 모든 절차가 정직하게, 공개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메르켈 총리의 자세는 독일사회의 문화적 성숙과 생태적 교양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랫동안 치열하게 계속돼온 반핵운동이 없었다면 독일정부의 탈원전 결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난 6월30일 독일 하원에서 압도적 표차로 원전의 단계적 폐쇄가 가결되던 날 녹색당 원내총무는 말했다. “오늘의 역사적 결의는 30년 넘게 반핵운동에 헌신해온 시민들 덕분입니다. 특히 몇몇 시민의 이름을 국회의사록에 기재함으로써 그 공로를 영구히 기리고자 합니다.” 이날의 결의를 ‘30년 전쟁의 종언’으로 표현한 언론도 있었다.
산업대국의 탈원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결의를 통해서 독일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라는 악순환을 강요하는 미국식 문명으로부터의 탈각을 명확히 선언했다. 궁극적인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독일의 선택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었다.
※‘수하한화’는 ‘나무 아래서 나누는 한담’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 궁리해봤지만, 요즘 내가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미 여러 곳에서 원자력 문제에 관해 많은 말을 했지만, 아직도 크게 미진한 느낌이다. 이 문제에 대한 언론의 이상할 정도의 둔감한 반응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내가 보기에 지금 한국의 언론은 공동체의 안위에 관련하여 심각한 직무유기를 행하고 있다.
1986년의 체르노빌 사고 때는 민주화라는 절박한 현안에 가려져 원자력이 긴급한 문제가 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한국인들의 지리감각으로는 체르노빌은 아주 먼 곳이었다. 하지만 후쿠시마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사고 후 5개월이 되었지만, 여전히 수습 전망은 불투명하고, 방사성물질은 끝없이 방출되고 있다. 이처럼 방사능 누출이 기약 없이 계속된다면 후쿠시마 인접지역은 물론 일본 전토를 포함하여 한반도와 인근 해역도 무사하지 못할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런데도 사고 직후 잠깐 부산스러웠을 뿐, 어느새 후쿠시마 사태는 언론의 시야를 벗어나 버린 것 같다.
우리가 원전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건강피해를 걱정해서만이 아니다. 어차피 원자력산업은 이제 존립 명분을 잃어버렸다. ‘안전신화’는 간단히 붕괴되었고, 경제성도, ‘청정에너지’ 이미지도 모두 거짓이며, 가면이라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핵폐기물을 최종적으로 처분할 합리적 방도가 없다는 원전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도 이제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원자력과 결별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아마도 아직은 대체 에너지가 없고, 또 무엇보다 풍부한 전력 없이는 문명생활이 안된다는 선입관 때문일 것이다. 하기는 지금과 같은 막대한 전력소비를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생활양식을 지속하고자 하는 한, 해결책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무진장한 자연에너지를 확보한다는 것은 지금도, 장래에도, 지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자력 의존 시스템의 폐기는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실현해야 할 과제이다. 왜냐하면 원자력체제는 현세대의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미래세대의 생존·생활의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심히 어리석은, 광기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희망적인 것은 이 시스템을 포기할 것을 결정한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다.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덴마크가 그런 나라이지만, 특히 주목할 것은 독일이다. 다른 나라들은 아예 원전을 도입하지 않았거나 도입했다 하더라도 소규모인 것에 비해 독일은 경제대국이면서 17기의 원전을 보유한 나라이다. 당연히 원자력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비중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 독일이 전면적 탈원전을 결의했다는 것은 가히 세계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문명의 방향전환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전환이 기독민주당이라는 보수파 주도의 정부에서 이루어졌다는 게 더 흥미롭다. 돋보이는 것은 지도자의 자세이다. 메르켈 총리의 원전 폐쇄 결정이 임박한 선거 때문이라는 해석도 타당하지만, 총리 자신의 개인적 자질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원래 동독 출신 물리학자인 메르켈은 후쿠시마 원전의 수소폭발 장면을 영상으로 보자마자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뜸 이해했다고 술회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바로 3개월 전에 자신이 주도해서 성사시켰던 원전확대 정책을 과감히 철회하고, 또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맞서서 2022년까지 원전을 완전히 폐기하기 위한 절차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절차도 극히 합리적이고, 민주적이었다. 총리는 ‘원자로안전위원회’와 ‘윤리위원회’가 원전의 기술적·윤리적 문제를 검토하도록 의뢰했고, 이들 위원회는 2개월간의 논의를 거쳐 원전 폐기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안전위원회는 지진, 홍수, 항공기 추락 등에 의한 예상가능한 원전사고를 면밀히 검토·평가한 반면에 윤리위원회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이후에도 원전에 집착하는 것은 윤리적 의무를 방기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부러운 것은 원자력을 기술적·산업적 문제 이외에 윤리적 문제로 파악하는 건전한 양식이다. 게다가 각 위원회에는 정치적 중립성이 철저히 보장되었다. 예를 들어 메르켈 총리는 자신의 정적(政敵)인 전 환경부 장관을 윤리위원회 의장에 임명했다. 누가 봐도 독립적인 전문가, 과학자, 철학자들로 구성된 윤리위원회는 각계 대표 30명을 초청하여 장시간 토론하면서 그것을 텔레비전으로 실황 중계도 했다. 모든 절차가 정직하게, 공개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메르켈 총리의 자세는 독일사회의 문화적 성숙과 생태적 교양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랫동안 치열하게 계속돼온 반핵운동이 없었다면 독일정부의 탈원전 결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난 6월30일 독일 하원에서 압도적 표차로 원전의 단계적 폐쇄가 가결되던 날 녹색당 원내총무는 말했다. “오늘의 역사적 결의는 30년 넘게 반핵운동에 헌신해온 시민들 덕분입니다. 특히 몇몇 시민의 이름을 국회의사록에 기재함으로써 그 공로를 영구히 기리고자 합니다.” 이날의 결의를 ‘30년 전쟁의 종언’으로 표현한 언론도 있었다.
산업대국의 탈원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결의를 통해서 독일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라는 악순환을 강요하는 미국식 문명으로부터의 탈각을 명확히 선언했다. 궁극적인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독일의 선택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인간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었다.
※‘수하한화’는 ‘나무 아래서 나누는 한담’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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