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
파타고니아 특급열차를 타기 위해 머물렀던 엘볼손에서 다음 목적지인 엘찰텐까지는 버스로 26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나무도 없는 황량한 벌판을 달리던 버스가 손바닥만한 시골 마을에 우리를 내려놓고 가버렸다. 두 시간쯤 후에 초록색 버스로 갈아타라는 암호 같은 지령을 던져놓은 채.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호구조사를 시작한다. 사표 내고 1년간 아시아와 남미를 여행 중인 호주 토목공학자 제프, 홍콩에서 온 멘디와 케네스, 신혼여행으로 세계일주 중인 ‘염장 커플’ 캐서린과 밥, 젊고 귀여운 프랑스 청년 알렉스. 이들과 어울려 카드 게임을 하거나 마을 탐험을 하고 있자니 네 시간 만에 초록색 버스가 들어왔다. 결국 엘볼손을 떠난 지 서른네 시간 만에 장대비 쏟아지는 엘찰텐에 도착했다. 내가 점점 지구의 끝을 향해 가고 있긴 한가 보다. 날씨는 가혹하고, 물가는 혹독하고, 인심은 사납고, 전화는 안 터지는 마을에 와있으니.
아르헨티나의 남부 파타고니아 빙원을 대표하는 엘찰텐. 바위 좀 탄다는 세계의 사나이들을 설레게 하는 거대한 암봉 피츠 로이(3375m)와 세로 토레(3128m)가 솟아있는 곳이다. 피츠 로이는 1834년에 다윈을 태운 비글호를 몰고 온 영국인 피츠 로이 함장을 기념해 붙인 이름이다. 이곳의 원주민인 테우엘체족은 이 산을 ‘연기를 뿜는 산’이라는 뜻의 ‘세로 찰텐’으로 불러왔다.몸풀기로 제프와 함께 세로 토레 부근의 호수로 8시간짜리 트레킹을 다녀온 다음날, 캠핑 장비를 꾸려 산으로 들어간다. 아침부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포인세놋 야영장에 도착하니 제프가 강풍에도 끄떡없도록 텐트를 쳐주겠단다. 늘 “혼자서도 잘해요!”를 부르짖는 나인데 이럴 때 힘의 차이를 확인한다. 오늘 밤버스로 떠날 제프는 산을 내려가고, 나 혼자 야영장에 남았다. 지루하던 차에 나타난 이웃은 미국인 부부 패트릭과 질. 작년에 19일 동안 존 뮤어 트레일을 걸었다는, 트레킹 마니아다. 알고보니 이들의 취미는 장비 자랑. “우린 텐트가 4갠데 그 중에 하나는 500g밖에 안 나가”부터 시작하더니 입고 있는 옷과 취사도구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장비 예찬이 이어진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저녁을 먹는다. 설거지를 마치고 텐트로 돌아오니 시간은 오후 7시. 폭 60㎝, 길이 2m가 될까 싶은 비좁은 텐트에 누워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인다. 벌판을 휘돌아 몰려든 바람이 숲을 뒤흔들고, 그칠 기미 없는 비가 텐트를 두드려대고 있다. 옆 텐트에서 두런거리는 소리는 남의 애를 끓이고.
로스트레스 호수 앞에서 세로 찰텐을 바라보는 트레일러들. | 김남희씨 촬영
허리가 아플 때까지 자다가 깼는데도 시간은 겨우 오전 7시.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바람은 텐트를 날릴 듯 불어댄다. 파란 하늘은 바라지도 않으니 비라도 좀 그쳐다오. 읽을 책도 없는 데다, 식량은 하루치가 남았을 뿐이다. “나에게는 아직 열세 척의 배가 남았다”고 담담히 고백했다는 장군님을 본받아 나도 중얼거려본다. “나에게는 아직 세 끼의 식량이 남았다.”
빗줄기가 약해진 틈을 타 야영장에서 한 시간 거리인 로스트레스 호수로 향한다. 세로 찰텐을 조망하기에 최고의 장소로 꼽히는 곳이다. 블랑코 강을 건너 숲으로 이어지던 길은 곧 가파른 오르막으로 변했다. 바람이 어찌나 거세게 부는지 하체가 튼실하기로 소문난 나도 날려갈 것 같다. 비바람과의 사투 끝에 호수에 도착하니 푸른 빙하와 옥색의 호수 뒤로 구름에 가린 세로 찰텐이 솟아있다. 혹시나 구름이 걷힐까 싶어 바위틈에서 바람을 피하며 기다려본다. 언제 올라왔는지 패트릭과 질이 나타났다. “어제 저녁에 네가 우리 초콜릿 푸딩을 맛봤어야 하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깜짝 놀랐다니까.” 또 시작이다. 말린 망고와 에너지바를 건네며 이어지는 말. “우린 에너지바도 19가지 종류로 2개씩 사왔어. 브라우니나 푸딩 같은 디저트도 매일 먹을 양을 다 들고 왔지. 물론 주식은 매끼 다른 걸로 준비했고.” 여행할 때 집을 떠메고 다닌다고 놀림 받는 미국인의 전형이다. “정말 미국에서 모든 걸 다 들고 왔네요”라고 하니 자랑스럽게 답한다. “그럼. 우린 아르헨티나에서 아무것도 안 사”라고. 이 정도의 순진무구함은 부러울 정도다. 어쨌든 덕분에 난 미국산 캠핑 푸드를 종류별로 제대로 시식하고 있다.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렸지만 ‘연기를 내뿜는 산’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결국 야영장으로 돌아온다.
2박3일을 악천후 속에서 보내고 마을로 내려와 이틀을 쉰 후 다시 산으로 들어간다. 이번에는 코스를 달리해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동쪽 지역으로. 기후의 신께서 자비를 베푸신 덕분에 믿을 수 없이 날이 화창하다. 이곳에 온 이후 이런 날씨는 처음이다. 엘렉트리코 봉우리 근처로 왕복 7시간짜리 트레킹을 나선다. 야영장 뒤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니 곧 가파른 오르막이다. 그늘 한 점 없어 햇살이 그대로 목덜미에 내리꽂힌다. 지그재그로 돌며 한 시간을 오르니 세로 찰텐의 뒷모습이 보이는 고원이다. 뒤를 돌아보면 멀리 빙하가 보이고, 발아래로는 몸을 틀며 흘러가는 강줄기. 이어지는 험한 자갈길을 두 시간 남짓 오르고 나니 길이 사라졌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담담한 마음으로 재빨리 후퇴. 오른쪽으로 돌아가 보니 앞서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서둘러 따라가지만 그들도 개척자들이었다. 모두들 길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면서도 바위가 쏟아지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있으니. 그들을 따라 가다보니 마침내 더 이상은 오를 수 없는 벽 앞이다. 우회할 길도 없고, 오를 수도 없는 바위가 가로막고 있으니 하산하는 수밖에. 내려오는 길에 빙하가 녹아 생긴 호수로 길을 튼다. 빙하에서 떨어져나온 얼음 덩어리들이 호수 위에 떠 있고, 주변의 산들이 호위하듯 호수를 둘러싸고 있다. 바위에 걸터앉아 세로 찰텐의 뒷모습과 빙하를 바라본다. 완벽한 적막 속에 혼자 이 풍경을 누리고 있다. 신은 내게서 무엇을 가져가려고 이런 즐거움을 주시는 걸까. 언제나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 있을 때면 내 운명이 조금은 불안해진다.
산에서 내려와 짐을 꾸려 포인세놋 야영장으로 이동한다. 내일도 날씨가 좋다기에 세로 찰텐의 일출을 보기 위해 2시간 정도 숲으로 난 길을 따라 발걸음도 가볍게 걷는다. 숲에서 나와 강을 건너니 또 길이 사라졌다. 강을 되건너기 위해 바위틈 사이 좁은 침니로 내려서는데, 누군가 나를 잡아당긴다. 놀라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배낭이 바위틈에 낀 거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빠지지 않는다. 그 순간, 보지도 않은 영화 <127시간>이 떠오른 건 왜일까. 혼자서 암벽등반에 나섰다가 바위에 팔이 끼는 바람에 스스로 팔을 잘라 탈출했다는 남자의 이야기. 아무리 애를 써도 가방은 꼼짝도 안 하고, 해는 점점 넘어간다. 주위를 둘러봐도 인기척은 없다. 문득, 배낭 속에 넣어둔 맥가이버 칼이 떠올랐다. 온몸을 접고, 구기고, 비틀어 배낭에서 몸을 빼냈다. 칼을 꺼내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가방끈을 자른다. 내가 자르는 게 팔이 아님을 감사하며. 곧 어둠이 밀려들 텐데 길은 보이지 않는다. 절망감에 무너지려는 찰나, 강 건너편에 기적처럼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브라질에서 온 질슨과 알리. 복장부터 완벽한 트레킹 고수다. “혹시 우리가 어디쯤 와있는지 알아요?” 장난감 같은 목걸이 나침반을 내밀며 물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질슨이 목에 걸린 무언가를 꺼내 든다. 띡, 띠릭, 띡. 몇 번을 누르더니 “여기서 야영장까지는 북서쪽으로 800m쯤 남았어요”란다. 말로만 듣던 GPS다. 질슨의 머리 뒤로 둥근 아우라가 드리우는 순간, 슬그머니 내 나침반을 밀어 넣는다.
멀리 세로 토레의 모습을 담고 있는 물웅덩이와 주변 경치. | 김남희씨 촬영
삼재가 낀 게 틀림없다. 가방을 희생시킨 걸로는 부족했던 걸까. 야영장에 도착하니 ‘중동의 무법자’들이 야영장을 접수했다. 전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기피 1호 대상. 일당백의 소란함을 자랑하는 이스라엘 배낭족이다. 군대 제대 후 모은 월급으로 장기여행을 하는 게 유행인 이스라엘 아이들은 그 혈기와 무례함으로 ‘민폐의 종결자’로 등장한 지 오래다. 이스라엘 아이들이 몰려가는 곳은 그 동네에서 가장 싸고, 가장 시끄러운 곳으로 소문났다. 이곳 엘찰텐에도 방이 찼다면서 이들의 투숙을 거부하는 숙소도 있으니. 그런 애들이 야영장을 점거했으니 오늘 밤 잠들기는 틀렸다.
왜 불행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밤새 이어지는 소란에 뒤척이다 눈을 뜨니 오전 7시. 텐트 밖으로 나오니 벌써 세로 찰텐은 태양빛에 붉게 타오르고 있다. 식충이, 잠벌레, 게으름뱅이, 의지박약아, 온갖 험한 말을 스스로에게 퍼부으며 로스트레스 호수로 향한다. 정상에 도착하니 세로 찰텐에 드리웠던 붉은 빛은 이미 사라진 뒤다. 그래도 비에 씻긴 듯 맑은 얼굴을 드러낸 봉우리들은 경이롭기만 하다. 모두들 말도 없이 빙하와 산들을 바라보고 있다. 거센 바람소리만이 대기를 흔들고 있을 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런 풍경 앞에서 무슨 말이 필요할까. 옆자리에 있던 아르헨티나 청년들이 마테차를 건넨다. 말없이. 나도 눈웃음으로 답하며 잔을 받는다. 뜨겁고 쓴 마테차를 마시며 세로 찰텐을 바라본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필자의 미투데이(http://me2day.net/skywaywalker, 닉네임 ‘Ontheroad’)에서 실시간으로 남미 여행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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