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ㅣ경향신문
ㆍ내달 3일 개봉
앨프리드 히치콕이 살아서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이 동조한 이라크전을 봤다면 이런 영화를 만들려 하지 않았을까.
9·11 테러의 희생자를 애도하거나 잘못된 이라크전을 비판하는 영화들도 나올 만큼 나왔으니, 당시 전쟁을 주도한 정치인들의 뇌구조를 음모론적으로 살펴볼 차례가 된 듯하다. <유령작가(원제 The Ghost Writer)>는 히치콕 풍의 근사한 ‘포스트 이라크전’ 스릴러다.
영화 끝까지 본명이 밝혀지지 않는 유령작가(이완 맥그리거), 즉 대필작가는 전 영국 총리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회고록 집필을 맡는다. 랭의 측근이자 회고록 초고를 썼던 전임자는 익사체로 발견된 상태다. 유령작가는 석연치 않은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임기중 테러리스트들을 불법으로 구금한 뒤 미국에 인도했다는 혐의를 받은 랭은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사를 받기 시작한다. 랭을 ‘전범’이라고 비난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유령작가는 랭과 그의 부인, 랭의 정치적 반대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그리고 랭의 행적 뒤에 숨은 거대한 음모의 단서를 줍는다.
원작 소설가 로버트 해리스는 <유령작가>가 15년 전에 구상됐으므로 현재의 정치상황과 무관하다고 밝혔지만, 미국의 잘못된 전쟁에 동조한 혐의로 곤경에 처한 영국 총리의 모습에서 토니 블레어를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영화 속에서도 랭은 북한·이라크·중국 등과 함께 국제형사재판소를 인정하지 않는 소수의 나라 중 하나인 미국의 옛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랭이 도움을 청하며 악수하는 미국의 여성 관료는 꼭 콘돌리자 라이스를 닮았다. 실제 조지 W 부시, 토니 블레어를 전범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지 않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감독 켄 로치도 최근 칸국제영화제에서 같은 주장을 펼쳤다.
랭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적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그 잘난 인권 따위”는 필요없다고 믿는 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자주 들리는 주장이다. 이 주장이 순수한 신념에서 나왔다면 차라리 나으련만, 영화 속에선 불순한 음모와 연계돼 있다. 물론 이 음모에 접근하는 것이 주인공인 유령작가의 임무다. 음모의 전모를 밝히는 일이 우리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기에, 영화 속에서도 무명의 ‘유령’으로 처리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서두르지 않는다. 한 컷, 한 장면에서 배우들이 연기할 시간, 관객들이 시각 정보를 얻어갈 시간을 충분히 준다. 요즘 기준으로는 느려빠진 편집 스타일인데, 줄거리를 긴박하게 따라가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고전적인 명장의 손길이다.
폴란스키는 스위스의 별장에 연금된 채 전화로 <유령작가>의 최종 편집을 지휘했다. 그는 1977년 미국에서 미성년자 모델을 성폭행한 혐의로 조사받던 중 유럽으로 도피했고, 프랑스를 거점으로 활동하다가 2009년 스위스 취리히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입국하던 중 체포됐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잃었고, 만삭의 아내를 악명 높은 살인광 찰스 맨슨 일당에게 잃은 그다. <악마의 씨> <차이나타운> <피아니스트> 등으로 명성을 얻은 그의 삶은 영화보다 더 파란만장하다. 폴란스키는 <유령작가>로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감독상을 받았으나 영화제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유령작가>는 6월3일 개봉한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앨프리드 히치콕이 살아서 미국이 주도하고 영국이 동조한 이라크전을 봤다면 이런 영화를 만들려 하지 않았을까.
9·11 테러의 희생자를 애도하거나 잘못된 이라크전을 비판하는 영화들도 나올 만큼 나왔으니, 당시 전쟁을 주도한 정치인들의 뇌구조를 음모론적으로 살펴볼 차례가 된 듯하다. <유령작가(원제 The Ghost Writer)>는 히치콕 풍의 근사한 ‘포스트 이라크전’ 스릴러다.
영화 끝까지 본명이 밝혀지지 않는 유령작가(이완 맥그리거), 즉 대필작가는 전 영국 총리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회고록 집필을 맡는다. 랭의 측근이자 회고록 초고를 썼던 전임자는 익사체로 발견된 상태다. 유령작가는 석연치 않은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임기중 테러리스트들을 불법으로 구금한 뒤 미국에 인도했다는 혐의를 받은 랭은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사를 받기 시작한다. 랭을 ‘전범’이라고 비난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유령작가는 랭과 그의 부인, 랭의 정치적 반대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그리고 랭의 행적 뒤에 숨은 거대한 음모의 단서를 줍는다.
원작 소설가 로버트 해리스는 <유령작가>가 15년 전에 구상됐으므로 현재의 정치상황과 무관하다고 밝혔지만, 미국의 잘못된 전쟁에 동조한 혐의로 곤경에 처한 영국 총리의 모습에서 토니 블레어를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영화 속에서도 랭은 북한·이라크·중국 등과 함께 국제형사재판소를 인정하지 않는 소수의 나라 중 하나인 미국의 옛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랭이 도움을 청하며 악수하는 미국의 여성 관료는 꼭 콘돌리자 라이스를 닮았다. 실제 조지 W 부시, 토니 블레어를 전범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지 않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감독 켄 로치도 최근 칸국제영화제에서 같은 주장을 펼쳤다.
랭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적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그 잘난 인권 따위”는 필요없다고 믿는 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자주 들리는 주장이다. 이 주장이 순수한 신념에서 나왔다면 차라리 나으련만, 영화 속에선 불순한 음모와 연계돼 있다. 물론 이 음모에 접근하는 것이 주인공인 유령작가의 임무다. 음모의 전모를 밝히는 일이 우리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기에, 영화 속에서도 무명의 ‘유령’으로 처리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다가 알면 알수록 위험해지는 남자’는 히치콕 영화의 주요 테마였다. 그 옆에는 남자를 위험한 게임으로 인도하는 팜므 파탈이 있다. <유령작가>도 마찬가지다. 맥그리거는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가, 쓸데없는 호기심에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리는 유령작가 역을 능숙하게 소화했다. 오랜만에 적역을 맡은 느낌이다. 피어스 브로스넌은 ‘007 제임스 본드’ 말고도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음을 다시 증명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서두르지 않는다. 한 컷, 한 장면에서 배우들이 연기할 시간, 관객들이 시각 정보를 얻어갈 시간을 충분히 준다. 요즘 기준으로는 느려빠진 편집 스타일인데, 줄거리를 긴박하게 따라가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고전적인 명장의 손길이다.
폴란스키는 스위스의 별장에 연금된 채 전화로 <유령작가>의 최종 편집을 지휘했다. 그는 1977년 미국에서 미성년자 모델을 성폭행한 혐의로 조사받던 중 유럽으로 도피했고, 프랑스를 거점으로 활동하다가 2009년 스위스 취리히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입국하던 중 체포됐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잃었고, 만삭의 아내를 악명 높은 살인광 찰스 맨슨 일당에게 잃은 그다. <악마의 씨> <차이나타운> <피아니스트> 등으로 명성을 얻은 그의 삶은 영화보다 더 파란만장하다. 폴란스키는 <유령작가>로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감독상을 받았으나 영화제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유령작가>는 6월3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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