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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의 음악편지

[이종민의 음악편지] “그렇게 살고 싶다”

이종민|전북대 교수·영문학

ㆍ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

또 귀한 시집 하나 얻었습니다. “한국 현대시의 정점, 그 도저한 시의 매혹!” <한국대표시인 시선> 그 첫번째 시집 <삶을 살아낸다는 건>이 시인의 친필 사인과 함께 배달된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운 마음에 선뜻 인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그냥 ‘고맙습니다!’ 하기는 그렇고 뭔가 울림이 있는 한마디를 덧붙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큰스님 앞 동자승이 되어 전화기만 되작거립니다.



30년 넘어 모셔온 스승이지만 언제나 그랬습니다. 전주 나들이를 좋아하셔서 매년 한 차례 이상 뵙는데도 부부가 쌍으로 주눅이 들어 안도현 시인의 부조만 애타게 기다립니다. 술의 도움이 있으면 나아지려나, 밤 되기를 기다려보지만 시면 시, 음악이면 음악, 루벤스에서 피카소로 넘나드는 그림에 관한 고담(高談), 심지어 일상이나 자연에 대한 꼼꼼한 관찰의 준론(峻論)에 이르기까지, 만나뵐 때마다 확인하는 내공에 술잔만 홀짝이게 됩니다.

그래도 행복합니다. 가슴 멍한 긴장이 오히려 뿌듯합니다. 그 부담 덕에 자기발전을 위해 이만큼이나마 애를 썼겠지, 생각하면 감사의 마음이 우러납니다. 특히 이 계절이 되면 이런 분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오히려 행운의 여신의 시기와 변덕을 염려하며 몸과 마음을 단속하게 됩니다. 그분과의 깊은 인연은 대학 졸업 한참 후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어렵게 다시 시작되지만, 요즘처럼 시집을 주고받고 여행을 함께하게 된 것은 퇴임을 하시고 나서부터입니다. 시인의 유별난 ‘통합적 감수성’이야 학부 시절부터 확인한 바이지만 사람에 대한 따스한 손길까지 함께 느끼게 되었으니 제자로서는 남다른 축복을 받은 셈이지요. 감사드릴 뿐입니다. 소망이 있다면 이 소중한 인연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 불민한 제자가 제 앞가림이나마 하게 될 때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지요.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마라는 옛말은 굳이 새길 필요가 없습니다. 너무 앞서 가시기에, 그림자 근방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요즘 음악에 대해서도 한 수 지도를 받고 싶어 좀 더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은 키워가고 있습니다. 근래 그분 글에 이따금 확인하게 되는 알싸한 음악이야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의 고백대로, 소년 시절 작곡가가 되려고 했음에도 젊은 시절에는 “음악을 작품에 직접 거론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너무 많은 음악이 ‘멋으로’ 시에 등장”하고 “알은체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봄날에 베토벤 후기 소나타를 들으며> 같은, 그분 표현대로 제목이 “현학적인” 시도 쓰게 됩니다. 음악의 훈김 속에서 노닐고 싶은 사람으로서야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지요. 시 읽으며 음악에도 눈을 뜨게 되니 말입니다. 이번 시 선집에도 “외로움과 슬픔이 이처럼 가까운 이웃!”임을 일깨워 주는 “슬픈 바이올린”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E단조, “죽음과 맑음이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음을 깨닫”게 해준 슈베르트의 현악오중주가 등장하고, “귀 내숭스러워진 만년 베토벤”이 “광기를 건반으로 벼루는” 하머클라비어 소나타 연주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단숨에 곡의 핵심을 도려내는 장인의 놀라운 예도(銳刀 아니면 藝刀)! 그 예리함으로 의미가 더욱 확장된 연주곡 하나, 보내드립니다. 베토벤 음악 중 가장 사랑한다는 이 곡의 마지막 악장에 부친 시인의 ‘헌사’가 이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다고 하지만/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천천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번 마지막 악장을 치듯/ 치는 도중 찻물 끓어 그만 의자에서 일어섰나,/ 곡이 끝나듯/ 그렇게 살고 싶다.”

이 연주에 대한 시인의 평도 부록 삼아 첨부합니다. “속도가 느리면서 극히 서정적인… 그 곡 속에는, 늘 바람 센 미시령의 어느 바람 없는 날 무한 곡선의 호랑나비가 날기도 하고, … 햇빛이 정면으로 쏟아져 들어와 … 성당을 온통 빛으로 채우고, 그 빛 속에서 그야말로 온몸으로 무한을 느낀 체험이 재현되기도 한다.”

그나저나 스승 황동규 시인이 부담스러워 이제 음악편지 어떻게 쓰나?

※음악은 경향닷컴(www.khan.co.kr)과 이종민 교수 홈페이지 http://leecm.chonbuk.ac.kr/~leecm/bbs/zboard.php?id=mletter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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