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
ㆍ진짜 막장의 삶, 두려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함부로 쓰지 말아야겠다. 막장인생이라는 말. 사는 게 힘들다고, 일에 지친다고도 쉽게 말하지 말아야겠다. 하루 하루를 목숨 걸고 일해야 하는 이들 앞에서는. 두려웠다. 겨우 두 시간. 갱도 안에서 보낸 그 짧은 시간 동안 살아나오지 못할까 무서웠다. 땀으로 흠뻑 젖게 만드는 열기가, 탁한 공기와 매운 광물의 냄새가, 무릎걸음으로 걸어야 하는 낮고 좁은 갱도가 두려웠다. 랜턴을 끄면 완전한 암흑. 그 몇 초의 암흑이 지옥처럼 느껴졌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매일을, 몇 년을, 몇 십 년을 아침마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부끄러웠다. 암흑의 먼지구멍 속에서 일하는 그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내가. 코카잎과 음료수를 건네며 그들의 삶을 훔쳐보는 내가.
이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해발고도 4090m로 하늘과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이 도시는 풍부한 광물이라는 신의 축복으로 인해 악마들을 불러들여야 했다. 한때 스페인을 먹여 살렸던 곳으로 스페인 제국의 착취를 상징하는 도시. 나는 지금 볼리비아 포토시 주의 주도 포토시에 와 있다. 신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광산 도시인 이곳은 1545년 스페인에 점령당한 이후 200년 넘게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은의 반 이상을 생산했다. 기록에 따르면 1556년부터 1783년까지 해마다 4만5000t의 은이 스페인으로 실려 갔다.
함부로 쓰지 말아야겠다. 막장인생이라는 말. 사는 게 힘들다고, 일에 지친다고도 쉽게 말하지 말아야겠다. 하루 하루를 목숨 걸고 일해야 하는 이들 앞에서는. 두려웠다. 겨우 두 시간. 갱도 안에서 보낸 그 짧은 시간 동안 살아나오지 못할까 무서웠다. 땀으로 흠뻑 젖게 만드는 열기가, 탁한 공기와 매운 광물의 냄새가, 무릎걸음으로 걸어야 하는 낮고 좁은 갱도가 두려웠다. 랜턴을 끄면 완전한 암흑. 그 몇 초의 암흑이 지옥처럼 느껴졌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매일을, 몇 년을, 몇 십 년을 아침마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부끄러웠다. 암흑의 먼지구멍 속에서 일하는 그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내가. 코카잎과 음료수를 건네며 그들의 삶을 훔쳐보는 내가.
이 도시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해발고도 4090m로 하늘과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이 도시는 풍부한 광물이라는 신의 축복으로 인해 악마들을 불러들여야 했다. 한때 스페인을 먹여 살렸던 곳으로 스페인 제국의 착취를 상징하는 도시. 나는 지금 볼리비아 포토시 주의 주도 포토시에 와 있다. 신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광산 도시인 이곳은 1545년 스페인에 점령당한 이후 200년 넘게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은의 반 이상을 생산했다. 기록에 따르면 1556년부터 1783년까지 해마다 4만5000t의 은이 스페인으로 실려 갔다.
열다섯 살에 광산 노동자가 되어 어른이 된 후에도 리코 광산에서 일하고 있는 광부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랜턴 불빛에 의지해 작업을 하고 있다.
은광 때문에 전 세계에서 부귀영화를 꿈꾸는 이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17세기 후반에는 이미 20만명이 넘는 인구에 86개의 교회가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1825년 페루가 독립을 쟁취한 이후 은의 가치하락으로 도시는 점점 쇠락해갔다. 20세기 초 유토피아를 꿈꾸며 남미의 은행을 털며 돌아다니던 두 미국인이 있었다.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로 알려진 그들은 1907년 이 도시에서 광산 노동자들의 임금 지불을 위해 모아둔 돈을 털어 달아나다 사살되기도 했다. 역사 속의 도시로 잊힐 뻔했던 포토시는 다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리튬이 이곳에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기자동차에 장착되는 리튬이온 배터리시장을 겨냥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해지며 다시 이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포토시에 도착한 밤, 도시는 싸늘한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은 이미 겨울이 깊었고, 해발고도 4000m가 넘는 곳이니 추울 수밖에. 난방이 되지 않는 숙소에서 밤새 추위에 떨다가 아침을 맞았다. 여행사를 찾아가 광산 투어를 신청하니 종이 한 장을 내민다. 사고가 생겨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각서다. 각서에 사인을 한 후에야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포토시를 찾는 여행자들이 약간의 두려움 속에 참여하게 되는 광산투어는 광부들이 일하는 갱도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내가 들고 다니는 안내책자에도 광산 투어의 위험을 알리는 경고난이 있을 정도다.
아침 8시30분, 장비를 대여하는 곳에서 헬멧과 랜턴, 장화와 바지 등 복장을 갖추는 일로 광산 투어가 시작됐다. 광부들과 비슷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우리는 광산 근처의 ‘광부들의 시장’으로 향했다. 코카잎과 담배, 술, 다이너마이트, 마스크, 랜턴 등 광부들에게 필요한 장비를 파는 시장이다. 작업 환경이 열악하기로 악명 높은 이곳의 광부들은 채굴 작업에 필요한 도구들을 자비로 구입해야 한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광부들에게 줄 코카잎과 음료수를 구입했다. 광부들이 코카잎을 씹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코카잎에는 비타민, 철분, 칼슘이 풍부해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할 수 있고, 집중력을 증가시키고 졸음을 방지한다고 한다. 또 진폐증에 도움이 되기도 해 광부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벗이다.
우리가 찾아간 광산은 세로 리코 광산으로 ‘풍요로운 봉우리’라 불린다. 전설에 따르면 1462년 잉카제국의 한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이 산을 헤매다 은광을 발견했다. 그가 은을 캐내려 했을 때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드리지 말라. 이것은 너희 것이 아니라 뒤에 올 이들의 것이니라”라는. 잉카의 왕에게 ‘포토시(굉음, 즉 목소리)’를 들었다고 보고했는데, 그것이 이 도시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100년 후 스페인 침략자들이 들이닥쳤을 때 잉카인들이 황금을 바치며 그들을 맞았던 건 바로 이 전설을 믿고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부들의 하루는 파차마마라 부르는 ‘어머니 대지’에 알코올 도수 97도의 술과 코카잎을 바치는 의식으로 시작된다. 모든 생명을 주관하는 신에게 그들의 목숨을 지켜달라고 비는 기원이다. 우리도 가이드와 함께 파차마마에게 코카잎과 술을 바치며 광산 투어를 시작했다. 갱도는 좁고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허술하게 받혀진 받침목들 아래 자주 무릎 걸음으로 기듯이 걸어야 했다. 광물이 실린 수레를 미는 광부들 중에는 아직 소년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들이 있었다. 이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의 절반 이상이 10대 청소년이라고 했다. 식당이나 가게에서 일을 하면 한 달에 600~700볼리비아노(10만원)를 겨우 받지만 광산에서 일을 하면 한 달에 1500볼리비아노 이상 벌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어린 나이에 광부가 된 이 소년들은 20~30년의 세월을 갱도에서 보내기도 한다. 이곳 광부들의 평균 수명은 40세가 겨우 넘고, 그들의 대부분은 남은 생을 진폐증과 싸워야 한다. 정부의 무관심 역시 그들을 서럽게 만든다. 재선에 성공한 최초의 원주민 대통령 모랄레스마저 광부들의 권익에는 무관심하다고 그들은 토로한다.
이 도시에 사는 20만명 중에 이제 광부는 1만2000명에 불과하다. 빈약한 선물을 들고 와 그들의 삶을 엿보는 미안함에 대해 가이드는 이렇게 답했다. “이곳 광부들은 관광객들을 환영해요. 이 깊은 곳까지 그들을 찾아와 주는 유일한 이들이니까요.” 광산투어 자체가 25년 전 광부들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갱도 안에서 일하는 그들에게는 정말 관광객도 반가운 존재인 걸까. 비좁은 갱도에서 우리들과 마주칠 때면 검은 얼굴 사이로 이빨을 드러내며 웃던 광부들. 광산투어는 40도 가까운 갱도에서 땀을 쏟으며 머물다가 얼음이 얼어있는 영하의 갱도를 거쳐 끝이 났다. 10층까지 있다는 갱도에서 겨우 3번째 갱도까지 내려갔을 뿐인데, 나는 내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 어둡고 습한 갱도에서 뛰쳐나가고픈 욕망과 싸워야 했다. 광산에서 나와 올려다본 하늘은 서럽도록 푸르렀다. 어쩌면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날마다 눈물 나는 하늘을 대면하며 살겠구나 싶어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내가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삶의 찬가를 부르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포토시 어디에서나 세로리코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사람들을 500년 가까이 먹여 살린 산이다.
한 번이라도 갱도 안에서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본다면, 밥을 벌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임을 알게 된다면, 쉽게 투정부리며 살지는 못하리라. 포토시의 광산투어는 내가 경험한 모든 투어 중에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아픈 투어였다. 화려하게 꽃 핀 유럽의 문화는 결국 이들의 땀과 눈물, 목숨을 담보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고된 노동과 폭발사고, 수은 중독으로 수십만명의 원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던 비극의 땅. 그것도 모자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3만명의 흑인들이 조폐국에서 인간 노새로 일을 해야 했던 곳. 포토시는 슬프고 아픈 기억을 간직한 도시였다.
“나는 본다 로타의 탄광에서 흐느껴 우는 걸, / 땅속 깊은 데 참담한 갱도에서 구멍을 뚫는 / 지쳐버린 칠레인의 주름진 그림자를, 죽는 걸, / 사는 걸, 화석화한 광재(鑛滓) 속에서 태어나 / 열심히 일하는 걸, 마치 세계가 / 그렇게 오고 또 그렇게 떠날 것처럼 / 검은 먼지 속에, 불꽃 속에 무너져 있는 걸,…” 나는 파블로 네루다의 <남쪽에서의 굶주림>을 떠올리며 이 도시를 떠났다. 내 심장이 아직 타인의 고통에 대해 뜨거울 수 있음을 감사하며.
※필자의 미투데이(http://me2day.net/skywaywalker, 닉네임 ‘Ontheroad’)에서 실시간으로 남미 여행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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