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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남미걷기

[김남희의 남미 걷기](3) 아르헨티나의 바릴로체 트레킹

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

ㆍ흙 위에 파인 발자국마저 반갑다

해발고도 700m의 톤세크 호수와 프레이산장.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건너가는 날. 창밖으로는 가도 가도 끝없는 벌판이다. 지평선만 벌써 몇 시간째. 인적도 없는 광활한 초지 위로 풀을 뜯는 소들만 간간이 보인다. 너희는 이렇게 너른 들판에서 마음껏 풀을 먹으며 자라는구나. 구제역 따위는 걸릴 일도 없겠구나.

산 채로 생매장당하던 내 조국의 소들이 떠올랐다. ‘인구 일인당 소 두 마리’라는 아르헨티나의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는 이런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거였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펼쳐지는 구릉과 옥빛 호수, 하늘에도 겹이 있다는 듯 층층이 드리운 구름. 지구는 이렇게 아름다운 별이었구나. 눈을 뗄 수가 없다. 스페인 침략자들이 들이닥쳤던 수백 년 전, 그들은 어떻게 이 넓은 대지를 내 땅 네 땅 갈라가며 나눠 먹었을까. 인디언들이 땅을 사고팔 수 없다고 여겼던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거대하고 경이로운 대지를 어떻게 함부로 금 그어 쪼개고 나눈단 말인가. 막막하도록 가없는 대지를 달리고 달린 버스가 해 질 무렵에야 바릴로체에 들어선다.

‘남미의 스위스’라 불리는 산카를로스데바릴로체. 눈이 시리도록 푸른 나후엘후아피 호수를 둘러싼 안데스산맥의 풍경과 질 좋은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으로도 여행자를 사로잡는 곳이다. 나무로 지은 스위스 양식의 오두막집들 사이를 걷다 보면 푸른 호수가 시야를 채운다. 해발고도 770m의 바릴로체는 스키와 등반, 수상스포츠 등 다양한 야외활동을 즐기는 사람들로 1년 내내 붐비는 곳이다. 나 역시 타고난 특성과 소질을 살려 ‘산악 길잃기’ 분야의 기록경신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국립공원 사무실에 들러 날씨와 코스에 대한 정보를 얻고 지도를 구입했다. 바릴로체 산군을 한 바퀴 도는 5일짜리 코스는 3일째가 문제. 가이드가 있어야 하는 3일째는 건너뛰고, 2박3일과 1박2일 두 번에 나누어 걷기로 했다.

■ 외줄기 길에, 자갈길에, 가파른 절벽
도대체 뭘 위해 사서 고생하는 걸까


다음날, 식량과 장비를 꾸려 바릴로체 트레킹의 1부를 시작한다. 남미에서 가장 큰 스키센터라는 세로 카테드랄에서 리프트를 두 번이나 갈아타면서 푼타 프린세사(벌써 해발고도 1800m다)까지 올라간다. 30분 남짓 모래언덕을 올라 정상에 선 순간,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다.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설산 세로 카테드랄(2388m)의 웅장한 모습보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건 절벽 사이의 희미한 외줄기길이다. 설마 이런 고난도의 길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무거운 배낭 때문에 몸의 균형을 잡기도 어려운데 한 발만 삐끗하면 절벽 아래로 굴러 뼈도 못 추릴 판이다. 온몸의 근육을 다 긴장시킨 채 한 발 한 발 옮기고 있자니 벌써 찾아왔다. 뼛속까지 회의주의자이자 골수까지 비관주의자인 내 오랜 벗이.

도대체 뭘 위해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거야? 고생 끝의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행복은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잖아? 저 아랫마을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며 호숫가를 산책하는 정도로는 안되는 거야? 몸 안의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한 후에 다시 채워내는 충족감이라고? 대자연 속에서 해가 지고 뜨는 모습을 보며 얻는 평화와 만족이라고? 웃기시고 계시네. 혹시 남들과 다른 여행을 하겠다는 허영심은 아니야?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비관주의자의 대공세에 늘 기를 펴지 못하는 낙관주의자가 미약한 반항을 시도한다. 아니, 나도 알아.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러니까, 이건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욕심인 거야.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욕망. 소심하고, 겁 많고, 가리는 것 많은 내가 얼마나 더 스스로를 확장시켜 가는지를 보고 싶은 욕구, 그거면 안되는 거야? 왜 안되겠어. 갈 때까지 가보고, 할 때까지 해보라고. 네가 한 시간 안에 길 잃고 징징대는데 십만원 건다. 두고 보자고! 나를 야유하다 지친 벗이 조용해질 무렵, 나 역시 완전히 풀린 다리로 톤세크 호숫가의 캠핑장에 들어선다. 세 시간 반을 걷고 이렇게 지칠 수도 있다니. 저녁을 지어먹고, 옆 텐트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달이 환해 별빛이 흐린 밤, 몸이 무거워 잠이 오질 않는다.

네그로를 등지고 걷는 트레커.


산을 넘어온 햇살이 텐트를 비출 때에야 눈을 뜬다. 태양은 이미 뜨겁게 내리쬐는데 바람은 맵다. 고생은 어제로 끝이 아니었다. 급경사의 자갈길이 날카로운 선을 그리며 기다리고 있다. 발이 푹푹 빠지고 쭉쭉 미끄러지는 흙길. 세계선수권 대회를 앞둔 유도 선수들이 하체단련용으로 쓰면 딱 좋을 코스다. 먼지투성이가 되어 계곡으로 내려서니 숲이다. 코끝에 맴도는 나무의 ‘내음’, 경쾌한 물소리, 누군가를 부르듯 짧은 울음을 던지는 새들, 단단한 흙의 감촉. 아직은 서늘한 아침 공기. 아, 이런 길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밤 거센 바람소리에 내내 뒤척였다 해도, 혼자서 매끼 같은 반찬 하나로 밥을 먹는다 해도, 때로 길을 잃고 두려움에 내몰린다 해도, 그 모든 서글픔을 순식간에 보상해준다.

배낭을 내려놓고 물가에서 잠시 쉰다. 숲을 빠져나오니 다시 자갈 오르막. 오르막이 끝났나 싶었더니 긴 자갈길 너머 다시 오르막. 길 위에 어쩌면 이렇게 사람이 없을까. 젖은 흙 위에 움푹 파인 발자국마저 반갑다. 나보다 앞서 이 길을 걸어간 누군가의 존재. 그 발자국 위에 가만히 내 발을 얹어본다. 어디서 왔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길을 갔을까. 그도 나처럼 사람이 그리웠을까. 바위 그림자도, 외따로 선 나무 한 그루도, 다 사람처럼 보이는 오후. 햇살은 뜨겁고, 바람은 쇳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길은 얼마나 남았을까.

6시간 후, 인생 최악의 내리막길을 내려와 계곡으로 들어서니 야영장이다. 다음날 다섯 시간 남짓 걸어 도로로 나온 후 차를 얻어 타고 바릴로체로 돌아온다. 사흘 만에 씻고 거울을 보니 입술이 터졌다. 힘에 부치긴 했나보다. 몸도 나이를 먹는 건데,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이리 힘들다니. 오늘이 보름이다. 정월대보름. 같은 방을 쓰는 사라, 킴과 맥주를 마시며 땅콩으로 부럼을 깨물었다. 서로에게 “내 더위 사가라”고도 외치면서.

■ 나보다 앞서 걸어간 누군가의 존재…
그도 나처럼 사람이 그리웠을까


하루를 쉰 다음날, 다시 버스에 오른다. 그렇게 고생을 했으면서도 이 트레킹을 완수하겠다는 고집이라니. 이번 생의 콘셉트는 “사서 고생”인 걸까. 이번에는 나도 약아져서 캠핑은 포기하고 산장을 이용하기로 했다. 종점에 내려 ‘이탈리아 산장’ 이정표가 적힌 길로 들어선다. 커다란 잣 열매들이 굴러다니는 길옆으로 계곡이 따라온다. 캠핑장을 지나니 가파른 오르막. 눈앞의 거대한 암봉 위로 길고 가는 폭포가 떨어져 내린다.

숲으로 이어지던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 엽서의 그림 같은 풍경이 숨어 있었다. 2000m를 넘는 검은 바위 산(그래서 이름도 세로 네그로)의 치마폭에 감긴 네그라 호수. 앙증맞게 서 있는 붉은 지붕의 산장. 산장에서 점심을 먹는다. 산장지기들이 다음 산장까지 7시간 이상 걸린다며 겁을 준다. 이제 2시니 해가 지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잠시 망설이다 다시 배낭을 멘다. 내 인생 최악의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내 인생에 더 이상의 트레킹은 없다”고 맹세하며 걷던 길.


호수를 끼고 돌며 언덕을 넘는다. 고갯마루에 도착하니 다시 또 하나의 봉우리가 기다리고 있다. 바위들의 공동묘지 같은 길. 누군가 거대한 채석장을 만들어놓은 듯 섬뜩하게 뾰족한 바위들.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무릎이나 얼굴이 완전히 나갈 게 틀림없다. 머리 위로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 골짜기를 돌아온 바람이 몸을 흔든다. 바위 무덤의 꼭대기에 올라서니 정면에 거대한 눈산이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관목숲의 골짜기. 다시 내리막이다. 반대편에서 올라온 세 명의 남자,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라 반갑다. “이제 엄청나게 힘든 길이 기다리고 있어요. 조심하세요.” 카메라의 사진을 보여주며 길을 알려주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가파른 절벽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돌무덤과 붉은 동그라미가 가리키는 곳 어디도 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 일반인을 위한 트레킹 코스 맞는 거야? 특전사의 훈련 코스가 이런 곳 아닐까. 발은 계속 미끄러지고, 바위를 잘못 디디면 돌들이 쏟아져 내린다. 길을 잃어 쏟아져 내리는 바위들 틈에서 갈팡질팡하기를 몇 번. 바위에 깔려 죽거나 추락해서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월트디즈니 만화영화의 고전인 <밤비>의 배경이 되었다는 바릴로체. 이건 <월하의 공동묘지>의 배경이 되었어야 할 곳 아닌가. 가까스로 정상에 서니 발아래 나후엘후아피 호수와 섬을 둘러싼 산들이 늘어서 있다. 감동할 기력도 없다. 내려가는 길도 가파른 바윗길이라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산장에 발을 딛는 순간, 온몸의 긴장이 무너지며 힘이 빠진다. 오늘 꼬박 9시간을 걸었다. 콜로니아 스위사부터 걸어왔다고 하니 산장지기도 엄지손가락을 세워준다. 키가 2m는 될 것 같은 덴마크 청년, “이 길이 위험하다고 해서 동행자를 찾으려고 어제부터 여기 머물고 있는데, 대단하네요”란다. 산장지기에게 저녁 메뉴를 물으니 직접 잡은 야생 토끼 고기가 있단다. 오늘 내 삶이 야생이었으니 그걸로 됐다. “미안, 채식주의자예요. 오믈렛에 홍차 한 잔 주세요.” 호수 너머 낮은 산 위로 열엿새 달이 떠오르고 있다. 붉은 달을 보며 맹세한다. 내 인생에 더 이상의 트레킹은 없다. 이제는 나도 거리의 여행자가 되어 분수에 맞는 삶을 살리라.

※필자의 미투데이(http://me2day.net/skywaywalker, 닉네임 ‘Ontheroad’)에서 실시간으로 남미 여행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