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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의 길인생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19) ‘늦깎이 화백’ 한숙자 할머니

이원규 | 시인
ㆍ74세에 국자 대신 붓을 들다, 이제 그녀의 마음은 봄날이다

‘백발 인생’에 그림으로 한 획을 그었다며 환하게 웃는 한숙자 할머니. 이제야 독립된 한 인간으로 서는 것 같다며 만족하고 있다. | 이원규 시인 촬영


‘아파야 철이 든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전에는 조금 아프더라도 ‘고통은 몸의 일부’려니 생각하며 생의 한철 통증을 견디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병원 문턱에도 가보지 않은 건강한 자의 교만이었다. 그러다 문득 ‘고통이 몸의 전부’가 되고 보니 공포가 밀려오고 보이는 세상이 달라졌다. 일단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졌다. 이전에는 타락하거나 비굴해 보이던 이들마저 단지 더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존재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내 나이 스물에는 스물아홉 이후의 생이 없었고, 서른에는 또 서른아홉 이후가 없었다. 차라리 자살을 할지언정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는 오기이자 객기였다. 그러나 어느새 마흔아홉 살이 되었고, 지천명(知天命)의 문턱에서 왼쪽 폐에 구멍이 나고 늑막염으로 오른쪽 폐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다행히 암은 아니어서 등 뒤에 주사기 호스를 꽂고 700㎖ 물을 빼내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9개월 정도 꾸준히 약을 먹으면 완치될 수 있다고 하니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문득 저 바람 속에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리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려니 생각하니 많이 서운했었다. 비오면 비를 맞으며 25년간 한반도 남쪽을 100만㎞ 정도 달렸으니 여한이 없지만, 모터사이클은 ‘내 생의 유일한 낙이자 욕망’이어서 쉽게 접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새 나의 생은 ‘바이크에서 내리는 날이 저승 가는 날’로 정의되었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몸이 아프고 보니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암을 극복하거나 ‘인간승리’로 대변되는 억척스럽고도 극적인 삶도 소중하지만, 그보다는 자기 스스로 생의 전환점을 찍고 새 삶을 개척해나가는 이들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 지난해 말 전주 한옥마을로 이사한 늦깎이 ‘백발의 화가’ 한숙자 할머니(81)를 잊을 수 없었다. 마치 생의 처음인 듯 조심스럽게 모터사이클의 시동을 걸었다. 섬진강변 19번 국도를 지나 17번 국도를 타고 전주 한옥마을을 향해 달렸다.

찻집이자 팥죽집인 ‘외갓집 솜씨’에서 만난 한숙자 할머니는 여전히 ‘백발의 소녀’였다. 언제나 존댓말을 쓰는 말씨와 목소리, 흰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 또한 소녀다웠다. 1930년생인 한숙자 할머니의 머리카락은 그야말로 백발이다. 환하다. 우리 나이로 여든두 살이니 고령이기도 하지만 이미 40대 중반부터 흰머리였다고 한다. “한번은 염색을 하려다 부작용 때문에 고생을 했어요. 얼굴이 붓고 그래서 그때부터 그냥 뒀어요. 마흔여섯 무렵부터였으니 남편이 먼길 떠난 뒤부터 오늘까지 내내 백발이었네요.”

그렇다. 어쩌면 그리움은 흰색일지 모른다. 한숙자 할머니의 말처럼 남편 사후의 ‘백발’이 또 하나 ‘일생의 획’을 그은 셈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그는 1·4후퇴 때 두 동생과 잠시 인천으로 내려왔다가 북쪽의 부모형제와 헤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다행히 고향 출신 오승세씨를 만나 결혼했으며 금실 좋은 부부로 4남매를 낳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76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말았다. 그 뒤부터 4남매와 손자·손녀를 기르는 일에만 전념하며 바깥나들이 한번 제대로 못해본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그때까지는 비교적 평온했다. 그러나 또 한번 위기의 파도가 밀려왔다. 69세에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 전화위복이랄까. 그 무렵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요양을 할 때부터 서서히 또 하나의 다른 생이 다가오고 있었다. 심심할 때면 손녀가 쓰다 남긴 물감으로 혼자 뭔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지만 은근히 재미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작을 하기 시작했다. 뇌출혈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그림 그리기는 74세 때부터 본격화됐다. ‘국자 대신 붓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


딸의 응원과 역할이 컸다. 여성학자이자 명강사인 오한숙희씨(53)가 바로 그의 딸이다. 74세라면 일반인들에겐 생을 정리하는 시기가 아닌가. 그런데 한숙자 할머니는 마침내 열망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억누르고 내재화시켰던 것들을 색으로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오한숙희씨는 “그 무렵부터 부엌을 옮기고 화실을 차렸지요. 싱크대 대신 이젤이, 양념통 대신 물감이, 수저통 대신 붓통이 어머니 일상의 파트너가 됐지요. 그동안 전업주부로만 살아오던 어머님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저도 깜짝 놀랐지요. 밥과 국과 나물 대신 산과 꽃과 나무와 얼굴들이 어머니 손끝에서 태어났죠. 그림들의 색도 현란할 정도로 자유로웠고요. 그래서 나 또한 응원자가 되었지요”라며 놀라워했다.

그렇게 국자 대신 붓을 든 한숙자 할머니는 말 그대로 언제나 ‘싱크대 대신 이젤을, 양념통 대신 그림물감을, 수저통 대신 붓통을’ 옆에 두고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었던 추억과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그림으로 펼쳐내기 시작했다. 가슴 깊숙이 눌러 두었던 남편 오승세씨와 무덤을 그리기도 했다. 그것은 또 다른 해방을 의미했다. 오한숙희씨 또한 어머니의 새로운 재능을 알게 된 뒤부터 작품 활동을 전적으로 지원했고, 어머니의 전시회를 직접 기획하느라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2009년에는 생일잔치 대신 한숙자 팔순기념 그림전 ‘여든, 봄날이 왔다’, 2010년에는 첫 초대전이자 자선 전시회 ‘오늘도 봄날이다’를 열어 호평을 받기도 했다. 관람객들은 한결같이 “그림에서 어머니 품 같은 온화함과 따스함이 느껴진다. 잃어버린 고향의 냄새를 맡는 듯 그림이 참 따뜻하고 좋다”며 진심어린 찬사를 보냈다. 굳이 말하자면 전문 화가들의 그림에는 못 미치지만 ‘기교가 넘쳐나는 그림이나 전형화된 그림’이 아니라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붓끝으로 살려낸 ‘어머니의 마음’이 그림 앞에 선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던 것이다. 전시 수익금은 약속대로 모두 사회운동단체에 기부했다.

“아이고, 저는 아직 그림을 잘 몰라요. 다만 좋아서 그릴 뿐이에요. 늙은이가 장난 논 걸 잘 봐주니 고맙지요. 아직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참 좋아요. 나도 남들처럼 베풀고 싶었지만 가진 게 없어 늘 마음뿐이었지요. 그런데 그림을 그리다보니 그것 참, 그림도 나눔이 될 수 있더라고요. 밤잠을 줄이고 작품에 매달리는 일이 나눔과 소통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대견할 뿐입니다. 가난한 단체들의 ‘후원의 밤’에 돈은 못주더라도 나의 못난 그림 한 점을 갖다 주어도 많이 좋아하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한숙자 할머니는 지난해 전시회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탄선언’을 했다.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74세의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도 만만치 않은데 81세의 나이에 주거생활의 독립을 선언해 ‘쟁취’했다. 그리하여 마음에 두었던 전주 한옥마을 근처의 원룸 하나를 얻어 독립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스스로 끼니를 챙겨먹으며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길, 외로운 화가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한옥마을이 참 좋아요. 주말 말고는 조용하고, 산책하기에도 좋고요. 이따금 손자·손녀들이 보고 싶고 외롭기는 하지만 내 곁에는 언제나 그릴 게 있으니 좋아요. 어떨 때는 그림에 빠져 끼니를 거르기도 하지요. 지난번 전시회 마치고 생각하니 열 달 동안 죽어라 그렸더라고요. 아기가 태어나는 세월이잖아요. 처음에는 그림들이 나의 아기 같았지만, 다 그려진 그림들을 쭉 훑어보니 새로 태어난 아기는 바로 나였어요. 날이 가면 갈수록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저기 흙담을 보세요. 새 봄빛이 너무 좋잖아요. 기침이 심하네요. 이 선생도 건강관리 잘 하세요.”

그는 올해 세 번째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전주에 와서 ‘경기전’ 등 다섯 점을 그려 작품이 11점 정도 되지만 아직은 더 그려야 하는데 너무 추워서 제대로 못 그렸다”며 새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 중 백발의 화가는 언제나 존댓말을 쓰며 낮은 목소리로 “그렇죠?” “어머, 맞아요” 등 긍정적인 어투를 썼다. 세상의 험한 말들이 ‘백발 소녀’의 수줍고도 부드러운 말투로 순화되고, 세상의 어두운 빛들이 ‘늦깎이 청춘 화백’의 그림 속에서 환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나의 구멍난 폐 속 깊숙이 봄바람이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