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
ㆍ다시 오고 싶은 또 하나의 산을 품다
삶이 그렇듯 여행도 늘 뜻대로 풀리는 건 아니다. 호화 유람선을 타고 우아하게 항해를 하겠다고 예약한 배는 수백마리의 소가 애처롭게 울어대는 화물선일 수도 있고, 4인용 선실에는 가난하나 패기만만한 청년 디캐프리오가 한 명쯤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자들만으로 선실이 가득 차기도 하고, 명성 높은 칠레 피요르드의 빙하를 보겠다는 단순한 욕망마저 성수기가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예고 없이 무시되기도 하는 법이다.
칠레의 남부 항구도시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푸에르토 몬트로 올라가는 3박4일의 배 여행(나비맥 크루즈)은 언제부터인가 서구 배낭 여행자들의 ‘wish list’에 올라가 있다. 칠레의 피요르드 해안이 보여주는 빼어난 풍경과 조디악을 타고 빙하 바로 앞까지 가는 빙하 탐사 일정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크루즈는 그 시작부터 격조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배는 예약한 에반젤리스타호가 암초에 부딪는 바람에 그보다 급이 떨어지는 푸에르토에덴호로 변경됐다. 넓은 라운지, 영화 상영관, 갑판의 수영장과 선데크, 동서 각국의 산해진미가 준비된 뷔페 요리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낡고 허름한 식당은 좁기까지 해 110명의 승객이 번갈아 식사를 해야 하고, 유스호스텔 도미토리보다 못한 선실은 몸을 움직일 공간도 없다. 짐칸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이 눈을 껌뻑거리는데 저녁상에 소고기가 올라온다. 결정적인 결함은 이 배를 유명하게 만든 빙하 관광이 취소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날씨까지 나빠,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날들이 이어진다. 결국 버스로 하루면 올라갈 길을 돈을 바다에 뿌리며 3박4일에 걸쳐 올라가는 셈이 되고 말았다. 선실에서 빙하 시대의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을 헤아리면서….
삶이 그렇듯 여행도 늘 뜻대로 풀리는 건 아니다. 호화 유람선을 타고 우아하게 항해를 하겠다고 예약한 배는 수백마리의 소가 애처롭게 울어대는 화물선일 수도 있고, 4인용 선실에는 가난하나 패기만만한 청년 디캐프리오가 한 명쯤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자들만으로 선실이 가득 차기도 하고, 명성 높은 칠레 피요르드의 빙하를 보겠다는 단순한 욕망마저 성수기가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예고 없이 무시되기도 하는 법이다.
칠레의 남부 항구도시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푸에르토 몬트로 올라가는 3박4일의 배 여행(나비맥 크루즈)은 언제부터인가 서구 배낭 여행자들의 ‘wish list’에 올라가 있다. 칠레의 피요르드 해안이 보여주는 빼어난 풍경과 조디악을 타고 빙하 바로 앞까지 가는 빙하 탐사 일정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크루즈는 그 시작부터 격조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배는 예약한 에반젤리스타호가 암초에 부딪는 바람에 그보다 급이 떨어지는 푸에르토에덴호로 변경됐다. 넓은 라운지, 영화 상영관, 갑판의 수영장과 선데크, 동서 각국의 산해진미가 준비된 뷔페 요리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낡고 허름한 식당은 좁기까지 해 110명의 승객이 번갈아 식사를 해야 하고, 유스호스텔 도미토리보다 못한 선실은 몸을 움직일 공간도 없다. 짐칸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이 눈을 껌뻑거리는데 저녁상에 소고기가 올라온다. 결정적인 결함은 이 배를 유명하게 만든 빙하 관광이 취소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날씨까지 나빠,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날들이 이어진다. 결국 버스로 하루면 올라갈 길을 돈을 바다에 뿌리며 3박4일에 걸쳐 올라가는 셈이 되고 말았다. 선실에서 빙하 시대의 속도로 흘러가는 시간을 헤아리면서….
해발 775m의 라닌 화산이 이마 가득 눈을 인 채 우뚝 솟아 있다. 김남희씨 촬영
어느 날 밤, 저녁식사 자리에 합석한 영국인 데이비드와 캐리 부부. 캐리가 14세, 데이비드가 17세일 때 학교의 여름캠프에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 나이 또래의 좋아도 싫은 척하는 행동을 하다가 진전 없이 헤어졌다.
‘지금은 배 나온 아저씨가 되어 있겠지.’ ‘아이 키우느라 미장원 갈 시간도 없는 아줌마가 되어 있겠지.’ 이렇게 서로를 그리워하며 흘러간 시간이 무려 23년. 그것도 데이비드는 연애 한 번 안 하고 순정을 지키면서. 그러던 지난해 6월, 캐리가 아직 미혼임을 우연히 알게 된 데이비드는 e메일 주소를 알아내 그녀에게 연락했다(밀랍 도장으로 이니셜이 찍힌 편지보다야 덜 매력적이지만 어쨌든 e메일도 아직 충분히 로맨틱한 역할을 하고 있다).
캐리는 여행을 핑계 삼아 데이비드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로 날아갔다. 석 달 후인 9월의 날빛 좋은 날, 둘은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그 유명한 하프 돔을 오르고 있었다. 데이비드의 배낭 안에는 반지와 샴페인 한 병이 들어 있었고. 고된 등반 때문에 힘들어하던 캐리는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데이비드에게 외쳤다. “어떡해? 내 손가락 퉁퉁 부은 거 보여?” 안 그래도 마음 졸이던 이 남자, 반지가 안 맞을까봐 전전긍긍.
마침내 해발 2693m의 하프 돔 정상에 오른 두 사람. 캐리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데이비드가 반지를 내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남은 생을 나와 함께해주겠소?” 부은 손가락에 간신히 끼워진 반지를 보며 웃던 캐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길로 또 내려가야 하는 거라면 No야.” 올해 2월,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은 6개월째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다. 새로 시작된 남은 생에 두 사람이 뭘 하며 살지도 고민해보고, 헤어져 있던 세월에 대한 보상도 하기 위해.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어 금욕적인 삶을 사는 나를 슬금슬금 쑤시기도 한다. 화석이 되어버린 내 심장과 재생 불능의 연애세포는 언제쯤 부활이 가능할 것인지.
딱 한 번의 인상적인 만남, 네덜란드보다 크다는 베르나르도 오히깅스 국립공원을 한 시간 만에 훑어보는 딱 한 번의 하선, 하룻밤의 심한 배멀미, 오랜 지루함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고래와 돌고래들과의 만남을 남긴 채 배는 푸에르토 몬트에 닻을 내렸다.
푸에르토 몬트 주변의 작은 호숫가 마을 푸에르토 바라스에서 며칠을 머문 후 다시 국경을 넘어 산마르틴데로스안데스로 가는 길. 버스는 호수를 왼쪽에 끼고 산과 들판을 가로질러 달린다. 다시 파타고니아 땅이다. 하늘이 그림을 그리고, 바람은 노래를 부르고, 햇살이 춤을 추는 땅. 이런 풍경 속에 머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번 생은 된 것 같다는 만족을 주는 곳. 붉은 렝가나무 숲 위로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고개를 넘고 나니 국경이다.
지난 석 달 사이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을 몇 번을 넘은 걸까. 푸콘에서 바릴로체로, 엘칼라파테에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푼타 아레나스에서 우수아이아로, 우수아이아에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푸에르토 바라스에서 바릴로체로 벌써 다섯 번째다. 이토록 자유롭게 넘을 수 있는 국경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어쩌다 한반도는 섬이 되어버린 걸까.
성별과 피부색, 성적 취향, 종교와 나이 그 모든 경계를 자유롭게 넘어선 인간이 되기 위해선 지리적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도 필요하지 않을까. 선을 넘어가면 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고, 그 세계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해 아는 것. 지리적 경계의 확장을 통한 경험은 결국 정신적 경계선을 넓히는 기반이 되어줄 테니까.
산마르틴데로스안데스에 도착하니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빛난다. 이곳은 체 게바라가 의대생이던 시절에 아르헨티나 북부 코르도바에서 출발해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가던 길목이다. 바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그가 일주일 머물렀던 마구간은 이제 박물관이 되어 있다.
트레킹 시즌이 끝나고 스키 시즌을 기다리는 마을은 한산하다. 라닌 국립공원으로 가는 대중교통이 다 끊긴 탓에 여행사의 1일투어에 합류한다. 쌀쌀하지만 청명한 가을 아침. 3775m 높이의 라닌 화산은 이마 가득 눈을 인 채 우뚝 솟아 있다. 호숫가에서 풀을 뜯는 말과 사슴들. 노랗게 시든 풀들과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미루나무들. 호숫가를 걷고, 점심을 먹고, 폭포까지 짧은 트레킹을 다녀온 후 숲 속에서의 티타임을 끝으로 일정이 끝났다. 돌아오는 길, 살진 달이 산 너머로 떠오른다.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너머 까만 점으로 사라지는 라닌. 다시 오고 싶은 또 하나의 산을 품는다.
다음날은 세로 콜로라도산(1742m)을 오른다. 오늘의 동행자는 날렵하게 생긴 가이드 벤하민과 과묵한 프랑스 청년 벤. 왕복 4시간의 길지 않은 산행인 데다 가이드까지 함께하기에 부담도 없다. 렝가나무들이 군집을 이룬 숲을 지나니 눈이 쌓인 길이 이어진다. 벤하민이 앞서 걸으며 눈을 다져주니 한결 수월하다. 렝가나무의 몸통마다 연두색의 수염 같은 기생식물이 펄럭이고 있다. 리켄이라는 이름의 이 식물은 그 생김새 때문에 ‘할아버지 수염’이라는 별명을 달고 있다. 숲을 빠져나와 거센 바람이 부는 길을 30분쯤 오르니 정상이다. 호수와 라닌 화산과 칠레로 넘어가는 도로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라닌 국립공원을 비롯한 이 지역에는 원주민 마푸체 부족이 살고 있다. 파타고니아 지역의 원주민 대부분이 절멸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부족이다. 마푸체 문화를 설명해주던 벤하민이 이렇게 말한다. “마푸체 사람들 일부는 위선적이야. 돈이 필요할 때는 전통옷을 걸치고 말을 타고 정부를 찾아가면서 평소에는 위성TV를 보고, 사륜구동차를 타고 다녀. 그들은 세금도 안 내고, 병원도 다 무료야. 정부로부터 땅도 그냥 받았으면서 국립공원 내의 자기 땅을 통과 못하게 하지.”
목덜미가 뻣뻣해진 내가 참지 못하고 끼어든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너희들이잖아. 여긴 원래 그들 땅이었는데 빼앗은 대가로 약간의 땅을 주거나 세금을 면제해주는 거고. 백인처럼 산다고 비판할 권리는 없는 것 같은데. 결국 그들을 그런 삶으로 몰아낸 건 백인 이주민들이니까.” “물론 그렇기야 하지만…” 말을 흐리던 벤하민이 덧붙인다. “게다가 마푸체는 칠레인도 아르헨티나인도 아닌 마푸체 부족일 뿐이야. 그들에게 아르헨티나라는 나라는 아무 의미도 없어.” 수천년을 부족의 개념으로 살아온 이들에게 국가의 개념을 강요한다는 게 무리 아닐까. 은근히 드러나는 백인들과 소수 원주민들 사이의 소원함이 안타깝다.
어떤 나라의 소수부족들은 소수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삶을 전시하며 살아야 한다. 원치 않아도 관광객들의 카메라에 노출되어야 하고, 일상의 많은 부분을 호기심과 눈요깃감의 대상으로 내놓아야 한다. 그런 그들이 조금 속물적이라고 해서, 우리와 같은 욕망을 품고 있다고 해서 비난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까. 원주민들이 오래된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고결한 정신만으로 불편하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이기심이야말로 비난받아야 할 쪽이 아닐까.
※필자의 미투데이(http://me2day.net/skywaywalker, 닉네임 ‘Ontheroad’)에서 실시간으로 남미 여행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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