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강릉시의 헌화로에서 시작한 아름다운 한국 '길숲섬'이 67회를 맞이했다. 그간 대한민국의 최북단 민통선에서부터 최남단의 섬마을까지 구석구석을 살피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돌고 돌아 살펴보니 서울만큼 역사와 문화가 다양한 곳도 없다.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이 조성되고 청계천 따라 걷기행사가 열리는 대도시 서울. 근현대를 거치며 수십 배로 몸집이 커진 서울. 과거 조선시대 도성의 중심을 따라 흐르던 청계천을 조명해 보자.
지금으로부터 약 1천 년 전인 1096년 고려시대에는 지금의 서울 땅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남경천도가 있었다. 풍수도참설에 의한 시도였다. 실제로 수도가 이전 된 것은 이로부터 300년이 지난 1394년 조선왕조에서 이뤄졌다. 당시 서울은 북악산, 인왕산, 남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는 분지였다. 수도 서울의 가운데를 지나는 물길이 바로 청계천이다. 봄, 가을에는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냈고 여름에 큰 비가 내리면 범람하는 하천이었다. 제대로 된 치수시설이 없던 시절 청계천이 범람해 인근 행랑과 민가에 피해를 입히기 일쑤였다.
태종의 하천정비 '개천(開渠)'
1890년 청계천 모습. 왼쪽 멀리 수표교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천을 따라 난 길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406년 태종은 청계천 정비를 시작했다. 자연 상태 하천의 바닥을 쳐내고 넓혔다. 그리고 양쪽 기슭에 둑을 쌓았다. 1411년에는 하천정비기구 '개천도감'을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공사에 나섰다. 1412년에는 무려 5만2,800명의 인부를 동원해 정비를 했고 이때 건축된 다리가 최근 청계천 복원공사로 모습을 드러낸 광통교, 혜정교 같은 돌다리다. 또한 1441년인 세종 23년에는 마전교 서쪽 수중에 수표를 만들어 눈금을 새겼다.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다. 당시의 공사로 인해 청계천의 본래이름인 '개천'이 생겨났다. 지금의 명칭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청계천에 공을 들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는 풍수지리상으로 서울을 가로지르는 하천인 청계천을 명당수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당시 서울의 남쪽을 흐르던 외수(外水) 한강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렀다. 이에 반해 도성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이곳을 가꾸고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또 다른 주장은 하수도로써의 청계천이었다. 하수설비가 없던 당시에는 청계천이 각종 오수와 쓰레기가 흘러가는 하천이었다. 결국 세종은 청계천을 생활하천으로 규정하면서 수 백 년 간 서울의 궂은일을 맡은 하천이 됐다.
서울 가로 지르는 10.84km의 물길
2003년 6월 30일 새벽4시. 철거를 하루 앞둔 청계고가 모습이다. (김정근기자)
1900년대 초반의 자료사진을 보면 청계천의 둑을 따라 집들이 늘어서 있다. 구불구불한 물길 옆으로 사람들이 오간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대대적인 하천 정비작업을 했고 1958년에 들어서는 대대적인 복개공사에 착수했다. 1960년 4월 1단계 공사가 완공됐다. 너비 50m의 간선도로도 착공돼 청계천은 지하에 하천을 덮어둔 채 도로로 모습이 변했다. 이어서 1967년에는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됐다. 상류인 종로구에서 성동구 사근동까지 5.4km 구간이 고가도로로 건설됐다. 서울의 동쪽에서 도심까지 고가도로를 통해 막힘없이 달릴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복개된 지 47년 만에 청계천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시가 시행한 복원사업으로 지하에 갇혀있던 모습들이 공개됐다. 한편으로는 자연모습의 하천이 아닌 인공적으로 물길을 만들었다는 여론도 계속됐다.
문화와 유적, 근현대 역사가 곳곳에
6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함께한 청계천은 문화유산도 다양하다. 1760년 영조 임금의 준천당시에는 청계천에 모전교, 광통교, 장통교, 수표교, 하량교, 효경교, 마전교, 오간수문, 영도교 등 9개의 다리가 있었다. 현재의 중구 서린동 부근에 있는 모전교는 당시 과일 파는 가게들이 많았던 지역의 특징을 이름으로 붙인 것이다. 또한 도성 중심을 통하던 장통교는 현재의 장교동 한화빌딩 자리에 있다. 특히 이곳은 청계천의 본류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청계천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 가운데 하나인 수표교는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세종 때 만들어져 수위를 측정하는 수표석이 있어서 마전교로 불리던 이름을 수표교로 바꿔 부르게 됐다.
한편 근현대사에서 청계천은 격동의 땅이었다. 1969년에는 주택 150채가 소실되는 숭인동 판자촌 화재사건이 있었다. 또한 청계천 주변에는 시장을 중심으로 한 의류공장이 늘어서 70년대 상공업 시대의 주축이 되는 지역이었다. 1987년에는 청계천이 광장의 역할을 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청계천 인근 건물에서 대통령 선거유세를 하기도 했고 대규모 집회가 이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역사를 지닌 청계천은 오늘도 변함없이 서울의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다.
서울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4번 출구나 5호선 광화문역 5번 출구에서 나와 청계광장 쪽으로 오면 청계천 산책로가 시작된다. 복원된 청계천 길은 5.84km이기 때문에 산책로 중간에 나 있는 30여 개의 진입로를 통해 접근할 수도 있다. 을지로입구역, 을지로 3ㆍ4가역, 종각역, 종로 3ㆍ5가역, 동대문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신설동역 등이 청계천 산책로 인근에 있다. 차를 몰고 올 경우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이나 청계천 인근 공영주차장에 유료로 주차할 수 있다. 하지만 주말에는 청계천로가 ‘차 없는 거리’로 운영되기 때문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구간별 자세한 정보는 청계천 홈페이지 http://www.cheonggyecheon.or.kr/를 통해 얻을 수 있다.
47년 만에 다시 만난 청계천 1958년 대대적인 청계천 복개공사가 착수된 지 47년 만에 청계천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개통일인 2005년 10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약3개월 간 청계천을 찾은 방문객은 1천100만 명이 넘었다. 청계천은 이제 서울도심의 대표적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김정근기자)
1930년대 청계천 1930년대 수표교 인근 청계천모습이다. 장마 때면 어김없이 범람하다가도 가물 때면 사진처럼 바닥을 드러내곤 했다. 청계천에서 가장 유명한 다리 가운데 하나인 수표교는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져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청계천 복개공사 준공식 청계천은 1958년부터 구간별로 복개공사가 이뤄졌다. 사진은 1961년 1단계 공사가 완공된 이후 촬영한 것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철거되는 청계천 판자집들 청계천 6가에서부터 동대문운동장 쪽으로 600m에 걸친 청계천 연변은 원래 서울의 이름 높은 무허가 판자촌이었다. 청계천 복개공사로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 평화시장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숭인동 판자촌 화재 1969년 3월 18일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판자촌 화재로 약 150채의 판잣집이 불탔다. 사진 속 이재민들이 청계천을 건너 살림살이를 나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청계천 고가도로 청계천이 복개되고 난 뒤 광교에서부터 마장동에 이르는 총 길이 5.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가 1967년 8월 15일 착공, 1971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격동의 현장 근현대사에서 청계천은 격동의 땅이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청계천 인근 건물에서 대통령 선거유세를 하기도 했고 대규모 집회가 이어지기도 했다. 사진은 1987년 11월 13일 청계6가에서 유세하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후보시절 모습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청계천 복원 공사 2003년 7월 ~ 2005년 9월까지 청계천을 복원하는 공사가 이뤄졌다. 청계천로(태평로 시점 ~ 동대문 ~ 신답철교) 및 삼일로와 그 주변 5.84km에 걸쳐 물길이 새로 생겼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청계천 전경 청계천 복원 1주년을 맞아 찍은 청계천 전경. 사진은 청계9가 벽산아파트 옥상에서 내려다본 모습이다. (정지윤기자)
어린이가 뛰노는 청계천 청계천은 구간별로 볼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야간조명과 여름철 분수는 장관을 연출한다. 사진은 한여름 어린이들이 청계천 분수에서 뛰노는 모습. (서성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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