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길의 끝에서 더 나은 꿈 하나 품고 돌아갈 수 있기를
고도 3399m. 희박한 공기. 푸른 물감을 휙 뿌려놓은 듯 거칠 것 없이 새파란 하늘. 손을 뻗으면 잡힐 듯 내려앉은 구름. 그 너머 안데스 산맥의 능선들. 여기는 고대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그 이름처럼 한때 ‘세계의 배꼽’이자 우주의 중심이었던 곳.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에 800만의 인구를 거느렸던 대제국 잉카. 그 중 100만의 주민이 거주했던 쿠스코는 잉카인들이 신성시한 퓨마의 형상으로 세워졌다. 1531년, 스페인 용병 출신의 상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침략했을 때 잉카인들은 그를 전설의 창조주 비라코차로 믿었다. 흰 피부를 가진 창조주가 돌아온다는 그들의 오랜 믿음 덕분에 고작 180명의 병사뿐이었던 피사로는 거대한 제국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2만4000㎞에 이르는 도로와 안데스 산맥 곳곳에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로를 건설했던 빼어난 문명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 도시의 중심지인 아르마스 광장에 들어선 순간, 심장이 쿵쿵거리고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잉카제국의 기반 위에 스페인식 건축물이 세워진 광장은 그 어떤 도시의 광장보다 예뻤다. 잉카 최후의 왕 투팍 아마루가 처형된 광장에 남아있는 잉카 제국의 흔적은 석벽과 돌길뿐이었지만. 태양의 신전 쿠리칸차가 있던 자리에는 산토도밍고 교회가 들어섰고, 와이나 카파쿠 궁전 터에는 라 콤파냐 헤수스 교회가 서 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 도시의 모든 신전과 궁전을 부수고, 그 안의 금으로 된 신상과 집기를 강탈해 녹인 후 스페인으로 실어갔다. 사라진 제국의 옛 수도는 그렇게 정복자의 흔적과 뒤섞여 슬픈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광장 주변의 골목을 기웃거리며 나는 반복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만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이 도시에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나는 이미 행복해지고 있었다. 영화 촬영을 위해 한국에서 날아올 전수일 감독님 일행을 기다리던 중이었으니. 여행 중에 만나는 한국인은 양가적인 존재다. 너무 없으면 허전하고, 너무 많으면 지겨워지는. 남미를 여행하는 동안은 늘 한국말과 한국 사람에 대한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만난 감독님을 비롯한 네 명의 한국 남자들이 얼마나 반가운 존재였겠는가! 그들 덕분에 나는 평소의 네 배쯤 웃고, 두 배쯤 잘 먹고, 겁도 없이 밤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보름간 쿠스코 근교를 다니며 촬영지를 물색하고 돌아올 때마다 우리를 맞아주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가 머물던 민박 ‘사랑채’의 주인장 길동수(49)·박은미(38) 부부. 2004년 말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의 단원으로 이곳에 왔다가 정착한 분들이다. 당시 코이카가 진행하던 ‘코라오 도자기 학교’ 프로젝트의 실행을 맡아 도예 강사로 일했던 두 사람. 3년의 임기를 수행하는 동안 처음에는 일하는 방식이 맞지 않아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하지만 여기는 멀고 먼 타국. 같은 모국어를 쓰는 이가 곁에 있다면 어찌 위로가 되지 않을까.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영화팀과 장소 헌팅을 다니던 어느 날, 마추픽추로 가는 길목에 있는 코라오 도자기 학교를 찾았다. 쿠스코에서 산기슭을 따라 약 30분을 달려가면 나오는 이 마을은 대부분의 주민이 감자 농사와 가축 사육으로 살아가던 가난한 시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외협력의 모범 사례로 꼽혀 많은 이의 주목을 받는 마을이 되었다. 도자기 학교에서 도예를 배운 학생들이 그릇을 팔아 자립을 하고, 주변에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기념품 가게들까지 들어서 아예 관광버스들이 쉬어가는 코스가 되었으니. 주홍색 타일을 얹은 학교는 제법 컸다. 건물 벽에 태극기가 보이고, 학교를 만들고 도예를 가르친 세 코이카 단원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다. 일요일인데도 어느 학생이 도자기에 무궁화를 그려넣고 있었다. “한국꽃이에요”라고 말하며. 전시장에서는 학생들이 만든 컵과 그릇과 꽃병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잉카의 문양이 한국의 전통 도예기법과 만난 작품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세계의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동안 일본의 국제협력단 자이카(JAICA)의 흔적을 참 많이도 마주쳤다. 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곳곳에는 자이카의 도움으로 세워졌다는 학교, 다리, 건물들이 가득했다. 그때마다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함께 밀려들었는데, 이제는 조금씩 코이카의 자취를 보게 된다. 아직 우리나라의 대외원조 액수는 국가경제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규모지만 조금씩 커지리라.
보름의 일정을 마친 일행들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나는 사랑채에 닷새를 더 머물렀다. 아픈 허리를 핑계 삼았지만 사실은 속정 깊은 부부 곁을 떠나기 싫어서였다. 지난해 2월에 태어난 도영이는 내 조카 연우를 떠올리게 해 보고 있는 것만으로 기쁨이기도 했다. 저녁 무렵 식당에 나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돌아와 맥주를 나누는 시간도 좋았다. 어느 밤, 은미씨에게 물었다. “페루에 살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뭐예요?” “가족과 친구들이 힘든 일을 겪을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거요.” 정 많은 은미씨다운 대답이었다. “그럼 가장 좋은 점은 뭔데요?” “주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거요. 여기선 남의 일에 함부로 간섭하는 일도 없고, 행색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니까요.”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나 역시 여행을 다니면 다닐수록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고 있는지를 깨닫곤 했으니. 그렇게 은미씨와 놀고 있던 어느 날, 동수씨가 상기된 얼굴로 가게에 들어섰다. 한국 문화를 알리는 문화원으로 쓰기 위한 사무실을 막 계약하고 오는 길이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한국 영화도 상영하고, 한국춤이나 노래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거예요”라는 동수씨의 자랑에 은미씨가 끼어든다. “만날 사고만 쳐요. 그 뒷수습은 다 내가 해야 하는데…”라며 툴툴거리지만 누구보다 그를 밀어주는 사람은 그녀가 아닐까.
동수씨와 그의 학생들은 모두 꿈을 꾸는 사람들이었다. 동수씨의 꿈은 돈을 모아 중장비 학교를 여는 것. 아버지들에게 중장비 기술을 가르쳐 그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게 그의 바람이었다. “이 나이에 꿈을 꿀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요.” 그의 학생들인 페루 처녀들의 꿈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의 나라말을 배우고, 그렇게 배운 한국어로 직업을 갖고, 언젠가 한국에 가 보겠다는 꿈. 꿈을 꾸는 이들의 얼굴은 빛이 난다. 그 꿈이 나만을 위한 꿈이 아니라면 빛이 번져서 주변까지 물들인다. 나는 잉카의 옛 도시에서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엘 콘도르 파사>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집단 창작의 꿈을 꾸는 이들, 더 나은 페루를 꿈꾸는 한 부부, 그리고 꿈의 중심에 한국을 얹어놓은 페루의 처녀들을.
그들이 지녔던 풍부한 황금으로 인해 망해야 했던 잉카의 옛 도시는 황금만을 좇는 시대에 황금이 아닌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이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들 덕분에 나도 내가 가는 길을 다시 돌아본다. 내가 여전히 꿈꾸는 삶을 살고 있는지, 그 꿈이 이웃과 더불어 가는 길인지를. 아직 남은 먼 길 위에서 나는 내가 쌓아온 성벽의 모든 틈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질문을 던지고, 그 성을 부수고, 다시 새롭게 지으면서 걸어갈 것이다. 그래서 그 길의 끝에서 더 나은 꿈 하나를 품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결국 모든 여행은 돌아가기 위해 떠나온 것이므로. 도보여행가·작가
시리즈 끝
필자의 미투데이(http://me2day.net/skywaywalker, 닉네임 ‘Ontheroad’)에서 실시간으로 남미 여행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고도 3399m. 희박한 공기. 푸른 물감을 휙 뿌려놓은 듯 거칠 것 없이 새파란 하늘. 손을 뻗으면 잡힐 듯 내려앉은 구름. 그 너머 안데스 산맥의 능선들. 여기는 고대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 그 이름처럼 한때 ‘세계의 배꼽’이자 우주의 중심이었던 곳.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북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에 800만의 인구를 거느렸던 대제국 잉카. 그 중 100만의 주민이 거주했던 쿠스코는 잉카인들이 신성시한 퓨마의 형상으로 세워졌다. 1531년, 스페인 용병 출신의 상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침략했을 때 잉카인들은 그를 전설의 창조주 비라코차로 믿었다. 흰 피부를 가진 창조주가 돌아온다는 그들의 오랜 믿음 덕분에 고작 180명의 병사뿐이었던 피사로는 거대한 제국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2만4000㎞에 이르는 도로와 안데스 산맥 곳곳에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로를 건설했던 빼어난 문명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졌다.
이 도시의 중심지인 아르마스 광장에 들어선 순간, 심장이 쿵쿵거리고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잉카제국의 기반 위에 스페인식 건축물이 세워진 광장은 그 어떤 도시의 광장보다 예뻤다. 잉카 최후의 왕 투팍 아마루가 처형된 광장에 남아있는 잉카 제국의 흔적은 석벽과 돌길뿐이었지만. 태양의 신전 쿠리칸차가 있던 자리에는 산토도밍고 교회가 들어섰고, 와이나 카파쿠 궁전 터에는 라 콤파냐 헤수스 교회가 서 있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이 도시의 모든 신전과 궁전을 부수고, 그 안의 금으로 된 신상과 집기를 강탈해 녹인 후 스페인으로 실어갔다. 사라진 제국의 옛 수도는 그렇게 정복자의 흔적과 뒤섞여 슬픈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광장 주변의 골목을 기웃거리며 나는 반복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만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이 도시에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나는 이미 행복해지고 있었다. 영화 촬영을 위해 한국에서 날아올 전수일 감독님 일행을 기다리던 중이었으니. 여행 중에 만나는 한국인은 양가적인 존재다. 너무 없으면 허전하고, 너무 많으면 지겨워지는. 남미를 여행하는 동안은 늘 한국말과 한국 사람에 대한 갈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만난 감독님을 비롯한 네 명의 한국 남자들이 얼마나 반가운 존재였겠는가! 그들 덕분에 나는 평소의 네 배쯤 웃고, 두 배쯤 잘 먹고, 겁도 없이 밤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쿠스코의 중심지인 아르마스 광장의 야경. 이 광장에서 잉카 최후의 왕 투팍 아마루가 처형되었다고 한다.
한국국제협력단 단원으로 이곳에 왔다가 정착한 길동수씨와 그에게 한글을 배우는 페루 처녀들.
보름의 일정을 마친 일행들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나는 사랑채에 닷새를 더 머물렀다. 아픈 허리를 핑계 삼았지만 사실은 속정 깊은 부부 곁을 떠나기 싫어서였다. 지난해 2월에 태어난 도영이는 내 조카 연우를 떠올리게 해 보고 있는 것만으로 기쁨이기도 했다. 저녁 무렵 식당에 나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돌아와 맥주를 나누는 시간도 좋았다. 어느 밤, 은미씨에게 물었다. “페루에 살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뭐예요?” “가족과 친구들이 힘든 일을 겪을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거요.” 정 많은 은미씨다운 대답이었다. “그럼 가장 좋은 점은 뭔데요?” “주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거요. 여기선 남의 일에 함부로 간섭하는 일도 없고, 행색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니까요.”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나 역시 여행을 다니면 다닐수록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고 있는지를 깨닫곤 했으니. 그렇게 은미씨와 놀고 있던 어느 날, 동수씨가 상기된 얼굴로 가게에 들어섰다. 한국 문화를 알리는 문화원으로 쓰기 위한 사무실을 막 계약하고 오는 길이었다.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한국 영화도 상영하고, 한국춤이나 노래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거예요”라는 동수씨의 자랑에 은미씨가 끼어든다. “만날 사고만 쳐요. 그 뒷수습은 다 내가 해야 하는데…”라며 툴툴거리지만 누구보다 그를 밀어주는 사람은 그녀가 아닐까.
문득, 일요일에 그를 따라나섰던 일이 떠올랐다. 2년 넘게 일요일마다 이어져온, 노숙자들에게 빵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그에게 한글을 배우는 페루 처녀 10여명이 함께 샌드위치를 만들고, 시장과 골목을 돌아다니며 빵을 나눠줬다. 그는 학생들 뒤를 따라가며 그녀들이 놓친 노숙자나 아이들을 말없이 가리켰다. 가난하고, 늙고, 병든 잉카의 후예들은 그가 나눠주는 빵을 고맙게 받았다. 봉사는 ‘가장 순정한 형태의 이기주의’라고 했던가. 타인을 위하는 일을 통해 위로받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300개의 빵을 다 나눠준 후 식당으로 돌아온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다. 대부분 20대 초반인 그녀들은 SS501이나 슈퍼주니어, 빅뱅 같은 한국 아이돌 그룹의 팬클럽 회원들이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의 모국인 한국을 제대로 알고 싶어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그를 찾아왔단다. 휴대폰에서 현빈의 사진을 찾아 보여주니 <김삼순>의 현빈이라며 비명을 지른다. 이미 인터넷으로 <시크릿 가든>을 본 친구들도 있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못지않게 페루에도 한류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동수씨와 그의 학생들은 모두 꿈을 꾸는 사람들이었다. 동수씨의 꿈은 돈을 모아 중장비 학교를 여는 것. 아버지들에게 중장비 기술을 가르쳐 그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게 그의 바람이었다. “이 나이에 꿈을 꿀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요.” 그의 학생들인 페루 처녀들의 꿈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의 나라말을 배우고, 그렇게 배운 한국어로 직업을 갖고, 언젠가 한국에 가 보겠다는 꿈. 꿈을 꾸는 이들의 얼굴은 빛이 난다. 그 꿈이 나만을 위한 꿈이 아니라면 빛이 번져서 주변까지 물들인다. 나는 잉카의 옛 도시에서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엘 콘도르 파사>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집단 창작의 꿈을 꾸는 이들, 더 나은 페루를 꿈꾸는 한 부부, 그리고 꿈의 중심에 한국을 얹어놓은 페루의 처녀들을.
그들이 지녔던 풍부한 황금으로 인해 망해야 했던 잉카의 옛 도시는 황금만을 좇는 시대에 황금이 아닌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이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들 덕분에 나도 내가 가는 길을 다시 돌아본다. 내가 여전히 꿈꾸는 삶을 살고 있는지, 그 꿈이 이웃과 더불어 가는 길인지를. 아직 남은 먼 길 위에서 나는 내가 쌓아온 성벽의 모든 틈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질문을 던지고, 그 성을 부수고, 다시 새롭게 지으면서 걸어갈 것이다. 그래서 그 길의 끝에서 더 나은 꿈 하나를 품고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결국 모든 여행은 돌아가기 위해 떠나온 것이므로. 도보여행가·작가
시리즈 끝
필자의 미투데이(http://me2day.net/skywaywalker, 닉네임 ‘Ontheroad’)에서 실시간으로 남미 여행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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