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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남미걷기

[김남희의 남미 걷기](6)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 트레킹

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

ㆍ빙하의 흰빛에 눈이 멀 듯

1.육체와 정신의 한계 마주하며 걷다

생애 첫 경험이다. 일주일치 식량을 지고 걷는 일. 고작 한 주의 목숨을 유지하기가 이토록 무거운 일이었다니. 인간이란 이렇게나 나약하고 가련한 존재였구나.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마주하며 걷는 길. 고도 387미터의 고개가 에베레스트보다 높았고, 마지막 남은 2.5킬로미터는 화성으로 가는 먼 길이었다. 겨우 4시간을 걷고 녹초가 된 몸으로 세론 야영장에 들어섰다. 칠레 파타고니아 남부의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 남미 최고의 비경으로 꼽히는 이곳은 내게 어떤 풍경들을 보여줄까. 예측할 수 없는 날씨와 거센 바람으로 악명 높은 이곳에서 끝내 살아남자.

2.엽서 속 풍경 같이 서 있는 딕슨 산장

페리토 모레노 빙하 위를 걷고 있는 트레커.

고갯마루에서 마음의 준비도 없이 그림과 같은 풍경과 마주쳤다. 푸른 빙하와 설산 사이로 강이 흐르고 그 앞으로 뻗어 나온 작은 반도. 그 위에 딕슨 산장이 그야말로 엽서 속 풍경으로 서 있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때면 조카 연우가 생각난다. 이제 두 돌이 갓 지난 연우가 자라나 내 나이가 되어서도 이토록 경이로운 지구와 만날 수 있을까. 그때까지 우리가 이 별의 아름다움을 지켜낼 수 있을까. 연우를 자연 앞에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겸손한 아이로 키워낼 수는 있을까. 가끔씩 우리가 이 별의 초록빛과 풍요로움을 누리는 마지막 세대가 될까 두려워진다.

3.산이 좋아 산에 사는 야영장 청년들

그레이 빙하의 눈이 멀 것 같은 흰빛의 얼음 세계.

로스페로스 야영장에서 일하는 어린 청년 둘. 계란 한 알을 사려하니 그냥 준다. 난로가 지펴진 불가에서 쉬라면서 커피도 건넨다. 이들이 거주하는 오두막 시설은 열악하다.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는 좁은 부엌에 작은 난로와 나무 침상뿐이다. 발전기를 돌려 하루 세 시간 전기가 들어올 뿐인 이곳에서 이들의 유일한 낙은 손바닥만한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라틴팝. 푼타 아레나스가 고향인 이들은 이주일 일하고, 일주일 쉰다. 그 쉬는 주에는 이틀간 걸어서 도시로 나가 집에서 사흘을 쉬고 다시 이틀을 걸어서 돌아온다. 힘들지 않으냐 물으니 벌어진 이빨 사이로 순진한 웃음을 흘리며 답한다. “산이 좋으니까 지낼 만해요.”

4.인간의 발길을 거부한 얼음의 세계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토레스 산군들과 옥색의 호수.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수프를 끓여먹고 야영장을 나선다.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길을 걸어, 어두운 숲을 지나고, 가파른 자갈 언덕을 오르기를 몇 차례. 끝인가 싶으면 또 나타나고, 이제야말로 마지막이겠지 싶으면 또 기다리는 오르막. 그 길었던 고개의 정상에 서니 눈앞으로 장벽처럼 설산이 다가온다. 그 아래로는 거대한 그레이 빙하의 눈이 멀 것 같은 흰 빛. 더 이상 인간이 들어설 수 없는 얼음의 세계다.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의 무게와 다리의 통증이 눈 녹듯 사라진다. 기억의 저장고에 평생 넣어둘 “내 인생의 명장면” 하나를 이렇게 또 품게 됐다. 꼬박 9시간을 걷고 그레이 야영장에 들어섰다.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끌고. 뻐근한 온몸으로 스멀스멀 번져가는 은밀한 기쁨. 토레스델파이네를 반시계 방향으로 일주하는 8일짜리 코스 중 가장 힘든 구간을 무사히 마쳤다.

5.옥색 호수 물결 속 오랜만의 안락함

유유히 풀을 뜯고 있는 구아나코(남미 낙타의 일종) 가족.

배를 타고 페호이 호수로 건너왔다.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토레스의 산군들과 옥색으로 빛나는 호수의 물결. 야영장의 매니저 오마르가 조용히 쉬라고 식당을 통째로 내줬다. 이우는 저녁 햇살을 받은 파이네 산군을 바라보며 차를 마신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읽으며. 그의 글 안에 담긴 현실의 무게에 비해 지금 내가 처한 이 상황은 얼마나 안락한지. 식당 앞 풀밭에서는 구아나코(남미 낙타의 일종) 가족이 풀을 뜯고 있다. 길들인 동물도 아닌데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다.

6.화장실 없는 지구 최악의 야영장

거센 비가 멈출 기미 없이 종일 쏟아지고 있다. 화장실조차 없는 습하고 더러운 야영장에서 우리는 날씨에 대한 어리석은 희망을 품은 채 밤을 맞고 있다. 승리할 가능성 없는 전쟁에서 단지 자기 기만으로 버티는 병사들처럼. 진흙투성이 바지에, 손톱까지 새카매진 손, 씻지도 못한 몸을 침낭에 구겨 넣은 채. 저마다의 비좁은 텐트 안에서 가지 않는 시간을 자꾸 확인하는 저녁. 우리가 구하는 건 보잘것 없는 자비일 뿐. 찰나의 햇살과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바위산의 얼굴. 아니, 그게 그렇게 과한 욕심인 거냐구? 게다가, 야영장 화장실을 폐쇄한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냐고?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죄다 이미 무허가 변소로 변해있는 이탈리아노 야영장, 너를 <지구 최악의 야영장>에 임명한다.

7.‘신들의 거주지’ 바예스데프란세스

늦가을 손톱 끝에 남은 봉숭아물처럼 희미한 오렌지빛이 동편 하늘에 잠시 번지는가 싶었더니 그걸로 끝. 세계의 종말이라도 찾아올 듯 어둡고 흐린 하늘 아래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무채색의 세계. 곧 빗줄기가 흩날린다.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이곳. ‘파이네의 뿔들’이라 불리는 바위성채는 실루엣으로나 겨우 보이고, 내려가라는 듯 거센 바람이 등을 민다. 아쉬움을 안고 내려오는 길, 구름이 걷히고 ‘파이네의 뿔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얼음의 벽과 눈의 봉우리에 둘러싸인 바위성채. 신들의 거주지인 걸까. 저토록 거대하고 단단한 성채는.

8.연하 독일청년과 동침에 잠 못든 밤

스물다섯살 독일 청년 필립. 젊고, 잘 생긴데다, 착하기까지 한 그와 이틀째 함께 걷고 있다. 싸들고 온 식량을 다 먹어치워 ‘민폐의 종결자’로 등극한 내가 매끼 그의 식량을 축내면서. 야영장에 도착하니 이곳 산장도 오늘부터 폐쇄란다. 트레킹 시즌이 끝나가기 때문에. 또 다시 화장실 없는 야영장 신세다. 산장에서 텐트를 빌려 야영할 생각으로 왔다가 포기하고 돌아가는 한국 여성과 마주쳤다. 오지랖 넓고 착한 필립, 나더러 자기 텐트에서 자고 내 텐트를 빌려주란다. 결국 그녀에게 내 텐트를 내주고 난 필립의 2인용 텐트에 침낭을 깔았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비바람 소리 요란한 밤. 필립은 코까지 살짝 골면서 잘도 자는데, 나는 무엇 때문에 뒤척이는 걸까. 나무에 걸어놓은 음식가방이 젖을까봐? 벼락이 텐트 위로 내리치기라도 할까봐? 그런 거겠지. 절대로 이 어린 청년 때문은 아니야. 아니고 말구.

9.인정사정 볼 것 없다, 느닷없는 눈싸움.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날씨는 나쁘다. 토레스의 탑들을 만나기 위해 전망대로 향하는 길. 고도가 조금 높아지자 비가 눈으로 변해 쏟아지기 시작한다. 세상은 하얗게 지워져 가고, 신발은 점점 젖어가고, 손발은 얼어간다. 언제나 무사태평인 필립이 말한다. “걱정 마. 곧 날씨가 갤 거야.” 부럽다, 저 근거도 없는 낙관주의. 전망대 부근에 올라서니 어디선가 “파이어!”라는 괴성과 함께 폭탄이 날아온다. 인정사정 보지 않는 눈싸움 한 판을 벌이고 난 후 우리는 바위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함께 기다린다. 눈싸움을 주도한 부부 롤랜드와 이바는 독일에서 온 경찰과 선생님. 독일의 공무원은 4년마다 안식년을 쓸 수 있다. 3년간 급여의 75%만 받고 일한 후, 4년째 해에는 쉬면서 그동안 모아둔 나머지 급여 75%를 받을 수 있다. 그 제도를 이용해 이 부부는 4년마다 1년씩 여행을 다닌다. 여행 중에 말레이시아에서 만나 그곳에서 결혼한 이 부부의 결혼 예물은 코코넛 열매로 만든 반지. 시가는 무려 3000원. 충격에 약하다는 단점 덕분에 이바는 벌써 4개째 결혼반지를 갈아치웠다. 유쾌한 벗들의 에너지 덕분에 산에서의 마지막 하루가 통통거리며 지나갔다. 9박10일의 토레스델파이네 트레킹, ‘인생을 바꾸는 최고의 트레킹’ 명단에 가뿐하게 올라섰다.

10.내 생애 최고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

토레스델파이네를 찾기 전, 필수 방문 코스가 있다. 바로 국경 너머 아르헨티나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 트레킹. 이 빙하를 보지 않고서는 파타고니아에 다녀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푸르고 신비한 빙하를 만나면 지금껏 본 모든 빙하를 잊게 된다. 알프스의 빙하도, 킬리만자로의 빙하도, 히말라야의 빙하도…. 남극을 제외하고,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빙하 중 가장 아름다운 빙하로 꼽히는 이 빙하는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말을 앗아간다. 인간이 만든 건축물 따위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대자연의 건축물. 빙하의 붕락이 만드는 거대한 굉음을 들으며, 떨어져 나간 빙하가 일으키는 물보라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지금, 우주를 품에 안은 것만 같다. 빙하 위를 걷다가 돌아설 때 가이드가 건네는 빙하의 얼음으로 만든 위스키 온더락. 백만년의 시간을 몸 속으로 흘려보낸다.

※필자의 미투데이(http://me2day.net/skywaywalker, 닉네임 ‘Ontheroad’)에서 실시간으로 남미 여행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