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8월 01일(월) 00:00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만든 ‘지리산학교’가 어느새 7기 종강을 하고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 지리산학교를 벤치마킹한 한라산학교가 2년 전에 만들어졌고, 경남 울주군에선 백무산 시인과 김수환씨 등이 ‘소호마을문화학교’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최근 지리산권의 ‘구례 지리산사랑학교’와 ‘지리산학교 남원·함양’이 개교 준비를 하고 있다.
아직 광주의 무등산학교 소식은 들리지 않지만,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리산학교를 모태로 한 파급효과가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독립적인 형태로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지리산학교는 여전히 실험 중이었지만, 지난 3년 동안 성과에 비해 실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다소 부끄럽고 낯간지러운 것도 사실이다. 박남준 시인과 사진작가 이창수씨와 내가 차를 마시다 문득 제안하고 합의한 것이 큰 사고(?)를 친 것이다. 나의 아내이자 지리산학교 교무처장으로 일한 ‘고알피엠 여사’ 신희지씨가 부산의 ‘사진집단 일우’의 김홍희 작가에게 사진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한 것이 학교 탄생의 단초가 됐다.
“부산까지 가서 사진을 배운다고? 여기 지리산엔 사진작가가 없나, 시인이 없나? 이제 때가 온 것 같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지역이 세상의 중심이니 문화의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되자. 우리도 예술대학 하나 만들자. 총장은 도대체 느려터진 박남준 형이 하고…”
사실 이렇게 우습게 시작된 지리산학교가 지금은 문화예술 각 분야의 강사 12명과 학생이 100여명 정도인 명실상부한 학교가 되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된 듯하지만 이미 지리산엔 귀농학교와 대안학교, 그리고 녹색대학 등의 실험이 10여년 정도 이어지는 등 ‘지리산의 때가 무르익다보니’ 밑그림도 쉽게 그려졌다.
돈 없이 만들 것, 현실 생활에 활용되는 생활밀착형 예술을 가르칠 것, 교실은 각자의 공간을 활용할 것, 등록비는 최소화 할 것, 강사료는 재능 기부에 부응하는 정도만 받을 것, 장소는 일단 하동군 악양면이라는 면단위를 중심으로 만들되 지리산 전체가 교실일 것, 학생 모집은 지리산권 주민을 중심으로 하되 인접도시까지 포함할 것, 학벌이나 연령 제한은 두지 않을 것 등이었다.
1주일에 한번 강의하되 학생들과 수업시간을 조율하고, 학생이 많으면 교육의 질이 떨어지니 한 반에 10명 이상을 뽑지 않기로 했으며, 한 달에 한번 전체 모임의 날은 물물교환 장터와 공개특강을 열어 학생과 강사,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함께하고, 학교의 모든 운영은 강사들과 학생대표의 모임인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되 전통적 화백회의 수준으로 되도록이면 만장일치를 보기로 했다.
지리산학교는 애초 합의대로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 운영위에서 쉽게 합의되지 않는 것들은 일단 보류해왔다. 언제나 천천히 내실을 기하는 것이 우선이니 뭐 그리 급할 게 있겠는가. 그리고 지리산학교의 특장 중 하나는 누구나 선생이자 제자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시를 가르치는 강사는 천연염색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학생들 중에서 농사 등의 전문가는 제자이자 곧 강사들의 선생이 되는 것이다. 수직적 구조는 자연스레 무너지고 수평적 구조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학교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 제안된 ‘지리산문화예술대학’은 ‘지리산학교’로 소박하게 바뀌었고, 총장은 교장으로, 교장은 다시 교사대표로 자연스럽게 반권위적으로 귀결되었다. 그리하여 교사대표는 강사들이 돌아가면서 일시적으로 맡는 상징성일 뿐 아무런 권한이나 결정권이 없게 되었다. 비로소 민주적인 원탁회의가 완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 또한 최근 교사대표직을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사대표가 훨씬 더 명예로운 일이며 좀 더 느리더라도 공평무사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최근 지리산학교는 내홍을 겪었다. 모든 결정권을 가진 운영회의는 때로 지리산학교라는 대의와 공통분모를 지향하기보다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등 밑바닥을 치기도 했다. 모두들 알게 모르게 독배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플 때는 아파야 한다. 안 아픈 척 하는 것도 거짓이다. ‘앉은 자리가 곧 학교’이자 ‘움직이는 학교’의 훈풍이 전국으로 번지는 시점에서 ‘첫마음’을 되살리며 성찰과 반성의 계기로 삼는다면 베이스캠프로서의 ‘쓴 약’이 될 것이다.
이제 모두 독배를 내려놓고 다시 한 번 너무나 ‘아름다운’ 학교로 거듭날 때가 되었다. 선의의 경쟁상대인 한라산학교, 울주군 소호마을문화학교, 지리산권의 또 다른 지리산학교와 더불어 축제를 열거나 서로 수학여행 가는 날들이 눈앞에 선하다.
〈이원규 시인·지리산학교 대표교사〉
아직 광주의 무등산학교 소식은 들리지 않지만,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리산학교를 모태로 한 파급효과가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독립적인 형태로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지리산학교는 여전히 실험 중이었지만, 지난 3년 동안 성과에 비해 실로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러다보니 다소 부끄럽고 낯간지러운 것도 사실이다. 박남준 시인과 사진작가 이창수씨와 내가 차를 마시다 문득 제안하고 합의한 것이 큰 사고(?)를 친 것이다. 나의 아내이자 지리산학교 교무처장으로 일한 ‘고알피엠 여사’ 신희지씨가 부산의 ‘사진집단 일우’의 김홍희 작가에게 사진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한 것이 학교 탄생의 단초가 됐다.
“부산까지 가서 사진을 배운다고? 여기 지리산엔 사진작가가 없나, 시인이 없나? 이제 때가 온 것 같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지역이 세상의 중심이니 문화의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되자. 우리도 예술대학 하나 만들자. 총장은 도대체 느려터진 박남준 형이 하고…”
사실 이렇게 우습게 시작된 지리산학교가 지금은 문화예술 각 분야의 강사 12명과 학생이 100여명 정도인 명실상부한 학교가 되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된 듯하지만 이미 지리산엔 귀농학교와 대안학교, 그리고 녹색대학 등의 실험이 10여년 정도 이어지는 등 ‘지리산의 때가 무르익다보니’ 밑그림도 쉽게 그려졌다.
돈 없이 만들 것, 현실 생활에 활용되는 생활밀착형 예술을 가르칠 것, 교실은 각자의 공간을 활용할 것, 등록비는 최소화 할 것, 강사료는 재능 기부에 부응하는 정도만 받을 것, 장소는 일단 하동군 악양면이라는 면단위를 중심으로 만들되 지리산 전체가 교실일 것, 학생 모집은 지리산권 주민을 중심으로 하되 인접도시까지 포함할 것, 학벌이나 연령 제한은 두지 않을 것 등이었다.
1주일에 한번 강의하되 학생들과 수업시간을 조율하고, 학생이 많으면 교육의 질이 떨어지니 한 반에 10명 이상을 뽑지 않기로 했으며, 한 달에 한번 전체 모임의 날은 물물교환 장터와 공개특강을 열어 학생과 강사,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함께하고, 학교의 모든 운영은 강사들과 학생대표의 모임인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되 전통적 화백회의 수준으로 되도록이면 만장일치를 보기로 했다.
지리산학교는 애초 합의대로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 운영위에서 쉽게 합의되지 않는 것들은 일단 보류해왔다. 언제나 천천히 내실을 기하는 것이 우선이니 뭐 그리 급할 게 있겠는가. 그리고 지리산학교의 특장 중 하나는 누구나 선생이자 제자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시를 가르치는 강사는 천연염색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학생들 중에서 농사 등의 전문가는 제자이자 곧 강사들의 선생이 되는 것이다. 수직적 구조는 자연스레 무너지고 수평적 구조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학교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 제안된 ‘지리산문화예술대학’은 ‘지리산학교’로 소박하게 바뀌었고, 총장은 교장으로, 교장은 다시 교사대표로 자연스럽게 반권위적으로 귀결되었다. 그리하여 교사대표는 강사들이 돌아가면서 일시적으로 맡는 상징성일 뿐 아무런 권한이나 결정권이 없게 되었다. 비로소 민주적인 원탁회의가 완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 또한 최근 교사대표직을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사대표가 훨씬 더 명예로운 일이며 좀 더 느리더라도 공평무사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최근 지리산학교는 내홍을 겪었다. 모든 결정권을 가진 운영회의는 때로 지리산학교라는 대의와 공통분모를 지향하기보다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등 밑바닥을 치기도 했다. 모두들 알게 모르게 독배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플 때는 아파야 한다. 안 아픈 척 하는 것도 거짓이다. ‘앉은 자리가 곧 학교’이자 ‘움직이는 학교’의 훈풍이 전국으로 번지는 시점에서 ‘첫마음’을 되살리며 성찰과 반성의 계기로 삼는다면 베이스캠프로서의 ‘쓴 약’이 될 것이다.
이제 모두 독배를 내려놓고 다시 한 번 너무나 ‘아름다운’ 학교로 거듭날 때가 되었다. 선의의 경쟁상대인 한라산학교, 울주군 소호마을문화학교, 지리산권의 또 다른 지리산학교와 더불어 축제를 열거나 서로 수학여행 가는 날들이 눈앞에 선하다.
〈이원규 시인·지리산학교 대표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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