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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에 대하여

[낮은 목소리로]봄 들녘, 애잔한 황혼

강광석 | 전농 강진군 정책실장

못자리를 하고 밭고랑을 만들었습니다. 고추를 심었고 논에 물을 잡아 어린모를 넣었습니다. 6월에는 모내기를 할 것이고 7월 초에는 빨갛게 익은 고추를 수확하겠지요. 춥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가 싶더니 들녘은 경운기 소리, 관리기 소리로 요란합니다.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습니다. 어른들은 봄이 지나야 비로소 한 살 더 먹은 노인들이 됩니다. 아주 느리게 나이를 드시지만 아주 확연히 작년과 다른 기운을 느낍니다. 지난밤,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는 이웃마을 아저씨의 소식에 ‘뭔 복으로 그런 복을 타고 났을까’ 이구동성으로 말하십니다. 편안하게 죽는 것은 모든 어른들의 염원입니다.

‘99882 삽시다!’ 어버이날 효도잔치에서 면장이 건배사로 외칩니다. 구십구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만 아프고 죽자는 것입니다. 구십구살까지 살자는 것도 좋고 팔팔하게 살자는 것은 더 좋은 일이지만 왜 하필이면 이틀만 아프고 죽자는 것인가 궁금했습니다. 하루만 아프다가, 자신도 모르게 꿈결처럼 영면하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리 아파도 이틀은 버텨야 한다는 것에 모든 어른들이 동의합니다. 도시에 나가 사는 자식들이 여기 시골까지 오기 위해 넉넉잡고 이틀은 걸리기 때문입니다. 부모 종면을 못하는 불효의 원한을 자식이 평생 짊어지고 살까봐 걱정하는 부모의 심정이 여기에 있습니다.

‘99882’ 건배사 속 자식사랑

마을에서 30년 동안 동네 논농사를 책임진 한 어른이 많이 아픕니다. 시골 나이 60대면 그야말로 ‘동네 청년’ 소리를 듣는 현실에서 몹쓸 병에 걸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동네 어르신 다섯 분이 밭고랑에 앉아 저마다 눈물 한 방울씩 떨어뜨립니다. 봄과 가을에 보리먼지, 나락먼지 다 뒤집어쓰고 콤바인을 몰았던 분의 폐암은 어쩌면 예고된 병이었습니다. 그 분 논에 보리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 동네 풍경 삼삼한 그 분이, 작년 갈아놓은 보리가 눈에 걸려 어떻게 병원에 누워 있을까 걱정하십니다. 성전면 영풍리의 한 시대, 현대 농업을 책임졌던 그 분의 시대가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더라도 들판에 이앙기와 콤바인을 몰고 다니는 모습을 보기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밭고랑에 삽으로 비닐을 씌우는 것은 고된 일입니다. 깨를 심고 솎는 일은 아낙들의 고된 노동입니다. 지금 밭고랑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이 5년 뒤, 10년 뒤 다 집안에 드러눕게 되면 정부가 구조조정하자고 날뛰지 않아도 고추와 깨와 콩과 팥은 농촌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빈 라덴이 죽었습니다. 생긴 것만 봐서 그런지 강기갑이 죽었다는 말을 하시는 어른께 더 젊은 어른이 ‘먼나라 강기갑’이 죽었다고 가르칩니다. ‘노인당 강기갑’이나 먼나라 강기갑이나 다 나이는 얼마 안 먹었다고 더 젊은 어른이 한 술 보탭니다. 강기갑이 수염을 깎으면 농촌 어르신들이 더 좋아한다고 ‘광석이 니가 말을 잘해라’ 지침을 주시는 어른께 또 다른 어른이 수염을 길러야 나이가 먹어 보이고 그래야 다른 국회의원들이 무서워할 것이니 괘념치 말라고 타이릅니다. 삽질은 계속됩니다. 밭고랑 대담은 깊어갑니다.

경북 문경에서 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어른이 예수처럼 죽었으나 진짜 예수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어른이 동네 어귀에 있는 작은 절에 올해도 인사차 등 몇 개는 달아야겠다고 다짐하자, 옆에 있는 어른이 돈으로 주면 알아서 달아준다고 가르칩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경찰은 관심이 많겠지만 참 별난 세상이라는 말씀 중간에 해는 무심히 서산에 걸려 있습니다.

소소함 묻어나는 ‘한 시대의 삶’

낮이 길어졌습니다. 일년 중 이때가 가장 힘든 철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실감합니다. 아침 6시에 일 나가 저녁 8시까지 들판을 누빕니다. 밥통에 전기 꽂을 힘만 있으면 며느리 신세지지 말아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고 이것을 동네 여론으로 성명서라도 발표할 기세입니다. 먼지를 털고 일어서는데 같이 일한 다섯 분이 다 혼자 사시는 분이라고, 과부부대라고 놀리자 한 분이 그러면 오늘 과부끼리 가서 팥죽이나 쑤어 같이 먹자고 제안합니다. 해가 잠시 어깨에 멘 삽에 걸리는가 싶더니 총총 어둠 속으로 걸어갑니다. 드라마 <웃어라 동해야>에 나오는 몇몇 여자들은 ‘천하 몹쓸년’들이 될 운명에 처해 있고, 아홉시 뉴스가 시작되면 저 분들은 하품을 하고 자리를 정리하게 될 것입니다. 시대는 사람으로 와서 사람으로 진다는 한 철학자의 말이 기억납니다. 저 분들이 와서 한 시대가 되었고, 저 분들이 가면 한 시대가 지겠지요. 누구도 저 분들의 시대를 대신하진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