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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의 길인생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27) 세상 도처가 눈물겨운 고향, ‥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27) 세상 도처가 눈물겨운 고향, 돌아가야 할 집이었다

이원규| 시인

ㆍ연재를 마치며

활짝 핀 복사꽃이 섬진강 강물에 얼굴을 비추고, 물버들이 연둣빛 새싹을 내밀었다. 삽질을 피해 유일하게 생태적인 강의 모습을 간직한 이곳에 천연기념물 수달이 살고 있다. | 이원규 시인 촬영

지난 6개월 반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매주 2~3일 정도는 서울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길 위에 있었다. 줄잡아 2만5000㎞는 돌아다녔으니 모터사이클을 타고 지구 반 바퀴 이상을 달렸다.

제대로 야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돌이켜보면 지난 겨울의 폭설과 한파마저 정신 번쩍 들게 하는 길동무였다. 두 달 전에 진단 받은 늑막염의 통증마저 좋은 길동무가 되었다. 폐 속에서 700㎖의 흉수를 빼내고 난생 처음으로 아침마다 15알의 독한 약을 먹으며 두어 시간 뒤 붉은 오줌을 누는 것 또한 적어도 앞으로 6개월 동안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동안 집과 집을 이으면 그것이 길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수정해야 했다. 길이 곧 집이었던 것이다. 발길 닿은 곳이 길이자 집이었고, 하룻밤 머무는 그곳이 어디나 이미 도착해야할 집이었다. 때로는 뚜렷한 목적이나 목표도 없이 어슬렁거렸다. 난생 처음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카메라 한 대와 볼펜 한 자루를 들고 세상 곳곳을 둘러보았다. 그 모든 곳이 그립고도 그리운 곳이자 서럽고도 서러운 곳이었다. 세상 도처의 길들이 눈물겨운 고향이었고 날마다 돌아가야 할 집이었다.

벚꽃 다 져버린 섬진강변에 쪼그려 앉아 그동안 만난 사람들과 내 발길·눈길이 머물렀던 곳들을 일일이 복기하며 안부를 물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로 “아야, 밥은 묵고 댕기냐?”며 안쓰러운 눈길로 말을 걸던 벌교장터의 2000원짜리 국밥집 김행금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돼지국밥을 퍼주는 할머니의 손길이 섬진강변 봄햇살처럼 따스하게 내 손을 잡아주는 것만 같다. 세상이 한결 포근해졌다.

그동안 만난 사람들은 모두 ‘지금 바로 여기에서’ 가장 열심히 사는 이들이었다. 잘나거나 유명하지 않지만 묵묵히 ‘어디에서나 주인으로 사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자세로 이 세상을 빛나게 하는 이들이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비로소 살 만한 곳이 되었다. 그리하여 취재하기에는 더 힘들었다. 말을 붙이는 것도 힘들었지만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취재나 인터뷰 형식을 버렸기 때문이다. 행여 그들의 일상에 조금의 피해라도 주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고, 이 사람들 또한 언제나 나서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알려지는 것에 대해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속얘기를 듣기 위해 몇 번이고 찾아가야만 했다.


카메라와 노트를 내려놓고 이틀 이상 친해지다 보면 저절로 얘기들이 술술 풀려나왔다. 순천 중앙시장의 구두수선공 황충식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다섯 번 정도 찾아가 함께 순대 안주에 소주를 마시고 장기를 두는 등 어느 정도 친해지자 촬영을 허락했다. 그러고는 “사실 나가 외눈박이여. 한 짝이 하나도 안 보여부러. 오른쪽 눈이 의안이여”라며 독백하듯 속말을 내뱉었다. 구두와 가방 등을 수선하려면 재봉질과 바느질 등을 해야 하는 데 지장이 많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다. 일종의 ‘영업비밀’일 수도 있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있었다. 가스폭발 사고 이전이나 이후나 눈을 감고도 일을 잘할 수 있을 정도로 ‘구두 수선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 누구를 만나도 인터뷰어처럼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마음을 열고 하는 말들을 받아 적었을 뿐이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한 수 배우고, 또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던 것이다. ‘낙동강 소녀 가수’ 강언나도 조금 친해져서 함께 놀았을 뿐 그 어떤 질문도 필요치 않았다. 다문화가정 1세대인 언나네는 여전히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언나는 언제나 당당했으며 동생 경문이와도 유난히 우애가 좋았다. 금포마을을 네 번 정도 찾아가고 마을회관에 며칠씩 머물면서 16년차 다문화가정 1세대의 살림살이를 엿볼 수 있었으며, ‘가난의 대물림’ 또한 참혹할 정도라는 사실을 가슴 아프게 직시해야 했다.

낙동강변 마을인 고령군 개진면 오사마을에서 만난 101세의 장영분 할머니를 잊을 수 없다. “하이 참, 내 생전에 농사 못 지 먹게 하는 나라도 첨(처음)이고, 갱빈(강변)에 감자 마늘 양파도 못 심게 하는 대통령도 첨이라카이, 난생 첨!” 하면서 현 정부의 4대강 사업에 일침을 가하던 영남지역의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고인이 되었다. 그 마을의 오사마을이용소 박영필씨를 만나러 갔다가 인사라도 하려고 들렀더니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지난해 우연히 할머니의 ‘100세 생일잔치’에 참석했었다. 효자 아들 부부와 4대의 친지들이 온 마을사람과 마련한 한마당 축제는 감동 그 자체였다. 내년 생신잔치에도 꼭 참석하고 싶었는데 아쉬울 뿐이다.

그리고 곡성의 ‘지푸라기 할배’ 신남균씨, 남원의 여자대장장이 정길순씨, ‘천수만 철새지킴이’ 김신환 박사, 여주군 남한강변의 홍일선 시인, 전주의 ‘늦깎이 화백’ 한숙자 할머니, 남해의 ‘웃음치료 전도사’ 김향숙 보건소장 등의 환한 얼굴들이 눈에 선하다. 이들 중에는 경향신문에 실린 뒤에 텔레비전 등 각종 매체에서 연락이 빗발치는 바람에 고생했다는 후문도 있다. 최근까지 TV 출연 섭외 등에 시달리고 있는 이들에게 새삼 죄송하고 미안할 따름이다. 모두들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고 제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괜히 내가 끼어들어 분란만 일으킨 게 아닌지 자성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소식도 있다. ‘위기의 구례 섬진강 둑길’에서 문제 삼았던 ‘시멘트 자전거도로’는 더 이상 포장하지 않기로 결론이 나는 것 같다. 섬진강변 비포장길을 그대로 사용하며 개나리·원추리꽃을 심겠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여전히 ‘4대강 죽이기 사업’이다.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4대강과 마주치게 되는데,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기식 공사는 ‘단군 이래 가장 큰 재앙’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부수립 후 최대의 땅투기뿐만 아니라 생태적인 지천에까지 그 무지막지한 칼날이 들이닥칠 기세다. 아니 ‘고향의 강’ 사업 등 병든 언어, 허울 좋은 이름으로 이미 진행되고 있다. ‘녹색성장’의 이름표를 단 역주행의 폭주기관차가 마치 ‘쇠를 먹는 불가사리’처럼 한반도 전역을 유령처럼 휩쓸고 다니는 것이다. 끝끝내 도끼로 제 발등 찍는 것은 자유지만 이미 파헤쳐진 4대강은 어찌해야 하나 가슴이 미어질 뿐이다.


그동안 함께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살아가고자 했던 나의 길동무 말똥가리 ‘천’이 마침내 야생의 세계로 돌아갔다. 천수만에서 밀렵꾼의 총을 맞고 한쪽 날개를 다친 채 내게로 왔던 ‘천’은 1년3개월 동안 함께 살다가 지난 4월초에 지붕을 넘어 날아갔다. 비록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3m 정도는 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었다. 그동안 맹금류다운 야성의 말똥가리를 위해 해준 게 있다면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뿐이었다. 말똥가리 ‘천’의 후원자였던 하동읍내 BBQ치킨의 최석봉씨(섬진강과지리산을사랑하는사람들 운영위원장) 도움으로 닭고기 부산물을 먹여왔는데, 먹이를 줄 때마다 조용히 얼른 자리를 피해주고는 했다. 행여 먹이로 길들이거나 그럴 의도를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어릴 적 참매를 키울 때는 개구리 등의 먹이로 길들여 내 어깨 위에는 언제나 참매 두 마리가 수호신처럼 앉아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다쳤다하더라도 ‘천’의 야성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말똥가리 ‘천’도 내가 보는 앞에서는 절대로 닭고기를 먹지 않았다. 나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역시 맹금류인 말똥가리답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하여 말똥가리의 집을 넓고 높게 그물로 지으면서도 지붕을 3분의 1 정도 열어놓았다. 날개가 어느 정도 다 나아 지붕을 넘을 수 있으면 야생으로 돌아가라는 뜻에서였다. 지난 겨울에 1차 탈출을 시도해 지붕을 넘어 아랫마을까지는 날아갔지만 높이 활공할 수가 없어 먹이활동이 어려운데다 폭설에 날씨가 너무 추워 더 이상 가지는 못했다. 1주일 만에 다시 데려와 집에 넣으니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잠잠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봄이 오자마자 다시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금 서운하지만 그래도 축하할 일이 아닌가. 홀가분하다. 날개를 다친 것도 운명이라면 내 가까이 살다가 야생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운명일 것이다. ‘암컷과 수컷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뿐이어서 짝을 이뤄야만 날 수가 있다는 상상의 새 비익조(比翼鳥)처럼,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어(比目魚)처럼’ 더불어 살고자 했지만 이마저 나의 미몽일 뿐이었다는 것을 절감한다. 문득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이형기 선생의 시 ‘낙화’가 떠오른다.

한동안 말과 글을 줄이고 건강부터 챙기며 살아야겠다. 일단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의 말무덤(言塚)에 찾아가 예를 갖추고 싶다. 다시 길동무도 없이 홀로 길을 나선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모든 길이 곧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