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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남미걷기

[김남희의 남미 걷기](11) 브라질 아마존

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

ㆍ나를 다시 울게 만든 ‘나가수’ 아저씨

철이 든 이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생명체는 나무였다. 품 넓은 나무 한 그루만 있다면 어디서든 나는 족했다. 팍팍한 일상에 지쳐 주저앉고 싶어지는 날에는 그 나무에 기대어 물기 없이 쪼그라든 내 마음을 적셨고, 혼자라는 게 새삼 몸서리쳐지는 겨울밤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견디는 힘에 대해 생각했고, 뜨거웠던 마음이 식어가는 일에 베인 날이라면 그 나무의 옹이를 어루만지며 제 품에 깃드는 이들을 가리지 않고 품어주는 넉넉함에 대해 가늠하고는 했다.

깊은 콘크리트 빌딩 숲에 갇혀 사는 날이라 해도 근처에 오래 늙어 싱싱한 나무 한 그루만 있다면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많이도 기대어 눈물을 쏟았던 나무가 어느 골목에건 한 그루쯤은 있었다. 나무는 지상에서 품고 있는 내 비밀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생에 나무와 몸을 바꿔 이 세상에 다시 오고픈 건 내 오랜 꿈이기도 했다. 나무를 바라볼 때면 되묻고는 했다. 사람도 결국 그가 품을 수 있는 타인의 존재만큼 아름다운 건지도 모르겠다고. 나도 내게 오는 이들을 다 안아줄 수 있을까. 휘어지면 휘어지는 대로, 부러지면 또 부러지는 대로, 그렇게 흔들리면서도 한결같이.

브라질 쪽에서 바라본 이과수 폭포. 이과수는 원주민이 붙인 이름으로 ‘큰 물’이라는 뜻이다. 바라보는 사람의 영혼을 가져가버린다는 이과수 폭포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3개국에 걸쳐 있다.



언제부터인가 길 위에서 나는 마음을 단단히 여민 채 걷고 있었다. 헤어지고 혼자 남겨지는 일이 두려웠기에. 지난 다섯 달간, 며칠을 함께 보낸 이와 헤어질 때면 나는 조금 쓸쓸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눈물은 내게서 사라졌고, 아무렇지 않은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 대륙이 품고 있는 경이로운 자연에 위로받았지만 사람 때문에 울고 웃는 날들은 아니었다. 오뉴월 햇살에 바싹 말라가는 논바닥처럼 건조한 내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 메마름이 질척함보다는 낫다고 여겼는데… 이 이야기는 길에서 만난 고마운 인연에 대한 이야기다. 다시 나를 울게 만들고,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이과수 폭포로 가는 야간 버스. 짐을 싣기 위해 기다리다 딱 봐도 한국인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다. “한국분이시죠?” “네.” “이과수 가세요?” “네.” 참, 말 짧은 아저씨네. 머쓱하게 돌아서는 순간, 그의 슈트케이스에 적힌 영문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 순간 나는 그 아저씨를 알아보고야 말았다. 몇 주 전 인터넷에서 ‘파타고니아’로 뉴스 검색을 했을 때 무수히 떴던 이름이었기에. 하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익명의 존재로 남고 싶은 자유를 여행지에서라도 누릴 수 있어야 하니까. 18시간 후 푸에르토 이과수에 내리며 그분께 인사했다. “여행 잘 하시고요, 폭포에서 뵐 수 있으면 봬요.” “네.” 여전히 말이 짧은 분이었다.

이과수 강을 따라 2.7㎞에 걸쳐 275개의 폭포가 늘어선 거대한 물줄기 이과수. ‘이과수’는 원주민 과라니 족이 붙인 이름으로 ‘큰 물’이라는 뜻. 미국 대통령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로 하여금 “불쌍한 나이애가라”하고 탄식하게 만들고 만, 바로 그 ‘큰 물’이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에서 십자가에 묶여 떠내려오던 신부의 모습을 촬영한 곳도 바로 이 폭포.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파라과이에 걸친 이 넓은 폭포에서 제일 먼저 찾아가는 곳은 아르헨티나 쪽의 ‘악마의 목구멍’. 150m 폭에 700m의 길이, 82m 높이(20층 고층 아파트 높이)의 폭포로 초당 6만t의 물이 쏟아지는 곳.

그 어떤 말이나 글로도 표현할 수 없고, 그 어떤 카메라로도 웅장함을 담을 수 없다. 연암이 요동벌판을 보고 그랬던가. “가히 한 번 울 만한 터”라고.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울음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모든 눈물과 울음, 그 어떤 통곡도 이 폭포 앞에서는 다 묻힐 테니까. 바라보는 사람의 영혼까지 빨아들일 듯 끝없이 피어오르는 포말. 모든 소리가 귓전에서 지워지고, 모든 세계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오직 거대한 폭포의 물줄기만 남아 몸과 마음을 뜨겁게 적신다.

영혼을 가져가버리는 폭포라더니 이토록 자극적일 수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깊고 거대한 물줄기로 나도 모르게 뛰어들기 전에 돌아선다. 위쪽 산책로를 거닐다가 말 짧은 분과 재회한다. “아저씨라고 불러. 나는 김양이라고 부를게.” 내가 자신을 몰라봤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자연이 주는 위안 때문인지 아저씨는 점차 말이 길어지고 있다. 긴장을 풀고 느슨해지는 모습에 나도 덩달아 편해진다. 오늘밤 삼바쇼를 보러 브라질 쪽으로 넘어갈 거라는 아저씨를 따라 나도 국경을 넘는다. 다음날은 이분의 연예인급 스케줄 때문에 새벽 기상을 하고, 브라질 쪽 폭포를 보러 간다. 이곳에서 보는 이과수는 한 편의 대서사시다. 악마의 목구멍을 비롯해 이단으로 늘어선 폭포들을 품에 안듯이 즐길 수 있기에. 아저씨와 작별한 후 폭포로 돌아온 나는 10분의 비행을 위해 12만원을 지불한다.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져 내리는 폭포와 빽빽한 밀림. 이 별에 신의 손길이 닿았을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하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사흘 후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항공사’ 1위에 당당히 뽑힌 탐 항공기를 타고 3000㎞를 날아간다. 아마존 여행의 기점인 브라질의 마나우스를 향해. 가끔 ‘무엇을 했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했느냐’가 경험의 질을 결정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아저씨가 좋은 여행친구가 될 것 같다는 내 직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푸른 하늘을 담고 7000㎞를 흐르는 아마존강.



아마존은 세계에서 가장 넓고, 생물 다양성이 가장 풍부한 열대우림 지역이다. 705만㎢의 넓이에 브라질, 페루, 볼리비아, 콜롬비아 등 아홉 나라에 걸쳐 있다. 10만종이 넘는 무척추동물, 40만종이 넘는 식물과 블랙 카이먼, 재규어, 아나콘다 등의 포식자들이 사는 땅. 강의 청소부라 불리는 식인 물고기 피라냐와 흡혈박쥐와 독개구리, 말라리아와 황열병과 뎅기열이 기다리는 땅.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일생에 한번은 들어가고픈 곳으로 나는 지금 가고 있다.

다음날, 아마존 체험을 함께할 일행들을 만난다. 14살 나이 차에 다투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는 마리아니와 야니 커플, 언제나 달콤함이 솔솔 풍기는 아니와 알렉스 커플, 잠시도 쉬지 않고 종알대는 철없는 남편 비비와 귀여운 비르말리.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남자들이 아내를 동반해 2주간 여행을 왔단다. 버스와 배를 두 번씩 갈아타며 아마존으로 들어간다. 7000㎞를 흘러가는 길고 거대한 강 아마존은 도무지 그 시작과 끝을 가늠할 수조차 없다. 검은 강과 갈색 강이 만나 뚜렷한 선을 이루는 강물.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수상가옥들. 온몸에 달라붙는 지독한 습기. 세차게 쏟아졌다 그치는 열대성 스콜. 윙윙거리며 덤벼드는 모기떼. 우리가 머물 정글 숙소는 하루 네 시간 전기가 들어오고, 휴대폰은 당연히 안 터지고, 도마뱀이나 개구리들과 방을 나눠 쓰기도 하는 초가집.

우리의 첫 아마존 체험 활동은 보트를 타고 야생동물을 찾아 나서기. 이구아나들(나뭇가지에 꼭 붙어 있다가 모터소리에 놀라 물로 뛰어드는), 붉고 파란 열대 앵무새 아라라 한 쌍, 그리고 작은 나무늘보 한 마리를 만나고 돌아와 밤에는 ‘악어 사냥’에 나선다. 랜턴 불빛에 눈이 반짝이는 새끼 악어를 맨 손으로 잡아 악어의 생태를 설명하고, 사진을 찍은 후 놓아준다.

다음날은 정글 트레킹. 밀림 속을 걸으며 야생동물을 찾거나 원주민들이 약초로 쓰는 식물들을 찾아본다. 코코넛 열매 속에 들어있는 애벌레 빼먹기도 우리의 체험 코스. 통통한 애벌레를 쏙 빼서 내민 가이드 루이스에게 나는 당당하게 말한다. “나 채식주의자인 거 알잖아. 아쉽네.” 피라냐가 우글거리는 강물에서 헤엄을 치기도 하고, 민가를 방문해 아마존의 이웃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잠시 들여다보기도 하고, 피라냐 낚시 대결을 벌이기도 하고, 해돋이를 보기 위해 침묵 속에 뱃전에 앉아 있기도 하는 사이 사흘이 흘러갔다.

건강하고 호기심 가득한 아마존의 소녀.

우리가 아마존에서 보낸 3박4일의 시간 동안 문명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벌거벗은 원주민도, 정글의 포식자 재규어도, 강물 위를 헤엄치는 핑크 돌고래도 만나지 못했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존재한다는 거다.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기에. 그곳에서 우리가 본 것은 몇 마리의 회색 돌고래떼, 원숭이들, 나무늘보, 이구아나, 새끼 악어들과 코브라, 무수한 열대조류들이었다. 길들지 않은 채, 사라지지도 않은 채, 살아있어 줘서 고마운 지구의 또 다른 주인들. 그들이 있어 지구는 얼마나 아름다운 별이 되었는지.

어떤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곳에 새겨진 추억이다. 나의 아마존 여행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함께한 이들 덕분이었다. 활기 넘치고, 호기심 가득한 벗들이 있어 매 순간이 통통 튀었다. 특히나 아저씨는 내가 닮고 싶은 여행자의 모습을 골고루 지니고 있었다. 함께 여행하는 사람을 최고로 대우해주는 배려, 어떤 상황에서도 불만을 토로하는 법이 없는 여유, 옆사람까지 전염시키는 한계도 없고, 근거도 없는 자신감, 사물의 핵심으로 바로 들어가는 연륜, 세상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 아저씨와 헤어진 후 나는 조금 용감해진 걸까.

일정 따위는 무시한 채 벗을 찾아 야간버스에 오르는 걸 보니. 세계 최대의 습지인 판타날에서 일주일을 함께 보낸 베키와 필을 만나기 위해 나는 지금 볼리비아의 남쪽 도시로 가고 있다. 일정이 좀 꼬이면 어때. 그게 여행인 걸. 헤어진 후에 좀 울게 된다 해도, 잠깐 만나고 오래 그리워해야 한다 해도, 괜찮아. 어차피 여행은 정 들어 익숙한 것들과 헤어지는 연습을 하는 거니까. 삶은 결국 이별하는 과정인 거고. 그 아저씨의 이름은 김영희. 대한민국을 뒤흔든 <나는 가수다>를 만든, 바로 그 쌀집아저씨다.

※필자의 미투데이(http://me2day.net/skywaywalker, 닉네임 ‘Ontheroad’)에서 실시간으로 남미 여행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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