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원규의 길인생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25) 세계 최대의 북 ‘천고’ 만든 이석제씨

이원규 | 시인

ㆍ‘하늘북’을 울리다, 이 땅의 생명평화를 지키라고

살다보면 느닷없이 마른하늘에 천둥 벼락이 칠 때가 있다. 더 늦기 전에 사생결단의 때가 왔음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데 늘 우유부단하다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는 경고로 천둥이 치고 하늘북(天鼓)이 우는 것이다. 몸의 위기, 마음의 위기가 아주 가까이 다가서고,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말을 뼛속 깊이 새기기 전에 삶은 때로 분명하고도 명쾌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역천(逆天)의 기운 속에서 날마다 이명처럼 천고가 울어도 아직 그 뜻을 몰라 우물쭈물하고만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좀 더 분명한 하늘북소리를 듣고 싶었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난계국악박물관 옆에 지난해 가을 첫 모습을 드러낸 세계 최대의 북 ‘천고’를 보러갔다. 이 북은 울림통 길이 6m, 폭 6.5m, 울림판 지름 5.5m, 무게 7t이 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이다. 이 북을 만드는데 15t 트럭 4대 분량의 150년 이상 된 소나무 원목과 어미 소 40마리의 가죽이 재료로 쓰였다. 현재 기네스 기록상 세계 최대의 북은 2001년 일본에서 제작한 지름 4.8m, 폭 4.95m, 무게 2t의 북으로 알려져 있다. 영동군은 이보다 훨씬 더 큰 이 북의 기네스북 등재를 위해 제작 과정 등 증빙자료를 갖춰 지난해 9월 기네스 월드레코드에 등재 요청을 해 놓은 상태다.

고당리에는 난계 박연 선생(1378∼1458년)의 생가와 묘소, 위패를 모신 난계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리는 박연 선생은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글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세종대왕에게 “벼슬보다 음악이 더 좋다”고 말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음악 이론과 제도를 처음으로 체계화한 인물이다. 그의 혼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난계국악기제작촌에서 세계 최대의 북 ‘천고’를 만드는데 앞장 선 주인공이자 북·장구 등 ‘타악기 제작의 달인’으로 통하는 이석제씨(45)를 만났다. 타악기공방 대표인 이씨와 반갑게 악수를 하는데 20년이 넘도록 망치·대패를 잡아온 장인답게 그의 손은 까칠하고도 뭉툭했다. 먼저 천고를 만든 소감을 묻자 빙그레 웃으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울림통 길이 6m, 폭 6.5m, 울림판 지름 5.5m, 무게 7t의 세계에서 가장 큰 북 ‘천고(天鼓)’. 이 북을 만드는 데 15t 트럭 4대 분량의 150년 이상 된 소나무 원목과 어미 소 40마리의 가죽이 재료로 쓰였다. ‘천고’ 앞에 선 이석제씨. | 이원규 시인 촬영

“사실 세상에서 제일 큰 북을 만들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도 많지요. 모두들 너무 기네스 등재만을 의식해 크기에만 집착하다보니 우리시대 천고 제작의 본래면목이 간과되기도 했고요. 영동군이 국악 성지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을 이해하고 동조하지만 세계 최대라는 점에만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그 참뜻이 훼손되는 듯할 때는 조금 아쉽기도 하지요. 고각(鼓閣)도 지어야 하고 아직 할 일도 많이 남았고요. 한반도 남쪽의 중심부인 영동에 자리한 천고의 상징성 부각 등 이제부터 시작이지요. 천고의 북소리가 한반도의 평화와 상생을 위해 멀리 멀리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북소리에 온 국민이 귀를 기울여 생명평화의 기운이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영동의 국악기제작촌은 산조장구·정악장구·소고·특수북 등 70여 종의 악기를 만들고 있는 타악기공방 이석제 대표와 더불어 현악기공방 조준석 대표가 10여년 전부터 중심이 되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3년 전 영동군에서 이 초대형 북 제작을 이석제씨에게 처음 제안해 왔을 때 의욕 이전에 더럭 겁부터 났었다. 그래서 이씨는 조건을 붙였다. “어디선가 수령 150~200년 되는데다 5년 동안 잘 건조된 우리 소나무들을 본 적 있는데 이것을 찾아오면 한번 해보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영동군은 수소문 끝에 인천으로 팔려간 그 소나무들을 사 오는데 성공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전대미문의 작업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예산 2억3000만원의 이 프로젝트는 이씨의 지휘 아래 6명의 악기장이 대형 크레인까지 동원해가며 2009년 6월부터 15개월의 산고 끝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무게 7t의 거대한 울림통과 소 40마리의 가죽으로 만든 초대형 울림 판을 제작하고, 지난해 8월30일 울림통 표면에 용무늬 단청작업을 마치면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의 ‘하늘북’ 제작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 고졸 학력의 이씨가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을 제작하게 되자 곳곳에서 ‘과연 만들 수나 있을까. 소리는 잘 날까’ 라는 질시와 비난이 교차했었다.

“아마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할 겁니다. 어째서 설계도도 없이 만드느냐고 묻는데, 이는 전통기법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오랜 경험과 감으로 해야 하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지요. 그동안 주변의 오해·질시·비난 등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15t 트럭 4대 분량의 조선 소나무로 울림통을 제작했는데, 울림통은 6명의 악기장이 길이 1.5m·너비 15㎝·두께 7㎝로 만든 800여개의 나무 조각을 1350개의 나비장으로 일일이 끼워 맞춰야 했습니다. 일본의 북은 울림통이 일직선의 원통이니 쉽지만 이 천고는 배가 나오는 타원형의 원통이니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었지요. 두 달 정도 자연건조를 하며 울림통을 견고하게 접합한 뒤 소가죽을 이어 붙인 초대형 울림판을 쇠줄로 붙잡아 맸지요. 또 울림통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내부에는 알루미늄을 덧대고 바깥에는 옻칠을 한 뒤 다섯 마리의 용그림 단청으로 치장했습니다. 나도 생전 처음해보는 대작인데다 그 어느 것 하나 삐걱하면 끝장나는 것이니 날마다 밤잠을 설쳐야 했지요. 따로 점안식을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습니다.”

대전에서 태어난 이씨는 6세 때 어머니를 잃고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까지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고등학교 시절 장구 울림판을 만드는 누나 집에 머물며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제대한 뒤에는 무작정 악기제작으로 유명한 대구 불로동 골목을 찾아갔다.

“스물한살 때인 87년이었지요. 하지만 6개월 동안 조각도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뒷일만 하다가 대전으로 돌아왔습니다. 비닐하우스 하나를 빌려 오동나무 대신 미루나무를 이용해 장구 울림통 깎는 기술을 스스로 익혔지요. 그냥 죽어라 깎다보니 3∼4년 만에 감이 왔습니다. 서서히 주목도 받았구요. 당시 장구 울림통 하나에 6000원 벌이였는데, 하루 12개 정도 만들었으니 쏠쏠했지요. 그러나 돈보다 악기제작에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지요.”

국악인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하고 옛날 북을 수없이 뜯어보며 실력을 다져나갔다. 가죽 공부를 해보니 우리 한우 가죽이 최고인데다 가죽의 신선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죽에 붙어 있는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 화학약품보다 땡감을 우려낸 물을 사용해 소리의 여운을 늘리는 바람에 국내 명창 3명으로부터 북에 대해 인정을 받기도 했다. 이씨가 만든 작품은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심지어 장구·북 제작의 악기장인 무형문화재 고 서남규 선생도 그에게 주문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90년대 초 한국과 중국의 수교는 뜻밖에도 우리 악기제작 사업의 사양길을 부채질했다. 중국산 북과 장구 등이 밀어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고육지책으로 20㎝짜리 미니 장구 20개를 만들어 한국 민속촌 입구에 팔러가기도 했다. 그런데 외국인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한 달에 1000개(개당 1만2000원)를 납품하기도 하고, 93년 대전엑스포 때는 미니 북·장구 등 1억원어치를 팔기도 했다.

“어쩌다보니 공예품 악기를 최초로 만들어 보급한 셈이 됐지요. 공예품 악기에도 정성을 들여 소가죽과 오동나무, 줄 등 기존 악기와 똑같이 만들었지요. 우리 북은 가죽과 나무가 어울려 소리를 내는데 완성한 뒤에야 소리를 들어 볼 수 있다 보니 기술연마 기간이 평균 7년 정도는 돼야 합니다. 특히 북소리는 가죽이 중요한데 스스로 가공법을 터득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스승을 만나더라도 좋은 북을 만들 수 없지요. 그나저나 중국산에 밀려 우리의 악기들이 잊혀지는 게 안타깝습니다. 90% 이상이 중국산입니다. 아이들이 우리 악기 소리를 들으며 공부해야 하는데 큰일입니다.”

이씨에 따르면 중국과는 기후와 물이 달라 아무리 똑같이 만들어도 음색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따금 일본 북이 소리가 잘 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북은 ‘덩~’하며 부드럽게 여운이 있는 반면 일본 북은 ‘똥-’하며 강하고 짧은 소리가 난다고 한다. 일본의 우기를 견디기 위해 가죽을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의 북은 철분기가 많은 물로 가죽을 처리하기 때문에 우리와는 음색이 다르다는 것이다.

1921년 단재 신채호 선생이 베이징에서 발행한 잡지이름이 또한 ‘천고’다. “나라의 빛을 되찾아 우리의 산하를 다시 세운다면 천고의 직분은 여기서 다하리라”고 밝혔다. 올해 개천절에는 우리나라의 ‘배꼽’ 영동에서 세계 최대의 북 천고가 울려 퍼지길 기대한다. ‘소망과 염원을 하늘에 전달하는 북’ 천고의 둥~두웅~둥 장엄한 소리. 저 하늘에까지 닿았다가 돌아오는 북소리 하나를 단전 깊숙이 모셔두고 내 삶의 밑천으로 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