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다는 것에 대하여

[리뷰]샤넬과 스트라빈스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ㆍ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본 예술과 불륜의 경계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초반 20분은 20세기 전반 예술계 최대의 스캔들 혹은 혁명이 벌어진 장소로 관객을 안내한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이 초연된 1913년 파리 샹젤리제 극장. 지휘자는 “멜로디는 잊고 리듬을 타. 차이코프스키, 바그너, 스트라우스는 잊어. 전에 들은 음악은 다 지워버려”라고 악단을 독려하지만, 광폭한 불협화음과 기괴한 춤사위에 놀란 ‘점잖은’ 관객들은 공연 시작 3분도 안돼 야유를 보내며 퇴장한다. 기대에 차있던 러시아 출신 망명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와 그의 아내는 절망한다.

그러나 난장판이 된 객석에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무대를 지켜보던 한 여성이 있다. 최고의 디자이너이자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코코 샤넬. 음악 천재를 알아본 패션 천재는 가난한 스트라빈스키 가족에게 자신의 저택에 머물 것을 제안한다. 자존심 강한 스트라빈스키는 샤넬의 제안을 일단 거절해보지만, 아내와 네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망명객에게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둘은 열정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다. 작업할 때도 머리 한 올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넥타이를 매고 조끼를 입은 스트라빈스키는 작지만 당당한 샤넬 앞에서 서둘러 옷을 벗는다. 관습, 전통, 타인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았던 샤넬인지라 한집에 사는 스트라빈스키 부인에 대한 죄책감은 전혀 없다.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이야기는 천상의 사랑 유희지만, 이 놀이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건 지상의 스트라빈스키 부인이다. 샤넬 핸드백 하나 사기 벅찬 대다수의 관객이 공감할 인물은 남편의 피아노 소리가 그치는 순간 벌어지는 일을 고통스럽게 상상해야 하는 스트라빈스키 부인이다.

어찌 보면 통속적이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네덜란드 출신 얀 쿠넹 감독은 놀랄 만큼 건조하게 그려냈다. 잡스러운 원색 없이 흑과 백으로만 꾸며진 샤넬의 드레스처럼, 감정은 간결하게 처리됐다. 뺨을 후려치듯 갑작스러운 엔딩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일거에 정리하는데,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고 나면 이 찌꺼기들이 다시 표면으로 떠오른다.

울고 불고 떼쓰는 사람보다 차갑게 이죽거리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 한국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프랑스 배우 안나 무글라리스(샤넬 역)와 덴마크 배우 매드 미켈슨(스트라빈스키 역)은 이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멜로드라마를 웃음기나 눈물기 없이 연기하는데, 그 효과가 대단하다. 25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