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7월 04일(월) 00:00
요즘 들어 부쩍 지리산의 빈집을 구해달라는 전화를 자주 받는다. 마땅한 집이 없어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21세기 문명사적인 ‘터닝 포인트’요, 아름다운 일이다. ‘녹색성장’이나 ‘4대강 살리기’ 혹은 ‘서민중심’이라는 항간의 독점적 언어 폭력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많은 사람이 꿈꾸는 생태적인 삶과 귀농·귀촌·귀향이 다 옳은 것만도 아니다. 굳이 지적하자면, 귀농·귀촌을 꿈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선 멋진 집을 짓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먼저 풍수지리를 공부하게 되고, 마을에서 적당히 떨어진 자연풍광이 뛰어난 곳에 땅을 사고 포클레인으로 터를 만든 뒤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어한다. 생태건축의 양식이든 아니든 그 가상한 꿈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하지만 이런 발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모든 집이 그렇듯 막상 설계를 마치고 집을 짓게 되는 순간 애초의 계획보다 더 많은 비용(적어도 30% 이상)이 들게 된다. 말하자면 적응기간의 예비비가 그만큼 줄어드니 차라리 도시에서의 순응적 불안감보다 더 심한 고통과 마주치게 된다.
몇 개월 지나고 보면 귀농생활의 수입이란 것이 실제로는 월 몇만 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자신이 산 땅값마저 지역 주민의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 행여 다시 되팔려 해도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돈 많은 도시인 혹은 또 다른 귀촌을 꿈꾸는 이들에게 되팔 수밖에 없으니 이 또한 ‘암묵적인 사기(?)의 카르텔’ 형성에 동조하게 됨으로써 남모를 죄의식에 휩싸이게 되고, 남은 예비비는 곶감 빼먹듯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압박감이 뒷골을 엄습해 온다.
문제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돌아갈 수도 없는 헛꿈을 꾼 것이다. 영화 속에서나 본 듯한 혹은 이미 정착에 성공한 몇몇 지인들의 모습을 보고 나름대로 생태적인 설계를 했으나 이 또한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한 발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동시에 소위 ‘녹색성장’이라는 두 얼굴의 행태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는 궁여지책이거나 속도전적인 패착이 아닐 수 없다.
지리산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거의 모든 바닷가와 산중과 강변에는 이렇게 수많은 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겉만 보면 참으로 멋진 집이지만 사람의 마을과는 단절된 사유재산적 공간에 불과해 결과적으로는 공동체 혹은 생태계 파괴에 동조한 셈이 되는 것이다.
막상 살다가 깨닫게 되는 문제는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애초에 터를 잡을 때 풍수지리의 반만 보았던 것이다. 지수화풍을 다 읽은 게 아니라 대개는 바람을 모르고 물을 모르고 오로지 경치만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뭄이 들거나 태풍·폭우·폭설 등 조금의 기상이변이라도 생기면 그때야 ‘왜 이 땅에 애초부터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는지’ 뒤늦게 알게 된다. 목욕이나 수세식 화장실 이용은커녕 당장 식수가 끊기거나 외딴섬처럼 고립되는 정도를 넘어 거센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거나 산사태로 축대가 무너지는 등의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머리로는 느림의 미학을 꿈꾸었으나 그 모든 게 너무 빨라서 자초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적응 과정을 뼈아프게 거치고 나면 비로소 천천히 자연의 한 몸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때로는 빠른 것이 오히려 늦은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말이다.
만약 똑 같은 조건으로 귀농한다면 전혀 다른 방법도 있다. 우선 자신이 살고 싶은 마을의 빈집을 구하고 그 마을 주민으로서의 적응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지혜와 공동체적인 마인드를 갖추며 최소한 사계절을 살아본 뒤에 집지을 땅을 사더라도 절대 늦지 않다.
왜냐면 마침내 주민들의 시세에 맞게 살 수 있다는 경제적 비용 문제뿐만 아니라 집터에 대한 풍수지리적 이해가 두루 갖춰지기 때문이다. 될 수 있으면 이미 수백 년간의 검증이 끝난 빈집을 취향에 맞게 고쳐서 사는 게 훨씬 더 생태적인 일이지만, 굳이 새로이 집을 짓겠다면 말이다.
자연 속에 집 한 채를 짓는 일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녹색성장’의 주동력이라는 ‘4대강 살리기’로 대변되는 한반도 유사 이래 가장 위험한 ‘역천(逆天)의 삽질’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 무지막지함에 눈앞이 캄캄하다.
〈이원규 시인·지리산학교 대표교사〉
그러나 돌이켜보면 많은 사람이 꿈꾸는 생태적인 삶과 귀농·귀촌·귀향이 다 옳은 것만도 아니다. 굳이 지적하자면, 귀농·귀촌을 꿈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선 멋진 집을 짓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이다.
먼저 풍수지리를 공부하게 되고, 마을에서 적당히 떨어진 자연풍광이 뛰어난 곳에 땅을 사고 포클레인으로 터를 만든 뒤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어한다. 생태건축의 양식이든 아니든 그 가상한 꿈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하지만 이런 발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얼마 지나지 않아 엄청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모든 집이 그렇듯 막상 설계를 마치고 집을 짓게 되는 순간 애초의 계획보다 더 많은 비용(적어도 30% 이상)이 들게 된다. 말하자면 적응기간의 예비비가 그만큼 줄어드니 차라리 도시에서의 순응적 불안감보다 더 심한 고통과 마주치게 된다.
몇 개월 지나고 보면 귀농생활의 수입이란 것이 실제로는 월 몇만 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자신이 산 땅값마저 지역 주민의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 행여 다시 되팔려 해도 엄청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돈 많은 도시인 혹은 또 다른 귀촌을 꿈꾸는 이들에게 되팔 수밖에 없으니 이 또한 ‘암묵적인 사기(?)의 카르텔’ 형성에 동조하게 됨으로써 남모를 죄의식에 휩싸이게 되고, 남은 예비비는 곶감 빼먹듯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압박감이 뒷골을 엄습해 온다.
문제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돌아갈 수도 없는 헛꿈을 꾼 것이다. 영화 속에서나 본 듯한 혹은 이미 정착에 성공한 몇몇 지인들의 모습을 보고 나름대로 생태적인 설계를 했으나 이 또한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 한 발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동시에 소위 ‘녹색성장’이라는 두 얼굴의 행태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는 궁여지책이거나 속도전적인 패착이 아닐 수 없다.
지리산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거의 모든 바닷가와 산중과 강변에는 이렇게 수많은 집들이 들어서고 있다. 겉만 보면 참으로 멋진 집이지만 사람의 마을과는 단절된 사유재산적 공간에 불과해 결과적으로는 공동체 혹은 생태계 파괴에 동조한 셈이 되는 것이다.
막상 살다가 깨닫게 되는 문제는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애초에 터를 잡을 때 풍수지리의 반만 보았던 것이다. 지수화풍을 다 읽은 게 아니라 대개는 바람을 모르고 물을 모르고 오로지 경치만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뭄이 들거나 태풍·폭우·폭설 등 조금의 기상이변이라도 생기면 그때야 ‘왜 이 땅에 애초부터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는지’ 뒤늦게 알게 된다. 목욕이나 수세식 화장실 이용은커녕 당장 식수가 끊기거나 외딴섬처럼 고립되는 정도를 넘어 거센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거나 산사태로 축대가 무너지는 등의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머리로는 느림의 미학을 꿈꾸었으나 그 모든 게 너무 빨라서 자초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적응 과정을 뼈아프게 거치고 나면 비로소 천천히 자연의 한 몸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때로는 빠른 것이 오히려 늦은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말이다.
만약 똑 같은 조건으로 귀농한다면 전혀 다른 방법도 있다. 우선 자신이 살고 싶은 마을의 빈집을 구하고 그 마을 주민으로서의 적응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지혜와 공동체적인 마인드를 갖추며 최소한 사계절을 살아본 뒤에 집지을 땅을 사더라도 절대 늦지 않다.
왜냐면 마침내 주민들의 시세에 맞게 살 수 있다는 경제적 비용 문제뿐만 아니라 집터에 대한 풍수지리적 이해가 두루 갖춰지기 때문이다. 될 수 있으면 이미 수백 년간의 검증이 끝난 빈집을 취향에 맞게 고쳐서 사는 게 훨씬 더 생태적인 일이지만, 굳이 새로이 집을 짓겠다면 말이다.
자연 속에 집 한 채를 짓는 일이 이러할진대 하물며 ‘녹색성장’의 주동력이라는 ‘4대강 살리기’로 대변되는 한반도 유사 이래 가장 위험한 ‘역천(逆天)의 삽질’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 무지막지함에 눈앞이 캄캄하다.
〈이원규 시인·지리산학교 대표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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