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민아·사진 김문석 기자 makim@kyunghyang.com
ㆍ“옛날 광개토왕·장수왕이 넘나든 길 지날 때는 가슴 뭉클”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 또 하나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2009년 2월부터 경향신문에 연재해온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시리즈를 1년 만에 완결지은 것이다. 마지막회가 게재된 지난 10일 문명교류연구소에서 만난 정 소장은 70대 중반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하고 의욕이 넘쳤다. 지금까지 수십 차례 실크로드를 찾았다면서도 실크로드에 지치지 않은 듯했다. 실크로드의 세 가지 길 가운데 오아시스로(육로)와 초원로 탐사는 마쳤으니 해로(바닷길) 탐사를 본격화할 것이라고 했고, 하고 싶은 연구와 쓰고 싶은 책이 많다고도 했다. 그러나 세간에서 궁금해하는 개인사에 대해선 침묵했다. 자서전을 쓸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인 정수일’에 대한 관심은 접고 ‘학자 정수일’에만 집중해야 했다.
- 연재를 마친 소회가 궁금합니다.
“일단 홀가분합니다. 유목 기마민족의 문명을 알아보자는 목적을 나름대로 이룬 것 같아요. 초원 실크로드를 한반도로 연장하는 문제가 가장 초점이었는데, 탐사하면서 우리와 관련된 유물들을 다양하게 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무지나 오해가 적지 않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동안 체제와 이념에 묶여있다 보니 편견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더군요. 시베리아에서 활동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았고 치열한 무장투쟁이 이뤄졌는데,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거나, 소개됐더라도 본질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던 듯합니다.”
- 연재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입니까.
“독자들과 늘 호흡할 수 있었던 게 큰 보람이죠. 기사가 나가면 e메일이나 전화를 자주 받았는데, 소감도 주시고 의견도 교환했습니다. ‘이범진 열사의 넋을 기리며’편(2010년 2월3일 게재)을 읽고 증손자 되는 이원갑씨에게서 e메일이 왔는데, 증조부의 자취를 소상히 알려줘서 감사하다고 하더군요.”
- 탐사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지역은 어떤 곳이었는지요.
“우리 겨레의 기상이 깃들어있는 고토, 유적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옛날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넘나든 길을 지날 때는 고구려 군단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요. 러시아의 노보시비르스크에 가면 재래시장이 있는데 까레이스키(한인)들이 음식을 팔아요. 이분들이 상당히 반갑게 인사하는데, 저도 해외에서 산 적이 많아서 동병상련이랄까요, 그런 감정이 느껴지더군요.”
- 실크로드는 선생님의 학문에서 어떤 의미입니까.
“실크로드에 모두 수십 차례 다녀왔지만, 특히 2006년 7월부터 올해 1월까지, 최근 3년반 사이에 18번이나 갔어요. 처음 갔을 때는 이집트 카이로대학에 공부하러 갈 때였지요. 실크로드는…저의 삶을 싣고 다닌 길, 세계에 눈을 뜨게 한 길입니다. 젊은 시절 실크로드에 간 게 문명교류를 연구하게 된 동기를 제공했지요. 실크로드는 문명교류의 길이고, 모든 문명교류의 실체가 거기에 있으니까요.”
- 한국의 문명교류학 연구는 지금 어떤 수준이고, 과제는 무엇인가요.
“한국이든 외국이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문명교류학과나 연구소 있는 나라가 몇 군데 안되거든요. 일본이 조금 활발한 편인데, 실크로드 연구센터가 1998년에 생겼어요. 국내에는 전문연구기관이 사실상 공백 상태지요. 서울에만 10여개 대학에 문명교류 관련 강좌가 설치돼 있기는 한데, 강좌 이름이 제각각입니다. 비전공자들이 강의하고, 기본 교재도 아직 없는 상태고요. 그동안 서구문명 중심주의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문명은 일방적으로 서구에서 주입되는 것으로 여겼고, 그러니 구태여 서로 오가는 교류를 연구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문명교류라는 학문 자체가 어려워요. 동서를 다 알아야 하는데, 특히 언어가 큰 문제입니다. 세계를 넓게 볼 수 있는 눈도 필요하고요. 하지만 요즘 문명교류연구소에서 연구원들과 공부해 보니 어렵지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연구소에서는 어떤 작업을 합니까.
“대학교수와 대학원생 15명 정도가 한달에 두 번씩 모입니다. 문명교류를 연구하려면 우선 우리 것부터 알아야겠다 싶어서, 지난 1년간은 세계 인식에 관한 우리 고전 독해를 했어요. 예를 들면,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하는 거죠. 1년에 네 번 심포지엄도 열고 있습니다.”
- 문명교류학이 ‘지금,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21세기는 문명교류의 무한확산 시대예요. 정보화가 그 자체로 교류 아닙니까. 교류를 떠나선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이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면 교류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신 실크로드론’ 같은 얘기가 나오는 게 다 이런 맥락입니다. 다음으로, 문명교류는 미래와 직결됩니다. 문명담론은 시대적 화두예요. 이를 연구함으로써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볼 수 있거든요. 문명에서 공통분모를 찾고, 문명교류를 통해 인간 사이의 보편적 문명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세계화요, 국제화입니다. 정치, 경제…이런 것은 결국 이해충돌이거든요. 공통점이 없어요. 그러나 문명에선 공통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또 문명교류학은 인문학의 새로운 분야이자 국제적 성격의 학문입니다. 특히 이 분야는 우리나라가 개척해서 선도적인 국가가 될 수 있어요. 지원만 있으면 우리나라가 문명교류학의 메카로 떠오를 가능성도 있습니다.”
- 문명교류학자로서 반드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우선 문명교류학의 학문적 정립이 절실한 과제입니다. 또 <고대문명교류사>를 썼고 <중세문명교류사>를 쓰는 중인데, 앞으로 <근현대문명교류사>까지 문명교류 통사를 3부작으로 완성할 계획입니다. 중세편은 올해 집필을 끝내는 게 목표고, 근현대편은 앞으로 2~3년 걸릴 것 같습니다. 실크로드 탐사도 오아시스로(육로), 초원로는 마쳤으니 마지막 남은 해로(바닷길) 탐사를 해야죠. 이미 탐사를 시작했는데 완전히 마치고 기행문을 완성하는 데까지 3~4년 소요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 연구소를 잘 꾸리고 싶어요. 학문이란 혼자서 못합니다. 연구소를 통해 학술논총과 학술지를 발간하고, 문명교류에 관한 고전을 번역하고, 교육프로그램도 개발할 생각이에요. 이미 대중을 위한 실크로드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분야의 기본 텍스트가 될 수 있는 <문명교류학>이나 <문명교류론>을 쓰고 싶습니다.”
- 굴곡이 적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받을 때 판사도 그러더군요. 소설 같은 삶이라고…. 하지만 전 이 시대 사람들이 겪은 보통의 삶이지, 대단히 특수하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다만 참된 삶이란 뭘까, 추구해야 할 삶이란 뭘까 이런 생각은 해왔지요. 중요한 것은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삶입니다. 시대적 소명을 깨닫고 거기에 따르는 것이 삶의 본질이란 생각이 들어요. 인간은 시대의 피조물이거든요. 영웅 호걸이라도 시대가 인간을 만들지, 인간이 시대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저라는 사람도 시대가 만들어낸 것이지요. 굴곡있는 삶을 살았지만, 시대가 나를 요구했고, 그것이 소명이라고 생각해서 따랐을 뿐입니다. 그리고 격동의 시대를 70년 동안 걸어오면서 간직해온 정신이 두 가지 있어요. 분발하고, 개척한다는 겁니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남을 따라가서는 안 되겠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겠다 늘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 여러 나라에서 생활했고 10여개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압니다. 스스로를 코스모폴리탄(범세계주의자)으로 생각합니까.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저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입니다. 예전에 외국에 다닐 때 보면 한국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그때부터 왜 우린 이럴까,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고 그래서 분발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학문적으로 일본도, 중국도 앞서고 싶은데 혼자로는 안 되니까 겨레와 민족을 생각하게 되고 오히려 민족주의자가 되더군요. 민족주의라고 하면, 진보적 학자들도 배타적이고 고루하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민족주의는 아시아의 보편가치>라는 글을 발표한 적도 있습니다.”
- 민족주의와 보편성이 통한다는 말씀인가요.
“세계가 블록화된다고 하지요. 그러면 한국과 중국, 일본이 동북아 블록을 만든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통의 가치가 있어야 되는데, 그 공통의 가치를 어떻게 창출할 겁니까. 그 가치란 세 나라의 전통문화, 민족문화를 고도로 발전시켜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민족주의의 요건은 집단적인 공통의식, 수호 의지, 발전 지향성 등 세 가지인데 특히 세번째가 중요해요.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그 민족의 발전을 지향합니다. 진정한 발전을 하려면 쇄국, 배타하지 말고 교류해야 하는 것이고요. 발전지향성이 결여된 민족주의는 국수주의로 흐를 수 있어요. 배타적 민족주의는 민족주의가 아닙니다.”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 또 하나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2009년 2월부터 경향신문에 연재해온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시리즈를 1년 만에 완결지은 것이다. 마지막회가 게재된 지난 10일 문명교류연구소에서 만난 정 소장은 70대 중반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하고 의욕이 넘쳤다. 지금까지 수십 차례 실크로드를 찾았다면서도 실크로드에 지치지 않은 듯했다. 실크로드의 세 가지 길 가운데 오아시스로(육로)와 초원로 탐사는 마쳤으니 해로(바닷길) 탐사를 본격화할 것이라고 했고, 하고 싶은 연구와 쓰고 싶은 책이 많다고도 했다. 그러나 세간에서 궁금해하는 개인사에 대해선 침묵했다. 자서전을 쓸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인 정수일’에 대한 관심은 접고 ‘학자 정수일’에만 집중해야 했다.
- 연재를 마친 소회가 궁금합니다.
“일단 홀가분합니다. 유목 기마민족의 문명을 알아보자는 목적을 나름대로 이룬 것 같아요. 초원 실크로드를 한반도로 연장하는 문제가 가장 초점이었는데, 탐사하면서 우리와 관련된 유물들을 다양하게 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 대한 무지나 오해가 적지 않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동안 체제와 이념에 묶여있다 보니 편견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더군요. 시베리아에서 활동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았고 치열한 무장투쟁이 이뤄졌는데,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거나, 소개됐더라도 본질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던 듯합니다.”
- 연재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꼈을 때는 언제입니까.
“독자들과 늘 호흡할 수 있었던 게 큰 보람이죠. 기사가 나가면 e메일이나 전화를 자주 받았는데, 소감도 주시고 의견도 교환했습니다. ‘이범진 열사의 넋을 기리며’편(2010년 2월3일 게재)을 읽고 증손자 되는 이원갑씨에게서 e메일이 왔는데, 증조부의 자취를 소상히 알려줘서 감사하다고 하더군요.”
- 탐사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지역은 어떤 곳이었는지요.
“우리 겨레의 기상이 깃들어있는 고토, 유적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옛날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넘나든 길을 지날 때는 고구려 군단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요. 러시아의 노보시비르스크에 가면 재래시장이 있는데 까레이스키(한인)들이 음식을 팔아요. 이분들이 상당히 반갑게 인사하는데, 저도 해외에서 산 적이 많아서 동병상련이랄까요, 그런 감정이 느껴지더군요.”
- 실크로드는 선생님의 학문에서 어떤 의미입니까.
“실크로드에 모두 수십 차례 다녀왔지만, 특히 2006년 7월부터 올해 1월까지, 최근 3년반 사이에 18번이나 갔어요. 처음 갔을 때는 이집트 카이로대학에 공부하러 갈 때였지요. 실크로드는…저의 삶을 싣고 다닌 길, 세계에 눈을 뜨게 한 길입니다. 젊은 시절 실크로드에 간 게 문명교류를 연구하게 된 동기를 제공했지요. 실크로드는 문명교류의 길이고, 모든 문명교류의 실체가 거기에 있으니까요.”
- 한국의 문명교류학 연구는 지금 어떤 수준이고, 과제는 무엇인가요.
“한국이든 외국이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문명교류학과나 연구소 있는 나라가 몇 군데 안되거든요. 일본이 조금 활발한 편인데, 실크로드 연구센터가 1998년에 생겼어요. 국내에는 전문연구기관이 사실상 공백 상태지요. 서울에만 10여개 대학에 문명교류 관련 강좌가 설치돼 있기는 한데, 강좌 이름이 제각각입니다. 비전공자들이 강의하고, 기본 교재도 아직 없는 상태고요. 그동안 서구문명 중심주의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문명은 일방적으로 서구에서 주입되는 것으로 여겼고, 그러니 구태여 서로 오가는 교류를 연구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문명교류라는 학문 자체가 어려워요. 동서를 다 알아야 하는데, 특히 언어가 큰 문제입니다. 세계를 넓게 볼 수 있는 눈도 필요하고요. 하지만 요즘 문명교류연구소에서 연구원들과 공부해 보니 어렵지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연구소에서는 어떤 작업을 합니까.
“대학교수와 대학원생 15명 정도가 한달에 두 번씩 모입니다. 문명교류를 연구하려면 우선 우리 것부터 알아야겠다 싶어서, 지난 1년간은 세계 인식에 관한 우리 고전 독해를 했어요. 예를 들면,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하는 거죠. 1년에 네 번 심포지엄도 열고 있습니다.”
- 문명교류학이 ‘지금,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21세기는 문명교류의 무한확산 시대예요. 정보화가 그 자체로 교류 아닙니까. 교류를 떠나선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이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면 교류에 대해 공부해야 합니다. ‘신 실크로드론’ 같은 얘기가 나오는 게 다 이런 맥락입니다. 다음으로, 문명교류는 미래와 직결됩니다. 문명담론은 시대적 화두예요. 이를 연구함으로써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볼 수 있거든요. 문명에서 공통분모를 찾고, 문명교류를 통해 인간 사이의 보편적 문명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세계화요, 국제화입니다. 정치, 경제…이런 것은 결국 이해충돌이거든요. 공통점이 없어요. 그러나 문명에선 공통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또 문명교류학은 인문학의 새로운 분야이자 국제적 성격의 학문입니다. 특히 이 분야는 우리나라가 개척해서 선도적인 국가가 될 수 있어요. 지원만 있으면 우리나라가 문명교류학의 메카로 떠오를 가능성도 있습니다.”
- 문명교류학자로서 반드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우선 문명교류학의 학문적 정립이 절실한 과제입니다. 또 <고대문명교류사>를 썼고 <중세문명교류사>를 쓰는 중인데, 앞으로 <근현대문명교류사>까지 문명교류 통사를 3부작으로 완성할 계획입니다. 중세편은 올해 집필을 끝내는 게 목표고, 근현대편은 앞으로 2~3년 걸릴 것 같습니다. 실크로드 탐사도 오아시스로(육로), 초원로는 마쳤으니 마지막 남은 해로(바닷길) 탐사를 해야죠. 이미 탐사를 시작했는데 완전히 마치고 기행문을 완성하는 데까지 3~4년 소요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 연구소를 잘 꾸리고 싶어요. 학문이란 혼자서 못합니다. 연구소를 통해 학술논총과 학술지를 발간하고, 문명교류에 관한 고전을 번역하고, 교육프로그램도 개발할 생각이에요. 이미 대중을 위한 실크로드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분야의 기본 텍스트가 될 수 있는 <문명교류학>이나 <문명교류론>을 쓰고 싶습니다.”
- 굴곡이 적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받을 때 판사도 그러더군요. 소설 같은 삶이라고…. 하지만 전 이 시대 사람들이 겪은 보통의 삶이지, 대단히 특수하다고 여기진 않습니다. 다만 참된 삶이란 뭘까, 추구해야 할 삶이란 뭘까 이런 생각은 해왔지요. 중요한 것은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삶입니다. 시대적 소명을 깨닫고 거기에 따르는 것이 삶의 본질이란 생각이 들어요. 인간은 시대의 피조물이거든요. 영웅 호걸이라도 시대가 인간을 만들지, 인간이 시대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저라는 사람도 시대가 만들어낸 것이지요. 굴곡있는 삶을 살았지만, 시대가 나를 요구했고, 그것이 소명이라고 생각해서 따랐을 뿐입니다. 그리고 격동의 시대를 70년 동안 걸어오면서 간직해온 정신이 두 가지 있어요. 분발하고, 개척한다는 겁니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남을 따라가서는 안 되겠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겠다 늘 그런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 여러 나라에서 생활했고 10여개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압니다. 스스로를 코스모폴리탄(범세계주의자)으로 생각합니까.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저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입니다. 예전에 외국에 다닐 때 보면 한국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그때부터 왜 우린 이럴까, 가슴에 응어리로 남았고 그래서 분발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학문적으로 일본도, 중국도 앞서고 싶은데 혼자로는 안 되니까 겨레와 민족을 생각하게 되고 오히려 민족주의자가 되더군요. 민족주의라고 하면, 진보적 학자들도 배타적이고 고루하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민족주의는 아시아의 보편가치>라는 글을 발표한 적도 있습니다.”
- 민족주의와 보편성이 통한다는 말씀인가요.
“세계가 블록화된다고 하지요. 그러면 한국과 중국, 일본이 동북아 블록을 만든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통의 가치가 있어야 되는데, 그 공통의 가치를 어떻게 창출할 겁니까. 그 가치란 세 나라의 전통문화, 민족문화를 고도로 발전시켜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민족주의의 요건은 집단적인 공통의식, 수호 의지, 발전 지향성 등 세 가지인데 특히 세번째가 중요해요.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그 민족의 발전을 지향합니다. 진정한 발전을 하려면 쇄국, 배타하지 말고 교류해야 하는 것이고요. 발전지향성이 결여된 민족주의는 국수주의로 흐를 수 있어요. 배타적 민족주의는 민족주의가 아닙니다.”
▲ 정수일은
스스로 “역마살이 있다”고 말한다. 출생부터 그런 운명을 타고났는지 모른다.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흘러간 유랑민의 자손으로 1934년 중국 옌볜에서 태어났다. 베이징대 동방학부를 졸업한 뒤 국비 유학생으로 뽑혀 이집트 카이로대에서 공부했다. 외교관이 돼 중동 지역 등에서 활동하다 북한으로 갔다. 평양국제관계대와 평양외국어대 교수를 지냈고, 튀니지대 연구원과 말레이대 교수로도 재직했다. 84년 레바논계 필리핀 국적의 ‘무함마드 깐수’로 한국에 입국했다. 단국대 교수로 활동하며 문명교류에 관한 연구업적을 인정받았으나, 96년 간첩 혐의로 구속돼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2000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뒤, 2003년 특별사면·복권되고 한국 국적도 얻었다. 저서로 <이슬람 문명> <씰크로드학> <고대문명교류사> <실크로드 문명기행> <문명담론과 문명교류> 등이 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스스로 “역마살이 있다”고 말한다. 출생부터 그런 운명을 타고났는지 모른다.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흘러간 유랑민의 자손으로 1934년 중국 옌볜에서 태어났다. 베이징대 동방학부를 졸업한 뒤 국비 유학생으로 뽑혀 이집트 카이로대에서 공부했다. 외교관이 돼 중동 지역 등에서 활동하다 북한으로 갔다. 평양국제관계대와 평양외국어대 교수를 지냈고, 튀니지대 연구원과 말레이대 교수로도 재직했다. 84년 레바논계 필리핀 국적의 ‘무함마드 깐수’로 한국에 입국했다. 단국대 교수로 활동하며 문명교류에 관한 연구업적을 인정받았으나, 96년 간첩 혐의로 구속돼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2000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뒤, 2003년 특별사면·복권되고 한국 국적도 얻었다. 저서로 <이슬람 문명> <씰크로드학> <고대문명교류사> <실크로드 문명기행> <문명담론과 문명교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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