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
ㆍ외로운 영혼이 닿은 ‘짜릿한 지옥’
삶이 이렇게 평온하기만 해도 되는 걸까. 갈등도, 상처도, 흔들림도 없는 날들이 고요히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쳐서 독이 되곤 했던 외로움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일상은 평화로웠다. 간이 안 된 국처럼 싱거운 인생이라니. 한 번뿐인 삶을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내 유일한 무기는 타인의 슬픔을 알아채던 예민한 감정선뿐이었는데, 나는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잡문에 불과한 여행기마저 써지지 않았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외로움이 나를 여기까지 몰고 왔음을. 외로움이 내가 가진 전 재산이었음을. 결국 이번 여행은 제 발로 뛰어든 셈이었다. 한밤중에 나를 서성이게 하고, 타인의 온기를 더듬게 만들고, 찰나일지언정 소통을 꿈꾸게 하는 외로움 속으로. 짜릿한 지옥이냐, 지루한 천국이냐의 갈림길에서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그 결과, 지금 난 서울에서 삼만 리 떨어진 칠레의 산 속을 혼자서 헤매고 있다. 벌써 한 시간째다.
■ 난생 처음 캠핑트레킹…
숲에서 길을 잃고 한시간 반째 제자리 ‘뱅뱅’
다섯 시간 남짓 걸었을까. 드디어 캠핑장이다. 산장도 있다더니, 뜨거운 물에 씻을 수도 있다더니, 도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걸까?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푸세식’ 화장실과 얼음장 같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수도꼭지 하나가 전부인데. 불평지수가 높아지려는 찰나, 재빨리 모드를 전환한다. 앞으로 사흘간 머무를 곳이니 애정을 가져야지.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바로 옆이니 씻을 걱정도 없고, 한밤중에 볼일 보려고 들판을 헤맬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갓 구입한 텐트를 꺼내는 내가 어설퍼보였는지 한 남자가 다가와 거든다. 가족, 친지 10여명과 이곳으로 여름휴가를 온 루이스 비센테 안토니오 푸엔테스 고를로(칠레에선 보통 양가 할아버지 이름까지 붙여 이름을 짓는다) 아저씨. 산티아고에서 몇 년간 태권도와 합기도를 배워 한국말도 몇 마디 아는(‘관장님’이나 ‘사부님’ 같은) 친절한 군인 아저씨다. 루이스의 도움으로 텐트를 치고 나니 이제 안심이다. 한 가지 걱정은 검은 구름이 슬금슬금 하늘을 덮기 시작한다는 점. 루이스에게 날씨를 물으니 “날씨는 여자처럼 변덕스러워 도무지 알 수가 없어”라면서 비가 오긴 올 거란다.
지난 밤 천국과 지옥 사이를 급행으로 오갔다. 강풍을 동반한 폭우에 익사할 뻔했으나 현직 군인이 투입된 구출 작전으로 생환되었으니. 칠레 육군 중령 루이스의 판단은 정확했고, 구조작업은 신속했다. 그가 없었다면 난 폭우에 불어난 강물 위를 둥둥 떠다니며 이 동네 물고기들에게 보시를 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으리라. 비가 내리기 전부터 텐트를 옮기라는 루이스의 권유를 나는 끝내 무시했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하자 텐트 안으로 빗물이 들이치기 시작했다. 망연자실한 채 앉아 있자니 먹구름을 뚫고 들려오는 구세주의 목소리. “남희, 아유오케이?” 루이스의 열아홉 살짜리 아들 하비에르다. “노, 노, 아임 낫 오케이.” 사태를 파악한 그는 곧 텐트 주변으로 물고랑을 파기 시작했다. 번개 같은 솜씨다. 텐트 안으로 들이치던 흙탕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지 루이스가 찾아왔다. 내가 덮어쓸 판초까지 들고서. 결국 조카 헤르만의 텐트로 몸을 피한다. 찢어놓을 듯 텐트를 두들겨대던 빗소리가 멈춘 새벽, 텐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하늘을 올려다 본 순간, 무릎이 휘청거렸다. 어마어마한 별들이 빛나고 있다. 검은 밤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별들. 이 별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오늘 하루는 이 별들을 위한 기다림이었구나. 가슴까지 환하게 밝아진다. 모두들 잠든 밤, 오래도록 혼자서 별을 올려다봤다.
■ 불길한 상상과 고립감…
공포의 순간 시간은 흘러가던 속도를 멈춘다
별들로 인한 기쁨은 잠시, 다시 고통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텐트로 돌아와 잠을 청하지만 여름 텐트 사이로 스미는 한기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이 다 이렇지. 도대체 어떤 텐트인지 확인도 안 하고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다니. 밤새 추위에 떨다가 잠시 잠이 들었나보다. 나를 부르는 루이스의 목소리. 그쪽으로 건너가니 하비에르는 뜨거운 차를 건네고, 니콜라스는 나를 위해 불을 피우고, 마티아스는 옷을 덧입혀준다. 전생에 난 분명 공주였거나 거지였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주는 대로 넙죽넙죽 잘도 받고, 남들이 해주는 대접에 아무렇지 않은 걸 설명할 수가 없다. 아침까지 얻어먹고 나니 이미 해가 중천이다. 온천욕도 즐길 겸 왕복 6시간의 국립공원 탐사에 나선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타오르는 태양의 열기.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세 시간 남짓 걸으니 리오 블랑코 온천이다. 계곡 바로 옆에 돌로 쌓은 낮은 담이 전부인 천연 노천탕. 몸이 익을 것 같으면 계곡의 찬 물에 뛰어들어 열기를 식힌 후 다시 온천탕으로 돌아온다. 인공적인 개발이라곤 전혀 없어 자연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다만 지나치게 친환경적이어서 둥둥 떠다니는 이끼나 흙먼지도 몸에 둘러야 한다는 게 단점. 온천 옆은 캠핑장이다. 여기서 야영을 하면 밤에 온천욕을 즐길 수 있겠구나. 밤하늘의 무성한 별들은 부록으로 따라오겠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요조의 ‘우리는 선처럼 나란히 누워’를 들으며, 별을 따다 주겠다는 유치한 수작을 부려보면 어떨까.
돌아오는 길, 나를 기다리는 불행한 운명도 모른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르막을 오른다. 날은 어찌나 찌는지 죽을 맛인 데도, 장비를 안 메고 걷는다는 것만으로 신이 난다. 여기저기 쓰러져 누운 하얀 나무들의 몸피가 보인다. 고개를 들면 눈 덮인 산까지 불쑥 다가와 전망이 시원하다. 내 둔감한 오감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뒤늦게 감지한다. 같은 자리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길을 잃는 순간의 공포는 언제나 새롭다. 수백 미터만 나가면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출구를 찾을 수 없어 혼자 적막한 숲을 헤매는 그 순간, 시간은 흘러가던 속도를 멈춘다. 온갖 불길한 상상과 함께 극도의 고립감이 날렵한 사냥꾼의 그물처럼 순식간에 마음을 뒤덮는다. 도무지 길을 잃을 이유가 없는 곳에서 길을 잃고 만 자신에 대한 환멸과 불신도 따라붙는다. 해는 슬슬 넘어가기 시작하고, 공포와 초조함에 사로잡힌 나. 한 시간 반을 제자리에서 뱅뱅 돌고 있다. 결국 온천으로 되돌아가려는 순간, 흐릿한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길이라 확신해 몇 번을 왔다갔다 한 곳 옆으로 희미하게 다져진 길. 결국 난 칠레의 귀신이 될 운명은 아니었던 거다. 안도도 잠시, 그 다음부터는 해 떨어지기 전에 캠핑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산악마라톤이다. 다시는 혼자 캠핑을 오나봐라 맹세를 거듭하면서. 어스름이 밀려들 무렵, 야영장에 들어선다. 루이스의 가족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나왔다. 루이스는 어두워지고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찾아 나설 생각이었단다. 그 사이 젖은 내 텐트를 옮겨 햇볕에 바싹 말려놓기까지 했다. 그는 전생에 나와 무슨 인연이 있었던 걸까.
■ 그래도 난 살아있구나…
지구의 반대편에서 느낀 생환의 강렬한 기쁨
생환의 즐거움을 누린 다음날, 루이스네와 작별하고 길을 나선다. 태양은 구름 뒤로 몸을 숨긴 데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 걷기에 좋은 날씨다. 숲을 쓸고 가는 바람소리가 음악보다 감미롭다. 잠시 후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오는 하비에르, 마티아스와 마주쳤다. 작별 인사를 못해 아쉬웠는데 반갑다. 산을 넘어 도시로 나가(무려 1박2일에 걸쳐) 식량을 구입한 후 돌아오는 길이란다. 무슨 보급 투쟁을 하는 빨치산도 아닌데. 아버지가 19살, 16살 아들 둘을 참 강하게도 키운다.
푸콘으로 돌아와 와인까지 곁들인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 비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온다. 젖은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거리에 서 있다. 붉게 번져가는 저녁 하늘 아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 어딘가로 달려가는 차들, 불이 켜지기 시작한 창들. 시들어가는 수국과 장미의 향기. 나는 살아있구나. 살아서 지구의 반대편에서 여름밤을 맞으며 서 있구나. 여기까지 걸어온 나는 어디에서 멈추게 될까. 내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강렬한 기쁨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필자의 미투데이(http://me2day.net/skywaywalker, 닉네임 ‘Ontheroad’)에서 실시간으로 남미 여행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활화산 빌라리카 등반은 푸콘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야외활동 No.1.
삶이 이렇게 평온하기만 해도 되는 걸까. 갈등도, 상처도, 흔들림도 없는 날들이 고요히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쳐서 독이 되곤 했던 외로움마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일상은 평화로웠다. 간이 안 된 국처럼 싱거운 인생이라니. 한 번뿐인 삶을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내 유일한 무기는 타인의 슬픔을 알아채던 예민한 감정선뿐이었는데, 나는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잡문에 불과한 여행기마저 써지지 않았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외로움이 나를 여기까지 몰고 왔음을. 외로움이 내가 가진 전 재산이었음을. 결국 이번 여행은 제 발로 뛰어든 셈이었다. 한밤중에 나를 서성이게 하고, 타인의 온기를 더듬게 만들고, 찰나일지언정 소통을 꿈꾸게 하는 외로움 속으로. 짜릿한 지옥이냐, 지루한 천국이냐의 갈림길에서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그 결과, 지금 난 서울에서 삼만 리 떨어진 칠레의 산 속을 혼자서 헤매고 있다. 벌써 한 시간째다.
산티아고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10시간을 내려와 푸콘(Pucon)에 도착한 건 사흘 전. 연기를 내뿜는 활화산 빌라리카(칠레에는 2600개의 화산이 있고, 그 중 활화산은 86개)의 발치에 누운 호숫가 마을 푸콘은 칠레 호수지방의 대표격이다. 스키와 승마, 등산과 수영, 래프팅과 카야킹, 온천욕까지 온갖 야외활동을 즐길 수 있는 휴양지다. 나 역시 첫날은 해변의 파라솔 아래서 조지 오웰을 읽으며 소일한 후, 둘째 날은 해발고도 2847미터의 눈 쌓인 화산 빌라리카를 등반하고 내려와 온천욕을 즐겼다. 그리고 어제 아침, 내 인생 최초의 2박3일 캠핑 트레킹을 나섰다. 그 이름도 이국적인 후에르케 후에(Huerque Hue) 국립공원으로. 텐트며 코펠에 식량까지 다 짊어지고 혼자서 트레킹을 하기는 처음이다. 한여름 더위에 땀을 비 오듯 쏟으며 걷는 길. 잠시 자학도 해보지만 그리 심란하진 않다. 이토록 살아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몸을 쓰는 것 외에 어디서 찾아낼 수 있을까. 적어도 내게 있어 삶을 만끽하는 최고의 방법은 걷는 일이다. 키 큰 나무들이 깊은 그늘을 드리운 숲길을 혼자 걸으며 느끼는 충족감. 무거운 배낭이 어깨를 짓눌러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지금 행복하다는 사실만큼은.
■ 난생 처음 캠핑트레킹…
숲에서 길을 잃고 한시간 반째 제자리 ‘뱅뱅’
강과 폭포, 호수와 숲을 두루 갖춘 후에르케 후에 국립공원.
다섯 시간 남짓 걸었을까. 드디어 캠핑장이다. 산장도 있다더니, 뜨거운 물에 씻을 수도 있다더니, 도대체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걸까?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푸세식’ 화장실과 얼음장 같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수도꼭지 하나가 전부인데. 불평지수가 높아지려는 찰나, 재빨리 모드를 전환한다. 앞으로 사흘간 머무를 곳이니 애정을 가져야지.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바로 옆이니 씻을 걱정도 없고, 한밤중에 볼일 보려고 들판을 헤맬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갓 구입한 텐트를 꺼내는 내가 어설퍼보였는지 한 남자가 다가와 거든다. 가족, 친지 10여명과 이곳으로 여름휴가를 온 루이스 비센테 안토니오 푸엔테스 고를로(칠레에선 보통 양가 할아버지 이름까지 붙여 이름을 짓는다) 아저씨. 산티아고에서 몇 년간 태권도와 합기도를 배워 한국말도 몇 마디 아는(‘관장님’이나 ‘사부님’ 같은) 친절한 군인 아저씨다. 루이스의 도움으로 텐트를 치고 나니 이제 안심이다. 한 가지 걱정은 검은 구름이 슬금슬금 하늘을 덮기 시작한다는 점. 루이스에게 날씨를 물으니 “날씨는 여자처럼 변덕스러워 도무지 알 수가 없어”라면서 비가 오긴 올 거란다.
지난 밤 천국과 지옥 사이를 급행으로 오갔다. 강풍을 동반한 폭우에 익사할 뻔했으나 현직 군인이 투입된 구출 작전으로 생환되었으니. 칠레 육군 중령 루이스의 판단은 정확했고, 구조작업은 신속했다. 그가 없었다면 난 폭우에 불어난 강물 위를 둥둥 떠다니며 이 동네 물고기들에게 보시를 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으리라. 비가 내리기 전부터 텐트를 옮기라는 루이스의 권유를 나는 끝내 무시했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하자 텐트 안으로 빗물이 들이치기 시작했다. 망연자실한 채 앉아 있자니 먹구름을 뚫고 들려오는 구세주의 목소리. “남희, 아유오케이?” 루이스의 열아홉 살짜리 아들 하비에르다. “노, 노, 아임 낫 오케이.” 사태를 파악한 그는 곧 텐트 주변으로 물고랑을 파기 시작했다. 번개 같은 솜씨다. 텐트 안으로 들이치던 흙탕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지 루이스가 찾아왔다. 내가 덮어쓸 판초까지 들고서. 결국 조카 헤르만의 텐트로 몸을 피한다. 찢어놓을 듯 텐트를 두들겨대던 빗소리가 멈춘 새벽, 텐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하늘을 올려다 본 순간, 무릎이 휘청거렸다. 어마어마한 별들이 빛나고 있다. 검은 밤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별들. 이 별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오늘 하루는 이 별들을 위한 기다림이었구나. 가슴까지 환하게 밝아진다. 모두들 잠든 밤, 오래도록 혼자서 별을 올려다봤다.
■ 불길한 상상과 고립감…
공포의 순간 시간은 흘러가던 속도를 멈춘다
길을 잃고 헤맨 지점의 풍경.
별들로 인한 기쁨은 잠시, 다시 고통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텐트로 돌아와 잠을 청하지만 여름 텐트 사이로 스미는 한기에 잠을 이룰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이 다 이렇지. 도대체 어떤 텐트인지 확인도 안 하고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다니. 밤새 추위에 떨다가 잠시 잠이 들었나보다. 나를 부르는 루이스의 목소리. 그쪽으로 건너가니 하비에르는 뜨거운 차를 건네고, 니콜라스는 나를 위해 불을 피우고, 마티아스는 옷을 덧입혀준다. 전생에 난 분명 공주였거나 거지였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주는 대로 넙죽넙죽 잘도 받고, 남들이 해주는 대접에 아무렇지 않은 걸 설명할 수가 없다. 아침까지 얻어먹고 나니 이미 해가 중천이다. 온천욕도 즐길 겸 왕복 6시간의 국립공원 탐사에 나선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타오르는 태양의 열기.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세 시간 남짓 걸으니 리오 블랑코 온천이다. 계곡 바로 옆에 돌로 쌓은 낮은 담이 전부인 천연 노천탕. 몸이 익을 것 같으면 계곡의 찬 물에 뛰어들어 열기를 식힌 후 다시 온천탕으로 돌아온다. 인공적인 개발이라곤 전혀 없어 자연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다만 지나치게 친환경적이어서 둥둥 떠다니는 이끼나 흙먼지도 몸에 둘러야 한다는 게 단점. 온천 옆은 캠핑장이다. 여기서 야영을 하면 밤에 온천욕을 즐길 수 있겠구나. 밤하늘의 무성한 별들은 부록으로 따라오겠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요조의 ‘우리는 선처럼 나란히 누워’를 들으며, 별을 따다 주겠다는 유치한 수작을 부려보면 어떨까.
돌아오는 길, 나를 기다리는 불행한 운명도 모른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르막을 오른다. 날은 어찌나 찌는지 죽을 맛인 데도, 장비를 안 메고 걷는다는 것만으로 신이 난다. 여기저기 쓰러져 누운 하얀 나무들의 몸피가 보인다. 고개를 들면 눈 덮인 산까지 불쑥 다가와 전망이 시원하다. 내 둔감한 오감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뒤늦게 감지한다. 같은 자리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길을 잃는 순간의 공포는 언제나 새롭다. 수백 미터만 나가면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출구를 찾을 수 없어 혼자 적막한 숲을 헤매는 그 순간, 시간은 흘러가던 속도를 멈춘다. 온갖 불길한 상상과 함께 극도의 고립감이 날렵한 사냥꾼의 그물처럼 순식간에 마음을 뒤덮는다. 도무지 길을 잃을 이유가 없는 곳에서 길을 잃고 만 자신에 대한 환멸과 불신도 따라붙는다. 해는 슬슬 넘어가기 시작하고, 공포와 초조함에 사로잡힌 나. 한 시간 반을 제자리에서 뱅뱅 돌고 있다. 결국 온천으로 되돌아가려는 순간, 흐릿한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길이라 확신해 몇 번을 왔다갔다 한 곳 옆으로 희미하게 다져진 길. 결국 난 칠레의 귀신이 될 운명은 아니었던 거다. 안도도 잠시, 그 다음부터는 해 떨어지기 전에 캠핑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절박함에 산악마라톤이다. 다시는 혼자 캠핑을 오나봐라 맹세를 거듭하면서. 어스름이 밀려들 무렵, 야영장에 들어선다. 루이스의 가족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나왔다. 루이스는 어두워지고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찾아 나설 생각이었단다. 그 사이 젖은 내 텐트를 옮겨 햇볕에 바싹 말려놓기까지 했다. 그는 전생에 나와 무슨 인연이 있었던 걸까.
■ 그래도 난 살아있구나…
지구의 반대편에서 느낀 생환의 강렬한 기쁨
후에르케 후에 국립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빌라리카 화산.
생환의 즐거움을 누린 다음날, 루이스네와 작별하고 길을 나선다. 태양은 구름 뒤로 몸을 숨긴 데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 걷기에 좋은 날씨다. 숲을 쓸고 가는 바람소리가 음악보다 감미롭다. 잠시 후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오는 하비에르, 마티아스와 마주쳤다. 작별 인사를 못해 아쉬웠는데 반갑다. 산을 넘어 도시로 나가(무려 1박2일에 걸쳐) 식량을 구입한 후 돌아오는 길이란다. 무슨 보급 투쟁을 하는 빨치산도 아닌데. 아버지가 19살, 16살 아들 둘을 참 강하게도 키운다.
푸콘으로 돌아와 와인까지 곁들인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 비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온다. 젖은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거리에 서 있다. 붉게 번져가는 저녁 하늘 아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 어딘가로 달려가는 차들, 불이 켜지기 시작한 창들. 시들어가는 수국과 장미의 향기. 나는 살아있구나. 살아서 지구의 반대편에서 여름밤을 맞으며 서 있구나. 여기까지 걸어온 나는 어디에서 멈추게 될까. 내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강렬한 기쁨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필자의 미투데이(http://me2day.net/skywaywalker, 닉네임 ‘Ontheroad’)에서 실시간으로 남미 여행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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