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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에 대하여

[낮은 목소리로]농촌 토박이와 젊은 귀농자

강광석 | 전농 강진군 정책실장
강진의 한 마을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20호 조금 넘는 마을에서 이장선거가 치러졌습니다. 경선이었습니다. 개혁적인 젊은 후보는 그 마을 출신이 아니고, 연륜과 안정감 있는 환갑이 넘은 후보는 그 마을 출신입니다. 아직도 농촌마을에는 전통적으로 형성된 씨족사회의 모습이 남아있고 대소사를 집안 차원에서 함께 책임집니다. 집안사람이 아니더라도 한 공동체에서 70~80년을 같이 살아온 사람들은 나름의 연대의식으로 뭉쳐 있습니다. 그런데 산업화 시기 이농과 2000년대 이후 귀농이 늘고 마을 간 인구이동이 잦아지면서 본토박이가 갈수록 줄고 이른바 ‘굴러온 돌’들이 많아지면서 마을에 세력관계가 형성됩니다. 본토박이 입장에서 보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자신들이 그동안 세월의 힘으로 이룩한 관행과 합리적 질서를 파괴하는 게 마땅할 리 없고, 새로 이주한 정착민들의 입장에선 낡은 타성과 불합리한 관행으로 자신들을 배척하는 게 좋을 리 없겠죠 특히 이장 선출과정에서 그 갈등이 최고조에 이릅니다.

이장 선출과정 미묘한 세력 싸움

마을 대표를 선출할 때, 마을에 주소를 둔 성인에게는 나이와 성별을 떠나 다 투표 권한이 있어야죠. 그런데 남자만 나와서 결정합니다. 남자가 없어야 여자가 나옵니다. 이것이 문서로 명문화된 마을도 있고 원래 그렇게 한, 말하자면 관습법인 경우도 있습니다. 마을의 좌장격인 최고 연령 어르신 서너명이 그냥 마을 대표자를 지명하는 곳도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마을의 관행이 따라가지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이장을 할 수 없다, 땅을 일정 정도 개인 명의로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 이장을 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기도 합니다. 젊고 개혁적인 후보는 그 마을에 본인 명의의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후보자 자격이 없다는 동네 관습법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들고 연륜이 있는 후보는 근본도 알 수 없는 바깥세력에게 이장까지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후보 간 통합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 마을 역사상 최초로 경선을 하게 됐고, 젊은 후보가 두 표 차로 승리했습니다. 일단 기득권 세력에게 불만이 있는 기본 조직표를 단단하게 묶고 마을 토박이 표 중 일부를 설득해 승리한 것입니다.

강진은 전국적으로 귀농자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귀농자 지원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강진의 경우 귀농자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인생 휴가형입니다. 정년을 마치고 도시 소음과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뒤로한 채 동네 어귀 한편에 흙집을 집고 여생을 조용하게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부부가 오는 경우가 많고 대개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이고 차도 좋은 차를 몰고 다닙니다. 80세가 넘어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보기에 참으로 신간 편한, 부러운 사람들입니다.

서로 의지해야 행복할 수 있어

둘째는 가치형입니다. 글쓰고 난 키우고 농산물을 길러 자급자족합니다. 유기농업으로 기른 감자와 나물을 지인들에게 나누어주며 돈을 주면 받고 안주면 말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산책하는 모습을 자주 보고 흔히 개량한복을 입으며 동네사람들에게 인사도 잘합니다. 동네사람들이 보기에 저렇게 살아서 아이들 교육이나 제대로 시킬까 걱정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생계형입니다. 젊은 나이에 해고당해 자영업을 했으나 신통치 않고 더 이상 도시에서 경제적으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없을 때 농촌에서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살아보고자 내려오는 사람들입니다. 대가족이 함께 오는 경우가 많고 이사온 첫날부터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일을 합니다. 트럭을 몰고 다니며 관에서 실시하는 선진농업교육에도 빠짐없이 참여합니다. 동네사람들이 보기에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안쓰럽고, 저렇게 몇 년 살다가 빚만 지고 떠난 사람을 본 터라 쉽게 정을 주기도 어렵습니다.

우리 마을에 젊은 귀농자 한 사람이 동네잔치를 벌였습니다. 어르신들에게 점심 한끼 내는 것인데 훈훈한 자리였습니다. 일부 아주머니들은 젊은 사람이 운영하는 꽃밭 하우스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터라 서먹서먹하지 않았고 그의 겸손하면서도 강단있는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어르신들이 많았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빨리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건 사람들이 서로 의지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평생을 흑인 인권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남아공 투투 대주교는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얽힌 관계는 풀고 없는 관계는 만드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