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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김석종/고영재

[김종철의 수하한화]제비뽑기, 민주주의의 활로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일은 매우 유감스럽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허다한 문제가 있지만 아이들이 ‘교육지옥’에 갇혀 불행한 성장기·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게 한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리 만무하지만, 어쨌든 이 절망적인 교육현실을 조금이라도 타개할 것으로 믿고 곽 교육감을 지지해온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가 씌워졌고, 그것도 교육자로서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돈’ 문제로 걸려들었다. 곽 교육감이 자기방어에 성공할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이미 그는 치명타를 입었고, 따라서 계속적인 직무수행이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언론 보도에 드러난 것만이라도 편견 없이 읽어보면 곽 교육감이 말하는 ‘선의’가 거짓말이 아닌 것을 느낄 수 있다. 내 느낌으로는 양심적인 법학자·인권활동가로서 그가 일관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내가 곽 교육감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선거 막판에 후보 단일화가 승리의 절대적인 조건이라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양보를 얻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했을까. 물론 온갖 설득 노력을 다하겠지만, 이미 거액을 선거판에 투입한 상대방이 돈을 요구하거나 당선 뒤에 요직을 줄 것을 약속하라고 한다면? 아마 틀림없이 나는 그런 요구를 끝내 물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곽 교육감은 나보다 더 윤리적인 인간임이 확실하다. 선거가 끝난 뒤에야 양쪽 참모들 사이에 돈을 주고받기로 밀약이 돼 있었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곽 교육감 측의 설명은 사실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 같은 인간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가정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게 사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곽 교육감은 평균적 인간보다는 더 윤리적인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윤리적 인간도 오늘날 우리의 정치환경에서는 언제든 치욕적인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이 문제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근본적인 결함을 가진 정치 시스템의 문제이다. 흔히 제도보다도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일리가 없지 않지만, 적어도 정치에 관한 한, 본질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은 제도임이 분명하다. 일찍이 철학자 칸트는 “오직 좋은 정치체제를 통해서만 사람들이 높은 수준의 도덕적 문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고, 루소 역시 “덕성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제도가 덕성을 기른다”고 말한 바 있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과오나 책임을 따지기 이전에, 사람이 특별히 노력을 하지 않아도 비교적 쉽게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안철수 현상’만 하더라도 그렇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실력 있고 깨끗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대중들에게 꽤 널리 알려져 온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치와는 아무 관계없이 살아온 이가 느닷없이 서울시장 선거에 나설 것을 고려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은 이 열광적 반응이 기성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누적된 환멸에 기인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것이 옳은 진단이라고 해도 ‘썩은’ 한국의 정치가 과연 ‘출중한’ 개인의 힘으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인가. 인물이 없어서 지금 이 나라의 정치가 엉터리라고 보는 것은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매우 위험한 논리이다. 따져보면, 지금 이 나라의 정치인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자질이 우수한 사람이 적지 않다. 안철수 현상으로 아마 그들 중 상당수는 자존심이 크게 상했을 것이다.

개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정치 시스템이 근본문제라는 것은 후쿠시마 사태를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원자력발전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결함투성이인 위험천만한 기술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 세상에서 조만간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도 하필이면 지진 국가가 원전을 54기나 건설·가동해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다. 온전한 정신상태, 최소한의 이성적 판단력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일본의 정책결정자들은 그것을 용인했고, 심지어 후쿠시마 사태가 진행 중인 상황인데도, 지금 일본 정치가들 상당수는 여전히 원전을 지지하고 있다. 이런 근본적인 몰상식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정경유착에 있다. 이 정경유착은 오늘날 일본과 한국,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민주주의가 패퇴하고, 합리적인 정치적 결정을 불가능하게 하는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정경유착은 선거에 의한 대의제 정치제도가 계속되는 한, 절대로 해소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선거나 선거에 기반을 둔 정치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돈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민주주의를 표방하더라도 선거에 의한 대의제 시스템은 금권정치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지금 정부와 국회가 다수 민중의 진실한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4대강 공사와 같은 국토유린행위를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마구 밀어붙일 수 있는 근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으로 갈수록 세계는 위기상황에 빠져들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가 계속 이처럼 자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구조를 탈각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활로가 없는 게 아니다. 정말 합리적인 정치체제를 위한 훌륭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제비뽑기에 의해 인민의 대표를 뽑는 방법이다. 제비뽑기는 정경유착을 끊어내고, 인민의 대표들이 사심 없이 토의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거의 유일한 합리적 방법이다. 이것은 아테네 민주주의를 300년 동안 지켜냈던 방법이고,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흥륭을 뒷받침했던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부분적이지만 다양한 형태로 여러 나라의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방법이다. 나는 제비뽑기와 선거와 임명제를 적절히 혼합함으로써 참다운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활로가 열릴 것이라고 믿는 사람의 하나이다. 독자들에게 <추첨 민주주의>라는 책을 숙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수하한화’는 나무 아래서 나누는 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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