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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에 대하여

[광주일보 월요광장]‘늦봄의 미학’ 배롱나무

2011년 05월 09일(월) 00:00


봄꽃에 취해 몸과 마음- 뫔이 덩달아 달뜨다 보니 어느새 ‘봄날은 간다’ 오뉴월이다.

봄날 아침 퍼뜩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배롱나무였다. 백일홍이라 부르는 이 나무는 덩달아 달뜬 나에게 진정제 같은 것이었다. 매화꽃이며 진달래꽃이 여전히 ‘미완의 혁명’으로 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일종의 각성제 같은 것이었다.

벚꽃 축제가 끝난 뒤 분분히 꽃잎이 지고 잎이 나고 ‘진달래 산천’이 되어도 백일홍 나무는 묵묵부답이었다. 봄꽃들의 잔치가 끝난 뒤에야 밤나무며 모과나무가 슬슬 연초록의 여린 입술을 내미는데도 이 나무만은 마치 죽은 듯이 동면의 겨울나무로 서있었다.

맨살의 온몸으로 혹독한 겨울을 났지만 봄이 와도 아직은 봄이 아닌 ‘춘래불사춘’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봄에 가장 늦게 잎을 내밀지만 여름 한낮의 뙤약볕 아래 백일 동안 꽃을 뿜어내는 그 저력, 이것이야말로 마치 독학의 만학도처럼 함부로 휘둘리지 않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결기가 아닐까. 전설이 참으로 슬픈 백일홍 나무 아래 서서야 시인이자 통일운동가였던 문익환 목사가 스스로 호를 ‘늦봄’이라 지은 것을 알 것도 같다.

뭔가 환하지만 ‘잔인한 사월’을 묵묵히 응시하며, 마침내 백일 동안 꽃을 피우는 저력이야말로 화르르 꽃을 피우고 지는 저 봄꽃들의 청출어람이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백일홍은 일순간 미완의 혁명이 아니라 끊임없이 개혁의 완성을 꿈꾸는 꽃이다. 화려한 작심삼일이 아니라 담배를 끊어도 석 달 열흘은 끊어야 그 가능성이 보이고, 기도를 해도 백일기도는 해야 뭔가 깨닫지 않겠는가.

백일홍 나무 아래 서서 민족시인 신동엽 선생을 생각한다. 김수영 시인을 떠올린다. ‘4월은 갈아엎는 달’이라고 명명했던 신동엽 시인의 유작들과 김수영 시인의 ‘풀’을 읊조려 본다. 두 시인 모두 불운하게도 나이 마흔의 경계에서 봄꽃처럼 화르르 죽어갔지만, 그들의 정신은 백일홍의 끈질긴 결기를 닮아있다. 특히 신동엽 시인의 산문 ‘서둘고 싶지 않다’를 읽어보면 더욱 그러하다.

지금도 이 산문의 끝 부분은 지난 시절 혁명을 꿈꾸었지만 ‘아직 변절하지 않은 다수의 386 세대’에게는 일생의 좌표 같은 것이 아닌지. 신동엽 시인의 고향인 부여에서 열린 ‘신동엽 문학의 밤’ 행사에서 나는 굳이 이 산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내 일생을 시로 장식해 봤으면./ 내 일생을 사랑으로 장식해 봤으면./ 내 일생을 혁명으로 장식해 봤으면./ 세월은 흐른다.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

그렇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겠지만 서두르기만 해서 잘 될 일은 없다. 향기도 없이 화사하게 피었다가 화르르 지고 마는 벚꽃도 아름답기야 하지만, 그것만을 꿈꾼다면 일종의 도박이 아니겠는가. 화사한 벚꽃 나무 아래서 봄을 만끽하다가도 문득 묵묵부답의 백일홍 나무 아래 서보는 것, 바로 그곳에 진정한 봄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문단을 둘러보아도 그리 다르지 않다. 뛰어난 문재(文才)들이 안타깝게도 일찍 꽃을 피웠다가 화르르 지는 일장춘몽의 벚꽃이 되기도 하고, 백일홍처럼 늦게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지만 화무십일홍을 넘어 오래오래 명작의 꽃을 피우기도 한다. 백일홍 나무가 온몸으로 우리 모두에게 던져주는 화두는 단순하지만 이처럼 깊고도 깊다.

일명 간지럼나무라 부르기도 하는데, 잎과 꽃이 무성한 이 나무의 밑동을 손가락으로 간질이면 가지 끝의 이파리들이 파르르 떨기 때문이다. 묵묵부답의 나무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나무 중에서 가장 예민한 나무인 것이다. 스스로 욕망의 짐을 벗어버리듯 나무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며 언제나 맨살의 알몸으로 서서 세상과의 교신, 그 예감이라는 안테나의 주파수를 조절하고 있는 것이다.

둘러보면 곳곳에 마치 죽은 듯이 죽은 듯이 제일 늦게 봄을 맞이하는 나무가 있다. 서두르지 않고 온몸의 세포들을 일깨우며 때를 기다리는 결기의 배롱나무가 서 있다.

/이원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