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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남미걷기

[김남희의 남미 걷기](4)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



ㆍ길을 잃어버린 이들의 안식처, 바람이 전해주는 느림과 비움
나는 낡은 기차간에 앉아 있다. 오래전 이 기차를 탔던 이들을 추억하며. 손에는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한 권의 책을 든 채. 때로는 몇 줄의 글이 사람을 전혀 다른 세상으로 몰고 가기도 하는 법이다. 책장을 넘기던 나는 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본다. 짙푸른 하늘에 떠 있는 몇 점의 구름들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빠르게 흘러가고, 그 아래로는 키 낮은 가시덤불 너머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지고 있다. 마침내 나는 오랫동안 꿈꾸어 온 그 땅에 와 있다.

지리적으로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에 흐르는 콜로라도 강 이남의 남위 39도 아래 지역. 서쪽으로는 안데스 산맥 너머 빙하와 산을 품고, 동쪽으로는 고원과 낮은 평원을 지나 대서양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땅.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거인들의 땅”이라고 불려온, 예측할 수 없는 날씨에 일 년 내내 바람이 부는 곳. 지구 끝의 텅 빈 공간으로 가장 용감한 모험가들조차 겸손하게 만들었다는 땅.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지 못하는 땅이며, 잔혹하고 거친 원시성이 문명을 압도하는 곳. 브루스 채트윈, 폴 서로, 루이스 세풀베다와 찰스 다윈을 매료시킨 곳. 방랑자들의 종착지이자 범죄자들의 은신처, 이상주의자들의 해방구. 가만히 소리 내어 그 이름 불러보는 것만으로 가슴 속에 한 줄 바람이 불어오는 곳, 파타고니아.

황량하고 거친 원시성의 자연이 문명을 압도하는 곳 파타고니아. 아무렇게나 자란 풀과 나무, 거친 바위산의 질감이 오묘한 느낌을 준다. | 김남희씨 촬영

파타고니아라는 이름은 마젤란과 그의 원정대가 이곳 원주민들을 거인(파타곤)이라고 부른 데서 비롯됐다. 평균 키가 155㎝였던 스페인 사람에 비해 원주민 테우엘체 족의 평균 신장은 180㎝에 이르렀다고 한다. 파타고니아는 “셰익스피어가 <템페스트>의 영감을 얻은 곳이며,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거인의 모델을 제공했고,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의 무대가 되었으며,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의 소재가 된 땅”이다. 또 작가나 모험가뿐 아니라 갈 곳 없이 길 잃은 이들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모델이었던 미국 서부시대의 은행 강도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는 파타고니아로 내려와 이곳에 무정부주의자들의 낙원을 건설하고자 했으니.

이 황량하고 거친 고립무원의 대지를 세계의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건 몇 권의 책이었다. 시작은 1977년의 영국인 브루스 채트윈이었다. 그가 1973년에 파타고니아를 여행하고 <파타고니아>를 쓴 이후 유럽의 젊은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곧 이어 1979년, 미국인 저널리스트 폴 서로는 보스턴에서 파타고니아까지 기차를 타고 여행한 후 <더 올드 파타고니안 익스프레스>를 집필, 미국인들을 남미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1995년, 칠레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를 씀으로써 파타고니아에 대한 책은 사실상 종결됐다-물론 이건 순전히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세풀베다는 브루스 채트윈의 <파타고니아>에 대해 “책에 밑줄을 긋거나 주석을 다는 사람들을 경멸했던 내가 세 번을 읽는 동안 감탄 부호나 강조 표시로 꽉 채우고 말았던 책”이라고 예찬했다. 하지만 나를 흔든 책은, 책 속의 인물과 이야기에 대해 사실논란이 있었던 채트윈이 아니라 세풀베다의 책이었다. 채트윈이 이방인의 모호한 시각으로 그 땅을 들여다보는 데 비해, 칠레인인 세풀베다의 글에는 그 거친 땅에 살아온 이들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세풀베다가 탔던 <파타고니아 특급열차>는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남부의 엘 투르비오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240㎞를 달려 대서양 연안의 리우가예고스까지 가는 기차였다. 칠레의 칠로에 섬에 살던 남자들은 겨울이 끝날 무렵이면 국경을 넘어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 아르헨티나의 목장으로 갔다. “칠로에의 가난과 섬 여자들의 거친 성격에 넌더리를 치면서 혹시나 찾아올지 모르는 행운을 찾아”서. 그 열차가 거쳐 가던 하라미요 역은 역사의 시계가 언제나 9시28분을 가리키고 있다는, 역사의 현장이다. 1921년 6월18일, 4000여 명의 소작농들과 인디오들이 대지주의 착취에 항거해 파타고니아 최초의 자유 조합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진압에 나선 정부군은 밤 10시까지 투항하면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대부분을 사살했다. 그 참혹한 사건이 일어난 시각이 바로 밤 9시28분. 그 이후 역사의 시계는 언제나 9시28분에 멈춰 있다고 한다.

철로의 폭이 75㎝에 불과한, 세상에서 가장 좁은 협궤열차 ‘파타고니아 특급열차’가 커브길을 우아하게 돌고 있다.


나는 세풀베다가 탔던 그 열차를 타고 싶었다. 배낭 속에 소중하게 넣어온 그의 책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를 들고 하라미요 역에 내려 9시28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리우 투르비오의 광산에서 캔 석탄을 싣고 리우가예고스까지 달리던 지구 최남단 상업철도는 이미 운행을 중단한 지 오래였다.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는 파타고니아 북부 지역인 추부 지방에서 관광객을 위한 짧은 구간만 운행되고 있을 뿐이었다. <올드 파타고니안 익스프레스>라는 이름으로 140㎞의 구간만을. 결국 그 열차를 타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파타고니아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땅이니까.

<올드 파타고니안 익스프레스>는 궤간 길이가 75㎝에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좁은 협궤 열차다. 그래서 스페인어로 ‘좁은 길’을 뜻하는 ‘라트로치타’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아직도 옛 방식 그대로 물을 데워 증기로 달리는 기관차다. 1935년에 첫 운행을 시작한 이 화물 열차는 1950년부터 승객을 운송하기 시작했다. 추부 지방의 에스켈에서 출발해 엘 마이텐을 거쳐 리우 네그라 지역의 잉헤니에로 자코바치까지 401㎞를 14시간에 걸쳐 달렸다. 주로 노동자들이 타던 열차 안에는 장작을 지피는 난로가 있어 승객들이 직접 불을 피워 마테차(아르헨티나의 ‘국민음료’로 향이 강한 차)를 끓이거나 가벼운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1970년대에 도로와 차량의 증가로 위기에 처한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를 구한 건 폴 서로의 책 <더 올드 파타고니안 익스프레스>였다. 그 책을 읽은 여행자들이 이 열차를 타기 위해 몰려들어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는 당시 배낭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열차는 1992년에 멈췄다. 폐간된 열차를 지역 정부가 되살려 지금은 관광 열차로 짧은 구간만을 운행하고 있다. 추부 지방 정부는 완벽히 보존된 철로를 이용해 언젠가 전 구간을 달리는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를 재운행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한 쪽은 2인석, 다른 한 쪽은 1인석으로 꾸며진 파타고니아 특급열차 내부.


초가을 아침,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출발했다. 연한 회색으로 칠해진 기차의 내부는 깔끔하다. 철로의 폭이 75㎝에 불과한 열차답게 내부도 한쪽은 2인석, 다른 한쪽은 1인석으로 좁다. 승객들이 직접 장작을 집어넣는 난로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잠시 후 열차는 다리 위에 멈춰 서서 ‘포토 타임’을 주는 팬 서비스를 한다. 커브를 돌 때엔 미리 알려주는 센스도 발휘한다. 열차는 느릿느릿 파타고니아의 황량하고 아름다운 대지를 달려간다. 가없는 하늘에는 질량감을 가진 듯 두꺼운 구름이 걸려있고, 파타고니아의 특산품이라는 바람이 불어온다. 고단한 노동자들을 실어 나르던 열차는 이제 관광객들을 싣고 시속 45㎞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 이 정도의 느린 속도는 짧은 여흥으로만 허락되는 걸까. 이 속도를 우리 삶의 방식으로 되살릴 수는 없는 걸까. 사라져가는 것들은 왜 아름다운 걸까. 결국 오래 기억되기 위해서는 사라져야 하는 걸까. 나는 답 없는 질문들을 두서없이 던지며 메마르고 건조한 대지를 바라본다.

나의 파타고니아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지구의 남쪽 끝을 향해 계속 내려갈 것이기에. 내가 살던 세계 바깥의 또 다른 세계를 찾아. 나는 늘 나를 둘러싼 세상 너머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었다. 내가 속한 좁은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 세상에서 자발적으로 떨어져 나온다 해도 삶은 계속되는 것임을, 오히려 더 나은 삶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이 고립무원의 땅이야말로 그런 내 믿음을 다시 확인시켜줄 수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곳은 실패가 상처가 되지 않는 곳이며, 고향을 등진 자들의 고향으로 남은 땅이기에.

※ 필자의 미투데이(http://me2day.net/skywaywalker, 닉네임 ‘Ontheroad’)에서 실시간으로 남미 여행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