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팀 | 최민영·이주영·김기범·임아영 기자, 김설아·황성호 인턴기자
ㆍ가재울 3구역 박규남(가명)씨
ㆍ월 300만원 벌다 지금은 선착장에서 일해
박규남씨(50·가명)는 서울 서대문구의 가재울 재개발로 집과 일터를 모두 잃었다. 한달 평균 300만원 벌이의 세탁소를 운영했던 박씨는 요즘 강원 강릉의 한 선착장에서 일용근로자로 지낸다. 아내는 인근 서울 북가좌 1동에 남아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5만원짜리 반지하 집에서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그는 가재울의 상가세입자이자 주거세입자였다. 그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가장 힘들다”며 한숨 섞인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박씨가 가재울 3구역으로 이사온 것은 2005년 2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가게를 차렸다. 집을 따로 구할 돈이 없어 가게에 딸린 비좁은 방에서 네 식구가 숙식을 해결했다. 당시 개발 얘기가 떠돌았지만 적어도 8년간은 아무일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믿었다. 그러나 석달 후인 그해 5월 도로 위에 플래카드가 걸렸다. ‘경축 가재울 뉴타운 확정.’ 가슴이 철렁했다.
2006년은 폭우 직전의 짧은 햇살과도 같았다. 세탁소가 자리잡으면서 한 달에 500만~600만원을 벌었다. 불경기라는 여름과 겨울에도 한 달 평균 300만원 정도가 들어왔다. 네 식구가 먹고 살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입춘을 지나 두꺼운 겨울코트가 세탁소로 몰릴 때면 한달에 1000만원도 너끈했다. 장사가 신이 났다. 그 해 여름 월세 25만원짜리 옥탑방을 얻었다. 아비 역할을 잘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뿌듯했다.
2008년 초부터 재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수입이 급전직하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가재울을 떠나면서 주변 상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4~5월부터는 장사가 거의 안 됐다. 월세조차 낼 수 없었다. 보증금도 모두 깎아먹고 말았다. 결국 그해 8월 세탁소 문을 닫았다. 보증금과 별도로 권리금을 4000만원이나 주고 들어온 가게였다.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인근에 다시 세탁소를 차려볼까 했지만 권리금을 포함해 1억원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럴 돈이 없었다.
불운은 겹쳤다. 가게 바로 옆 건물에 있던 옥탑방도 재개발 구역에 포함된 것이다. 박씨는 주거이전비를 달라고 요구했으나 허사였다. 자격기준에 미달된다는 것이었다.
그냥 포기할 수 없었다. 옥탑방에 남아 보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새벽 6시부터 철거에 나선 포클레인이 땅을 울리고 귀를 찢었다. 아내는 “사람들이 이사를 가서 골목 안 집들이 다 비었는데 어떻게 우리만 이 소음을 견디냐”며 불안해했다. 겨울인데도 용역들은 유리를 깨고, 조합은 수도를 끊었다. 갈수록 ‘철거’, ‘공가’ 등의 ‘빨간 글씨’가 쓰인 빈집들이 늘어났다. 박씨도 아이들의 고통을 마냥 외면할 수 없어 지난해 3월 지금의 반지하 집으로 이사했다.
그나마 지난해 3월 세탁소 영업손실보상액으로 2500만원을 받았지만 주변 사람들한테 빌렸던 돈을 갚느라 2000만원을 썼다. 형제들에게 빌린 돈을 아직도 갚지 못했다. “형제들에게 빌린 돈 때문에 서로 서먹해져서 마음이 아프다”는 그는 올 설 연휴에도 고향인 충남 예산에는 내려가지 못했다. 놀 수만은 없어 작년 6월부터 희망근로를 했다. 남가좌동과 북가좌동 일대를 다니며 하수구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한 달에 80만원씩 벌었지만 한시적인 일자리인지라 마음은 늘 불안했다.
박씨는 아이들한테 미안할 따름이다. 지난달 11일은 큰 아들의 초등학교 졸업식. 아이는 “(아빠가) 졸업식에 안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서운함보다 아들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아버지가 돼서 일자리도 없으니 창피했겠죠. 그 말을 듣고 정말 슬펐지만 아이한테는 부모 잘못 만난 죄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다. 용역들이 집을 철거하는 과정을 눈으로 보며 자란 아들은 1년 사이에 부쩍 어두워지고 말수도 줄었다.
그의 아내는 어려워진 살림 때문에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식당에서 일을 하고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병원에서 야식을 배달하는 일을 한다. 박씨는 빨리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 네 가족이 먹고 살려면, 아이들 교육비를 마련하려면, 집을 구하려면 일이 필요하다. 지난달 말 박씨는 일자리를 찾아 강릉으로 떠났다.
그는 재개발 문제로 힘들었던 기억을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아한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없었으면…”하는 바람에서 취재에 응했다고 했다. “사람에 대한 실망감이 제일 컸어요. 다들 세탁소에 오는 손님들이었는데, 재산 때문에 고개 돌리는 걸 보면서 괴롭더군요. 화목하던 동네 분위기를 삭막하게 만든 건 과연 누구입니까.”
ⓒ 경향신문 & 경향닷컴
ㆍ월 300만원 벌다 지금은 선착장에서 일해
박규남씨(50·가명)는 서울 서대문구의 가재울 재개발로 집과 일터를 모두 잃었다. 한달 평균 300만원 벌이의 세탁소를 운영했던 박씨는 요즘 강원 강릉의 한 선착장에서 일용근로자로 지낸다. 아내는 인근 서울 북가좌 1동에 남아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5만원짜리 반지하 집에서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그는 가재울의 상가세입자이자 주거세입자였다. 그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가장 힘들다”며 한숨 섞인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가재울 뉴타운사업으로 집과 일자리를 잃은 박규남씨(50·가명)가 지난 9일 철거 현장에서 담배를 피워 문 채 공사장을 바라보고 있다. | 정지윤 기자
박씨가 가재울 3구역으로 이사온 것은 2005년 2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가게를 차렸다. 집을 따로 구할 돈이 없어 가게에 딸린 비좁은 방에서 네 식구가 숙식을 해결했다. 당시 개발 얘기가 떠돌았지만 적어도 8년간은 아무일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믿었다. 그러나 석달 후인 그해 5월 도로 위에 플래카드가 걸렸다. ‘경축 가재울 뉴타운 확정.’ 가슴이 철렁했다.
2006년은 폭우 직전의 짧은 햇살과도 같았다. 세탁소가 자리잡으면서 한 달에 500만~600만원을 벌었다. 불경기라는 여름과 겨울에도 한 달 평균 300만원 정도가 들어왔다. 네 식구가 먹고 살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입춘을 지나 두꺼운 겨울코트가 세탁소로 몰릴 때면 한달에 1000만원도 너끈했다. 장사가 신이 났다. 그 해 여름 월세 25만원짜리 옥탑방을 얻었다. 아비 역할을 잘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뿌듯했다.
2008년 초부터 재개발이 본격화하면서 수입이 급전직하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가재울을 떠나면서 주변 상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4~5월부터는 장사가 거의 안 됐다. 월세조차 낼 수 없었다. 보증금도 모두 깎아먹고 말았다. 결국 그해 8월 세탁소 문을 닫았다. 보증금과 별도로 권리금을 4000만원이나 주고 들어온 가게였다.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인근에 다시 세탁소를 차려볼까 했지만 권리금을 포함해 1억원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럴 돈이 없었다.
불운은 겹쳤다. 가게 바로 옆 건물에 있던 옥탑방도 재개발 구역에 포함된 것이다. 박씨는 주거이전비를 달라고 요구했으나 허사였다. 자격기준에 미달된다는 것이었다.
그냥 포기할 수 없었다. 옥탑방에 남아 보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새벽 6시부터 철거에 나선 포클레인이 땅을 울리고 귀를 찢었다. 아내는 “사람들이 이사를 가서 골목 안 집들이 다 비었는데 어떻게 우리만 이 소음을 견디냐”며 불안해했다. 겨울인데도 용역들은 유리를 깨고, 조합은 수도를 끊었다. 갈수록 ‘철거’, ‘공가’ 등의 ‘빨간 글씨’가 쓰인 빈집들이 늘어났다. 박씨도 아이들의 고통을 마냥 외면할 수 없어 지난해 3월 지금의 반지하 집으로 이사했다.
그나마 지난해 3월 세탁소 영업손실보상액으로 2500만원을 받았지만 주변 사람들한테 빌렸던 돈을 갚느라 2000만원을 썼다. 형제들에게 빌린 돈을 아직도 갚지 못했다. “형제들에게 빌린 돈 때문에 서로 서먹해져서 마음이 아프다”는 그는 올 설 연휴에도 고향인 충남 예산에는 내려가지 못했다. 놀 수만은 없어 작년 6월부터 희망근로를 했다. 남가좌동과 북가좌동 일대를 다니며 하수구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한 달에 80만원씩 벌었지만 한시적인 일자리인지라 마음은 늘 불안했다.
박씨는 아이들한테 미안할 따름이다. 지난달 11일은 큰 아들의 초등학교 졸업식. 아이는 “(아빠가) 졸업식에 안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서운함보다 아들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아버지가 돼서 일자리도 없으니 창피했겠죠. 그 말을 듣고 정말 슬펐지만 아이한테는 부모 잘못 만난 죄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다. 용역들이 집을 철거하는 과정을 눈으로 보며 자란 아들은 1년 사이에 부쩍 어두워지고 말수도 줄었다.
그의 아내는 어려워진 살림 때문에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식당에서 일을 하고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병원에서 야식을 배달하는 일을 한다. 박씨는 빨리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 네 가족이 먹고 살려면, 아이들 교육비를 마련하려면, 집을 구하려면 일이 필요하다. 지난달 말 박씨는 일자리를 찾아 강릉으로 떠났다.
그는 재개발 문제로 힘들었던 기억을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아한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없었으면…”하는 바람에서 취재에 응했다고 했다. “사람에 대한 실망감이 제일 컸어요. 다들 세탁소에 오는 손님들이었는데, 재산 때문에 고개 돌리는 걸 보면서 괴롭더군요. 화목하던 동네 분위기를 삭막하게 만든 건 과연 누구입니까.”
ⓒ 경향신문 & 경향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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