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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에 대하여

[낮은 목소리로]내 인생의 반려 농기계

강광석 | 전농 강진군 정책실장 suam585@hanmail.net

오랜 세월 자신의 옆자리를 지켜준 사람을 인생의 반려자라 합니다. 노래 가사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변함없이 지켜주는 사람입니다. 요즘은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고양이나 개, 심지어 뱀이나 이구아나까지 사람과 한방에서 생활합니다. 애완동물이라는 개념과는 약간 다른 개념인 것 같습니다. 장난감처럼 소일거리로 데리고 노는 대상이 아니고 ‘삶을 나눈다’라는 개념으로 발전했습니다.

삶을 나눈다는 건 생사고락을 같이한다는 뜻일 테지요. 그런 의미라면 반려식물도 있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타고 놀던 정원의 소나무, 아이가 태어났을 때 하나씩 심은 백일홍(배롱나무)은 집안 식구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평생 그 자리를 지켜 왔겠지요. 30년 전에 구입한 소니 라디오를 지금도 끄떡없이 듣는 동네 어른이 계십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의 열광 팬이십니다. 30년이 지난 몽블랑 만년필을 쓰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중요한 문서에 이름이나 쓸 때 한번씩 꺼내시는데 세월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이런 물건이나 기계를 반려물건, 반려기계라 해도 좋겠습니다.

GT451D는 트랙터입니다. 1995년에 태어났습니다. 금색깔 왕관 마크가 선명한 골드스타 제품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금성이라는 회사를 잘 모르겠지만 농기계회사 LS의 전신입니다. 그러니까 앞에 나온 GT는 골드스타 트랙터의 앞자리 영어를 줄여서 쓴 것이지요. 숫자 451은 성능과 제품 번호입니다. 앞의 45는 말 45마리가 순식간에 힘을 쓸 때 나온다는 마력수이고 뒤의 1은 GT 45마력 기종 중에서도 맨 먼저 나온 기계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D는 디젤엔진이라는 의미고요. 금성 트랙터 45마력 디젤엔진 기종은 제1형 제품 이후에는 출시되지 않았습니다.

요즘 기계는 45마력이라 하면 최대출력이 45마력인데, 옛날 기계는 기본이 45마력이고 조금 더 힘을 쓴다면 50마력을 넘겨버리는 숨겨둔 2%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GT(앞으로는 경태라고 부르겠습니다)는 밖으로는 45라고 짐짓 자신을 낮추지만 논수렁에 빠진 다른 기종 40마력짜리를 너끈히 건져 올리고도 약간 코로 씩씩거리는 정도로 수고로움을 표시하곤 마는 것입니다.

경태와의 만남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우스 작물을 짓던 형님이 농사를 못하게 되자 트랙터를 줬습니다. 그게 인연의 시작입니다. 원래 하우스에서 쓰던 트랙터라 뚜껑(탑)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한겨울에 작천에서 성전까지 찬바람 날리며 달려오는데 트랙터가 처음 생겼다는 기쁨에 추운지 몰랐습니다. 실은 아침에 트랙터를 가지러 갔는데 키가 없었습니다. 인근 농기계 가게에 갔더니 아무거나 집어 주면서 “웬만하면 맞을 것”이라 했습니다. 진짜 맞았습니다. 경태는 그런 놈입니다. 가리는 게 없고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스타트 모터를 돌려도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겁니다. 농기계 가게에 전화를 했습니다. 오전 11시가 되면 돌려보라는 무당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귀신같이 11시가 되어서야 시동이 걸렸습니다. 경태는 게으른 놈은 아니지만 추운 날씨에 무턱대고 일을 서두르는 놈도 아닙니다. 주인이 피곤하게 저녁까지 일할까봐 라이트도 없습니다. 냉각수 온도 계기판과 연료 계기판이 고장났습니다. 매일 직접 확인하라는 뜻이지요. 모든 것이 숫자로 표현되는 디지털시대에 오직 눈으로 보고 그것만 믿으라고 강조하는 경태는 실사구시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실학파 농기계임이 분명합니다.

10년 동안 자갈 다랑논을 수도 없이 갈았습니다. 당시 처음 가져왔던 로터리를 지금까지 쓰고 있습니다. 큰 기계가 들어가기 어려운 밭을 도맡아 갈았습니다. 해야 되는 일, 할 수 있는 일은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철따라 엔진오일을 갈아주는 일 말고는 해준 것이 없어도 경태는 묵묵히 10년을 성전면 영풍리 들판을 누벼왔습니다. 어른 키보다 큰 바퀴를 달고 달리는 100마력짜리 트랙터를 보고도 부러운 눈치 한 번 없이 자신이 타고난 역량만큼만 최선을 다해 감당해 왔습니다.

잔병치레가 없던 경태가 올해는 앓는 소리를 자주 합니다. 작년 가을에 산비탈 밭을 올라가다 옆으로 넘어진 일이 사달인 것 같습니다. 4륜구동 연결핀이 끊어졌고 클러치홈이 망가졌고 바퀴 베어링이 깨졌고 한 5일 병원에 갔다 왔습니다. 더 단단해졌길 바라지만 지금 경태 나이가 사람 나이로 팔순을 넘겼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인생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하다 <워낭소리>의 늙은 황소처럼 기억 속으로 사라지겠지요. 앞으로 딱 10년만 같이 있어 주길 바랍니다. GT451D는 주민번호이고 그의 진짜 이름은 강경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