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종 선임기자
그런데도 신새벽 여명에 거짓말처럼 잠이 깼다. 이미 가부좌 틀고 명상을 끝낸 집주인은 능숙한 손길로 또록또록 차를 따랐다. 지리산 석간수로 우려낸 은은한 차향이 산방 가득 번졌다. 숙취는커녕, 깨끗한 산 공기와 싱그럽고 그윽한 차향에 정신이 명경처럼 맑았다. 새파란 계곡수에 눈을 씻고 보니 층암절벽 기암괴석 너머로 아득한 지리능선이 끝간 데 없다.
집주인 문상희(54)는 약초꾼이면서 다인(茶人)이다. 지리산 능선과 계곡을 그저 뒷동산 마실가듯 오르내리며 약초를 캔다. 심산에 자생하는 약초와 나무의 새순들로 특별한 차(茶)를 만든다. 붓글씨를 쓰고, 서각까지 한다. 스스로는 지리산이 품어 키운 산나물을 거둘 뿐인 ‘산농사꾼’이라고 한다.
그는 지리산 마지막 산간마을 ‘두지터’에서 20년째 홀로 산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칠선계곡 초입, 해발 600m의 아늑한 분지다. 마을까지는 차가 들어가지 못한다. 옛날처럼 첩첩산중 오지마을은 아니지만 수줍은 산촌 정서와 풍경은 꽤 남아있다. 계곡은 폭포와 담소(潭沼)들이 20리나 이어진다. 현란한 물소리와 아름드리 빽빽한 원시림을 따라가면 지리영봉 천왕봉에 닿는다.
들어보면 참 산전수전 다 겪은 이력이다. 일찌감치 가출과 폭력에 물들었다. 군 제대 후에는 고향 진주에서 전자오락 도박장 ‘바다이야기’를 운영했다. ‘주먹’들과 형님, 아우로 지내다가 결국 칼침을 맞았고,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 사내가 어느 날 차 만드는 길로 들어섰다. 어릴 때 지리산을 오가며 찻잎을 따고, 덖고, 비비는 법을 배운 덕분이다. 구례 화개골 쌍계사 뒤편에 ‘다우당(茶雨堂)’ 간판을 걸고 차와 다구(茶具)를 만들었다.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차주걱과 다포(차 찌꺼기를 거르는 체)는 그가 처음으로 개발했다. 제자들이 하나 둘씩 독립해 나가면서 경쟁을 하게 됐다. 중국차도 쏟아져 들어왔다. 환멸을 느끼고 홀연히 화개골을 떠났다.
3년 동안 지리산 동서남북, 골골샅샅을 헤매고 다니다가 ‘입산’한 곳이 두지터다. 신라에 패한 가락국의 마지막 왕이 숨어서 신라군에 항전할 때 군량미를 감춰둔 곳이어서 ‘두지(뒤주의 경상도 사투리)터’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에는 지리산 빨치산인 남부군 간이사령부가 있었다. 토벌이 끝난 뒤 지리산 화전민을 집단 이주시키면서 지금의 마을이 됐다.
과거 두지터 사람들은 담배, 호두 농사와 함께 약초, 산나물, 토종벌로 생계를 꾸렸다. 그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마을에 쓰러져가는 빈집들이 많았다. 그는 담배 건조막을 고쳐 살았다. 이 오두막은 지금 식당 겸 창고로 쓴다. 16년 전 황토로 직접 ‘자연가(自然家)’를 지었다. 자재를 모두 지게에 져 날랐다. 건평 아홉평짜리 작은 집을 짓는 데 여섯 달이나 걸렸다. 집을 작게 지은 것도 까닭이 있다. 여기서 산짐승들을 보니 딱 저 누울 만큼만 공간을 차지하고, 저 먹을 만큼만 모으더란다.
그렇다고 문상희가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 살았던 소로의 생활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곳의 약초와 약초차가 목적이었다. 예부터 지리산 북쪽, 칠선계곡 일대에서 자란 약초는 약성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땅의 음기(陰氣)가 세고 일교차와 연중 온도차가 크기 때문이란다.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도 이곳에서 약초를 캤다고 전해진다.
그가 만드는 차의 이름은 ‘초향(草香)’이다. 구지뽕, 오가피, 벌나무, 당귀, 찔레, 산다래, 둥글레, 마가목, 으름덩굴, 오미자덩굴, 쑥, 머위, 어성초, 솔잎, 감잎, 참취, 칡 등의 새순만 100가지가 들어간다. 초봄 한 달간 딱 2000통을 만들어 스님과 다인들에게 팔고 선물도 한다.
제다(製茶) 작업이 끝나면 옛날 심마니들이 다니던 길을 따라 산을 탄다. 이제는 숲과 골짜기를 척 보기만 해도 무엇이 있는지 훤히 안다. 암에 효험이 있다는 상황버섯, 산중 진보(珍寶)인 천삼(땃두릅), 석청 같은 진귀한 약재도 숱하게 얻었다. 그는 아무리 귀한 약재라도 연(緣)이 닿는 사람이 써야 효험이 있다고 믿는다. 약재로 돈 버는 욕심은 버린 지 오래다.
십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야성 본색을 자주 드러내곤 했다. 이제는 마음의 폭풍이 잦아들고, 스스로 지리산처럼 넓고도 깊어진 것 같다. 그만큼 자유롭고, 여유롭다. 심지어 지리산 산신, 귀신과도 친하다는 그다. 그가 아주 무심하게 자연의 도리를 말했다.
산은 사람에게도, 짐승에게도, 풀 한포기에도 차별없이 무궁무진 베푼다. 산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본다. 산에서 받은 만큼 베풀면 산은 더 큰 선물을 준다. 자연은 봄에 새순을 내고 가을에는 모두 떨어뜨리지 않는가. 꽃이 아무리 화려해도 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는 사람들이 비우고, 버리고, 나누고, 줄이는 자연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훨씬 살 만할 세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점점 지리산을 닮아가는 문상희의 산농사는 올해도 대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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