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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흔적 남기기/꽃이 있는 풍경

꽃이 있는 풍경(47) - 봄과 여름의 길목에서


출근길, 라디오를 듣다 이정록詩人의 글이 소개됩니다.
『어릴 적 풍경 하나 떠오른다.
잔치를 준비중인 할머니께서 두부를 만들고 난 뜨거운 국솥 찌꺼기를 가지고
부엌에서 나오신다. 외양간 구유도 돼지집 밥통도 이미 가득 채워져 있다.
배부른 소는 되새김질주이고 돼지는 코를 골고 있다.
구정물통도 잘름잘름하다. 할머니가 샘가 도랑 옆에 선다.
트위스트 추듯이 뜨거운 물을 버릴까 말까 양팔을 흔드신다.
"훠어이 훠어이. 얼른 비켜라, 뜨건 물 나가신다."
도랑 속 작은 생명들이 다칠까봐 헛손질로 위험 경고를 하신 것이다.
푹푹 찌는 보리밭 두둑,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작대기로 알지게를 두드리며
누런 보리 이삭에도 대고 소리치신다.
"내일 보리 벤다. 참말이여. 내일 새벽부터 보리 베니깐 서둘러라, 잉!"
보리밭에 깃들어 사는 들쥐며 두꺼비며 개구리며 뱀이며 각종 벌레며 새들에게
이사가라는 거다. 밤사이 좋은 곳으로 떠나 새 보금자리를 잡으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거룩한 풍인가.
속이 다 비치는 삼베옷에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린 거지꼴이었지만
그 안에 하느님이 고이 깃들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사람이 이리도 아름다운 것이다.
지겟다리에서 튕겨나가는 작대기 부딪는 소리,
군살 하나 없는 저 소리야말로 우주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 환경보호도 자연사랑도 인간존중도 거기까지만 가자.
거기 작은 옛마을로 가자. 뜨거운 구정물이 멈칫멈칫 흘러가던 그 자리.
보리밭을 굽어보던 불콰한 서녘 하늘.
그 아래로 가서 도란도란 감자 구워 먹으며,
잘 왔다고 서로 젖은 눈으로 별빛이나 우러르자.』
《詩人 이정록의 산문집 '시인의 서랍'中에서》
그래, 여기까지만 / 그래, 그렇게만...
(2012년 4월 28일 섬진강변, 봄과 여름의 길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