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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의 사회학

[주거의 사회학]‘고시원 쪽방’에 몰리는 88만원 세대

특별취재팀 | 최민영·이주영·김기범·임아영 기자, 김설아·황선호 인턴기자

ㆍ옆동네 재개발로 고삐풀린 집세 갑자기 올려달라니 또 이사할 수밖에
ㆍ서울지역 고시원 수 2년 만에 20% 증가
ㆍ숙박 목적 거주자만 6만2000명 넘어

사원 전모씨(31)는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고시원에서 5개월째 살고 있다. 전씨는 “좁은 것에 대한 답답함을 감수한다면 고시원이 단칸방보다 훨씬 낫다”고 말한다. “보증금과 공과금이 필요없고 출퇴근 교통비가 절약되는데다 월 35만원에 쌀밥과 김치, 라면을 제공하니 혼자 살기에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너무 비좁은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적응하면 괜찮다”며 웃었다. 그런 그도 자신의 삶을 단 두 평의 공간에 압축해 놓은 듯한 고시원 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관’(棺)에 들어온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현재 기거하는 고시원은 처음 생활했던 고시원보다는 1.65㎡(반평) 남짓 넓다. 샤워가 가능한 화장실까지 갖춰져 있다. 2007년부터 1년6개월간 살던 신촌의 월세 24만원짜리 고시원은 “건넌방의 기침소리, 옆방의 알람 소리에 잠을 깨는 곳”이었다. 좁디좁은 취업에 몇차례나 좌절한 뒤 한때 낙향했던 그가 지난해 말부터 홍보대행사에서 수습사원으로 근무하면서 누리는 ‘호사’이다. 한달 급여는 130만원. ‘88만원 세대’를 자칭한 그는 “전·월세 보증금을 모을 때까지는 고시원에서 살 것”이라고 말했다.

전씨처럼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근로 계층이 증가하고 있다. 고시원 시설이 예전보다 ‘고급화’한 것은 고시원 수요자들이 달라진 데 따른 변화다. 1980~90년대 고시생과 소외계층을 위한 ‘도시형 쪽방’ 고시원은 이제 직장인과 학생들이 주요 고객으로 바뀌고 있다. 비정규직 젊은이인 88만원 세대의 등장과 궤를 같이 한다. 현재의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로는 기존의 전·월세를 감당하기 힘들다. 2008년 기준으로 비정규직의 월평균 급여는 118만원. 정규직(215만원)의 절반 수준이다. 그 달 벌이로 그 달을 먹고 사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집을 마련할 돈을 모으기에는 턱없이 적다.

비정규직과 고시원의 상관 관계는 각종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비정규직은 지난해 8월 575만명으로 1년 전에 비해 5.7%가 늘었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고시원 역시 2007년 3111곳에서 2년 만에 3738곳으로 늘어나 20% 증가했다. 강남·서초·동작·구로·송파구 등 직장인이 몰리는 곳에 43%가 밀집해 있다. 서울에서 고시원에 사는 사람은 약 10만8000명. 이중 순수 ‘숙박형’이 6만2000명에 달한다. ‘고시텔’, ‘원룸텔’, ‘레지던스’ 등 이름만 다를 뿐 고시원은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직장인을 위한 숙박촌으로 자리 잡아가는 추세다.

한국고시원협회 김두수 이사는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크게 늘어난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은행권에서 전·월세 보증금을 대출받기가 어렵다. 이들이 주거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지낼 수 있도록 ‘틈새’ 시장에 맞춰 진화한 숙박 시설이 고시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시원에 거주하는 직장인은 대부분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비정규직”이라며 “고시원 수요는 앞으로도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울 광진구에서 원룸텔을 운영 중인 한 건물주는 “예전엔 형편이 좀 어렵더라도 아껴쓰며 집을 장만해야 한다는 정서가 강했지만 요즘 들어선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젊은층의 소득 수준은 크게 떨어지다보니 아예 포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부가 1인 가구를 대상으로 공급 예정인 ‘도시형 생활주택’ 전망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몇천만원씩 들여 도시형 생활주택을 마련할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88만원 세대’의 추락이 미래에 끼칠 영향이다. 김수현 세종대 교수(부동산학)는 “중대형 주택을 매입하는 것은 40대에 가장 왕성한데, 젊은 세대의 소득이 불안정하면 주택 구매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88만원 세대의 현 상황은 자신들의 미래는 물론 장기적으로 부동산 시장의 불황 등 국가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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