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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에 대하여

[광주일보 월요광장]고향의 슬픈 세계화

2011년 06월 06일(월) 00:00
우리 시대의 농촌은 이제 더 이상 고향이 아니다. 고향의 사전적 의미는 ‘태어나서 자란 곳’ 혹은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아온 곳’이니, 말 그대로 농경사회였던 우리의 고향은 대개 농촌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서의 농촌은 급격하게 붕괴되고 말았다.

눈빛과 피부색이 다른 이국의 여인들과 그의 2세들이 장터에 나와 국밥을 먹는다. 가난의 대물림이 국경을 넘어 우리 고향의 빈자리를 소외와 반인권으로 메우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러는 사이 황구나 똥개는 애완견들로 대체됐다. 도시의 자식들이 키우다가 늙고 병들자 고향으로 보내온 애완견들이 마을 마을을 누비고 다닌다. 고향의 부모님들이 국적도 알 수 없는 불우한 애완견들의 보모이자 호스피스가 된 것이다.

WTO니 FTA 문제 등으로 농촌과 농업은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극단적인 위기의식의 한 현상일 뿐 사실 그 이전에 이미 농촌과 농업은 회복 불능의 빈사 상태에 놓여있었다. 도대체 당대에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농가 부채문제가 그러하고, 1년에 어린 아이가 단 한 명도 태어나지 않는 ‘유령의 마을’이 확산되다보니 면 단위마다 ‘하나의 초등학교’, ‘하나의 중학교’마저 폐교될 정도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는 사이 농촌문제의 해결은커녕 부채만 늘어나고, 급기야 유권자 수에 있어서도 열세에 몰리다보니 정치적으로도 소외되고 말았다. 정치적인 소외는 결국 경제적인 공황상태를 불러왔으며, 절망적인 농촌사회의 문화적 병리현상 또한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다.

읍내에 나가보면 온통 소비향락적인 것들이 판을 친다. 어느새 ‘문화는 곧 소비와 향락’이라는 잘못된 등식이 도시보다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특히 결혼 적령기 남녀 성의 불균형 또한 심각하다보니 건실한 농촌 총각들에게도 이는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농촌이 갈수록 ‘유령의 마을’로 변해가는 이유는 결국 젊은 여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총각들 중에는 가업을 이어 농촌에 뿌리를 내리려 하지만, 젊은 여성들은 도대체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보기 힘들다.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모두들 떠나고 한번 떠나면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농촌 총각들은 결혼은 고사하고 예전처럼 변변한 연애 한번 할 수 없으며, 결국 읍내의 밤거리를 절망적인 포즈로 기웃거릴 수밖에 없다.

급기야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텅 비어버린 농촌에 외국인 여성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국제결혼’이란 이름으로 농촌의 세계화가 시작된 것이다. 농산물의 세계화 바람이 제대로 불기도 전에 농촌과 농민의 ‘슬픈 세계화’가 먼저 시작된 것이다.

민족주의나 순혈주의를 주창할 생각은 없지만, 이는 참으로 불행하고도 슬픈 문화적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민족이나 국경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사랑이 아니라 결혼을 위한 결혼으로서 노동력과 성적 파트너 혹은 어떻게 해서든 대를 이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농촌 총각의 4분의 1이 국제결혼을 한다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의 여성들이거나 통일교 등 종교 문제 때문에 외국인 여성들이 한국의 농촌을 찾는 것이다. 문제는 순혈주의를 미덕으로 삼아온 농촌의 유교적 정서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 신부- 후불제 가능’이라는 어느 농촌의 현수막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라 ‘경제적 노예-성적 파트너’를 돈을 지불하고 구매(?)한다는 데 있다.

그러다보니 농촌 총각의 ‘억지 결혼’은 결국 외국인 여성들의 인권문제와 코시안 등 혼혈 2세의 소외 문제를 심각하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뒤늦게나마 다양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지만 이는 농촌 총각이나 자치단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 전체의 문제다.

사단은 이미 벌어지고 또 지금도 벌어지고 있으니 우선 인종차별과 다문화가정에 대한 우리 사회의 깊은 편견을 수정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어쩌다 우리의 농촌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부터 해야 한다.

우리 모두의 진정한 고향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21세기 ‘슬픈 세계화’의 고향 풍경이 가슴을 친다.

/이원규 시인·지리산학교 교사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