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팀 | 최민영·이주영·김기범·임아영 기자, 김설아·황성호 인턴기자
가재울은 2003년 11월 뉴타운 사업 지역으로 지정됐다. 1구역부터 6구역까지 모두 6개 구역으로 나뉘어졌다.
1구역은 2008년 12월에, 2구역은 2009년 6월에 준공돼 아파트 입주가 끝난 상황이다. 1, 2구역은 비교적 규모가 작어 사업이 빨리 진행됐기 때문이다. 3구역은 철거를 마친 뒤 지반정비 작업 중이고, 4구역은 철거작업이 91% 진행 중이다. 5, 6구역은 현재 조합이 설립된 상태로 사업시행인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가재울은 빈손으로 들어온 서민들이 삶을 일구고 가꾼 곳이다. 해방 직후 일본에서 송환되어 온 재일교포들이 먼저 남가좌동에 자리잡았고, 1959년에는 사라호 태풍으로 수재를 입은 한강변 이촌동 주민들이 옮겨왔다. 60년대 초반에는 서울시가 도심 정비를 하면서 철거민들을 강북구 미아동과 가재울의 남가좌동 152번지 일대에 마련한 정착촌으로 이주시켰다. 후암동이나 도동 일대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도 이때 들어왔다. 사람이 모여들고 지역이 활기를 띠면서 쓰레기 매립지로 활용되던 곳에 66년, 73년 각각 모래내시장과 서중시장이 들어섰다. 시장이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사람들은 시장을 키워갔다.
경의선 가좌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교통은 시장을 더욱 번창케 하는 요인이 됐다. 또 수색로가 확장되면서 일산과 능곡 등 경기 서북부지역의 값싸고 싱싱한 농산물이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모래내시장은 품질 좋은 고추와 참깨, 들깨로 유명해 고추방앗간, 기름집이 번성했다. 모래내는 일산, 수색 등지를 아우르는 서북부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자리잡아갔다.
가재울에 사람이 모여든 또 하나의 계기는 62년 사천교 개통이다. 다리가 수색과 신촌을 이으면서 경기와 서울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였다. 신촌이나 아현동처럼 서울 시내와 가까운 곳보다 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가재울로 ‘서울 입성’의 꿈을 안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당시 원주민들은 밭농사를 지어 아현동이나 수색에 내다 팔았고, 농사를 지을 기반이 없던 이주민들은 서울역 주변에서 지게품을 팔거나 건축 현장의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 가재울이 뉴타운으로 지정되면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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