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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에 대하여

[광주일보 월요광장]만화방창에 토종벌들 어디 갔나

2011년 04월 11일(월) 00:00
섬진강변은 지금 말 그대로 만화방창이다. 꽃샘 추위 속에 매화며 산수유 꽃이 피어나더니 순식간에 개나리·물앵두·진달래와 더불어 길가의 벚꽃들이 팝콘 터지듯 환하게 피어나고 있다. 섬진강 양안을 따라 하동에서 구례까지 19번 국도가 그러하고, 망덕포구에서 사성암 아래 동해마을까지 861번 지방도가 그러하다. 꽃과 사람과 차량이 서로 어울려 한바탕 봄날의 활기를 찾고 있다.

바야흐로 봄은 봄이니 저 꽃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쌀밥이다. 저 꽃들마저 없다면 대체 무슨 ‘정신의 흰밥’으로 또 하루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화무십일홍이라 열흘 붉은 꽃은 없다지만, 아주 잠깐일지라도 삶의 저 환한 꽃길이 있어 슬그머니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걷기도 하고, 속 깊은 맹세도 하고, 때로는 뼈아픈 참회와 슬픈 추억도 되새길 것이다.

그러나 휘휘 세상을 둘러보면 온 나라가 역주행과 역천(逆天)의 불길한 기운에 휩싸여 있고, 일본의 방사능 유출 때문에 어머니의 젖 같은 생명의 봄비마저 오히려 우환(雨患)이 되고 말았다. 남북은 여전히 전쟁 불사의 도끼눈을 뜨고 있고, 국민은 하루하루 생존 위기의 벼랑길을 지나고 있다.

청와대에는 대통령의 귀가 없고, 국회의사당에는 국회의원의 눈이 없고, 공무원들에게는 따스한 손길이 없다. 춘래불사춘이라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번 봄에는 유난히 무섭고도 불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도 때가 왔다고 온갖 꽃들이 피는데 꿀벌들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처음 매화가 필 무렵에는 그래도 꽃샘 추위 때문이거니 했다. 그런데 매실꽃밭에서 만난 어느 할아버지가 “이상혀, 벌 한 마리 안 보여. 작년엔 냉해 때문에 허탕이었는데 올해는 벌마저 안 오니 참말로 불안혀. 난생 처음이여” 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보니 사진기를 들이대고 아무리 헤매어도 매화꽃에 날아드는 벌 한 마리 찍을 수 없었다. 이따금 꿀벌인가 싶어 가까이 줌으로 찍어보면 벌 비슷한 것들이었다.

조금 날씨가 풀리고 벚꽃이 피기 일주일 전에 우리 집 물앵두꽃이 하얗게 피었는데 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열 마리 정도의 꿀벌들이 날아와 꽃무리 속을 날아다녔다. 지난해에는 꽃송이만큼이나 많은 벌들이 날아다니던 것을 생각하면 수백 분의 일도 안 되는 마릿수였지만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지난해 ‘벌의 에이즈’ 혹은 ‘토종벌 괴질’로 불리는 낭충봉아부패병이 크게 확산되면서 토종벌의 90% 이상이 폐사했기 때문이다. “만약 꿀벌이 사라진다면 인류는 4년 안에 멸망할 것”이라는 아인슈타인의 경고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지구 전체 식물의 3분의 1이 벌의 도움으로 수분하기 때문에 인류는 식량 고갈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토종벌 농가들은 “토종벌 1통 가격이 기존의 5배인 50만 원으로 올랐다. 종벌 구입도 포기해야 할 판”이라며 아우성이다.

그런데 문제는 토종벌 농가들뿐만이 아니라 개화시기의 과수농가에까지 비상이 걸린 것이다. 나주의 한 농민은 “인공수분에 1000만 원 안팎의 ‘쌩돈’이 들어간다.

며칠 전 중국산 꽃가루 1㎏당 200만 원 넘게 주고 사놨는데 불량일 수도 있어 걱정이 태산 같다”고 말했다. 농민들이 자연의 일, 꿀벌의 노동력까지 떠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부는 낭충봉아부패병에 대한 원인마저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뚜렷한 대책이나 보상 등 문제해결에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이 문제는 토종벌·과수농가의 피해를 넘어서는 지구적 생존의 문제다. 그토록 안전하며 경제적이라던 핵에너지 산업의 폐해가 지구 전체에 공포를 불러온 인재라면, 꿀벌의 멸종위기 또한 일시적인 자연재해가 아니라 산업화 이후 난개발 등 반자연적인 삶의 방식이 불러온 인재가 아닐 수 없다. ‘4대강 사업’ 등 그 대표적인 예다.

문득 궁금해졌다. 벌 한 마리가 하루 종일 날아다니며 꽃가루를 수정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꿀을 훔쳐 먹는 탐욕의 일’이 아니라 ‘꽃가루를 수정시키는 생명의 일’을 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모두 죽어가고 모두가 아픈데 실은 아무도 아프지 않은, 통증마저 못 느끼는 ‘무통(無痛)의 시대’가 너무나 슬프다.

/이원규 시인·지리산학교 교사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