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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의 사회학

[도시·사회·시민 이야기](15)삶을 귀중히 여긴 도시가 아름답다

테오도르 폴 김 theodorepaul@naver.com

ㆍ원주민 80%이상 내쫓은 뉴타운
ㆍ정치인들 욕망이 만든 산물

도시는 어떻게 아름다워야 하는가?

도시의 예술성, 미학적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외형의 장식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가치에 의해서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판단이 예술철학(미학)이라는 학문으로 체계화된 것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사상이 유럽을 지배한 18세기 중반부터였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감정을 경험적·기계론적으로 체계화했다. 나아가 칸트는 인간의 오감이 바탕이 되는 주관성으로 발전시켰고, 도덕적·이성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으로 느끼는 즐거움의 주관적 판단을 아름다움으로 정의했다.

인간의 감성 위주로 발달된 미학의 사고는 낭만주의·예술지상주의·인상주의 등의 사조를 탄생시켜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 중 도덕적·사회적 의미보다 예술적 행위 그 자체를 예술로 주장한 예술지상주의는 예술이 인간과 사회를 위해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한 계몽주의 학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예술작품의 결과가 작품의 목적이 될 수 없으며, 특히 도시의 예술성은 반드시 사회와 시민이 주 목적으로 평가·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동자·부르주아 계급의 투쟁이 시작되는 산업시대를 맞이해 도시는 사회적·공리주의적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게 됐다. 또 작가 개인의 의도만을 강조한 표현주의가 출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인간의 정신적·잠재적 세계를 예술의 절대적 창조적 가치로 간주한 보링거는 추상과 감정이입의 이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인간의 추상적 감정이입은 당시 사회적 불안감이 표출된 결과이며 객관성을 증명하지 못하는 이기적 허상으로 간주했다.

오늘날 정보사회는 철학·사회학으로 정의했던 이전의 도시 예술의 개념보다 기호·표시·정보를 더 중요하게 해석한다. 그래서 도시의 모든 대상은 필요·기능·편리의 단순논리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다 신속정확한 정보통신의 조직망과 상징성이 도시의 가치로 변질됐다.

도시는 표현주의나 예술지상주의의 결과가 아니며, 소수의 일방적인 욕망 등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헌신적 노력과 대중의 아름다운 삶이라는 두 상호관계에서 탄생한다. 대중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정치가의 욕망은 사람들의 호기심·시선만 현혹할 뿐 예술적 가치는 없다. 청계천과 광화문광장에 수백만명의 시민들이 몰려들었지만, 이는 전시효과의 발상이지 예술적 가치의 장소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도시에 아름다운 장소가 탄생하는가? 아름다운 장소는 인간을 위한 장소, 즉 인간에 관여된 지식으로 개념이 설정돼야 한다. 그래서 도시는 경제·기술의 타당성 계산이 아닌 철학·사회·역사·인류학 등의 인문학적 사유로 만들어진 3가지 이론 즉 감정이입, 기분, 본체로 정의돼야 한다. 감정이입은 안에서(Ein) 느낀다(Fulen)의 복합어로 도시의 장소는 그곳의 예술적 특성을 통해 삶에 활력을 줘야 한다. 시민들의 삶에 강한 힘과 목표·성취감이 솟아나게 하는 장소로, 마치 한 작품의 매력에 푹 빠져 넋이 나간 것처럼 삶이 장소의 신비감에 도취되는 것을 뜻한다. 작품에 도취됐다는 것은 ‘장소’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삶’이 예술의 세계에 몰입된 것처럼 모든 생활이 귀중하다는 것이다. 삶을 귀중하게 간주하는 장소는 풍부한 감정과 자유로운 의식의 주거지가 되어 인간 능력의 한계를 발전시킨다.

기분(Stimmung)은 인간의 마음상태를 정의하는 짐멜의 개념으로 이를 담은 곳은 영혼이 작용하는 장소다. 이 장소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휴머니즘이 내재돼 있다. 인간의 영혼은 의식 없는 빈껍데기의 디자인의 장소에서는 느껴지지 않으며 전체적 환경의 조화에서 가능하다. 자연을 훼손해 아파트를 세우고, 조각난 자연의 요소들을 군데군데 설치했다고 아름다운 주택가가 되지 않는다. 본체(Noumenon)는 칸트의 개념으로 감각과 느낌보다 그 본질의 물 자체로, 인간의 지성·지식·창의력의 원천을 뜻한다. 지식의 선험적인 판단에 의한 순수 이성적 비판을 통해 장소의 가치를 판단하는 검증방식으로, 도시의 예술성은 추상적·물리적·현상학적 대상이 아니라 지식의 ‘선험적 판단’과 그곳에서 살아온 ‘경험적 결과’에 의해 아름다운 도시가 된다.

반면, 우리의 도시는 어디가 아름다운가? 뉴타운을 만든다고 원주민의 80%를 내쫓는 것이 아름다운 도시를 만드는 정책인가? 낡은 다주택 지역을 깡그리 밀어버리고 고층아파트로 채우는 것을 신도시 정책으로 착각하는 무지의 정치가들을 냉정하게 거부해야 아름다운 삶의 도시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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