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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에 대하여

[박영택의 전시장 가는 길]장욱진의 자화상

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한국전쟁기에 자신의 고향으로 피란을 가서 그린 장욱진(張旭鎭, 1918~90)의 자화상이다. 너무도 열악했던 피란시절에 그린 그림임에도 포연과 피비린내와 가난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지옥 같은 현실과 무관하게 고고하고 이상적인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선명하게 표출되어 있다. 누렇게 익은 논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좁은 길 위에 연미복을 입고 우산을 든 영국형 신사와 같은 작가의 모습은 좀 이질적이다. 개 한 마리가 뒤를 따르고 하늘에는 새가 날아갈 뿐이다. 땅에는 벼가 가득하다. 자연은 여전히 풍성하고 싱싱하다.

자화상(갤러리현대, 1·14~2·27)

그는 그렇게 자연에 난 길만을 따르고자 한다. 인간의 길이 아니라 자연의 도리를 뒤따른다. 그 길 위에서 그는 신사처럼, 선비처럼 살아갈 것을 결심한다. 한국 전쟁 당시의 충격과 상처를 안고 살았던 그였지만 그는 예술로 그 상처를 치유하고자 한다. 고향에 피란해 있을 때 겪었던 작가의 심리적 상황이 표출된 이 자화상에는 자신이 맞닥뜨린 이상과 현실의 격차가 빚어내는 괴리감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전쟁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상처를 준다. 외부로부터 한계량을 넘는 자극이 쇄도하여 자아의 방어막을 파열시킬 때 빚어지는 증상을 트라우마라고 한다. 현실과의 원활한 관계를 거부하는 트라우마는 어떠한 공간이나 시간의 질서에도 쉽사리 편입되지 않으며, 오로지 공허 속에 머물고자 한다. 장욱진의 이 자화상은 어쩌면 그토록 끔찍한 전쟁기를 외면하고, 고독하고 자폐적인 자기 길로 침잠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상이다. 그것은 자신이 간직한 트라우마에 대한 역설적인 드러냄이다. 장욱진의 그림들 중에서 유독 이 그림이 인상적인 이유는 당시의 상처와 그로 인한 신념이 평생 그의 삶을 지배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