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 시인
ㆍ‘세상변혁 열정’ 불살랐던 김남주·고정희 선생이 그리운 날들
김남주 시인 흉상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의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걸어서 못 가면 모터사이클을 타고서라도 지구 한 바퀴를 돌아보며 이 세상의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환멸을 넘어, 연민을 넘어 바람의 끝에서 다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날마다 백척간두진일보 (百尺竿頭進一步)의 자세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모두 헛꿈이었으며 언제나 제자리였다. 얼마만큼 왔나 돌아보면 그 자리 그대로였다. 멀리 지리산까지 빈손으로 와 14년 동안 살아봤지만 돌이켜보면 목줄 매인 흑염소처럼 매애 매애애 울며 산기슭을 뱅뱅 돌기만 했다. 이따금 밧줄이 고무줄처럼 조금 늘어졌다 줄어들었을 뿐 환멸과 권태는 그대로이고, 지극한 연민의 마을 초입에도 가보지 못했다. 애당초 그릇이 작아서인지, 열망의 절대부족 때문인지, 매사에 인내심으로 포장한 우유부단함 때문인지, 날마다 참회가 모자라는 후안무치의 맨얼굴로 차마 거울을 바로 보지 못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았지만, 그마저 한 발 한 발 내디딘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바람에 등 떠밀린 것이다.
막 돌을 지난 아이가 겨우 한 걸음 내딛다가 넘어지듯이 다시 걸음마를 배워야 할 때가 왔음을 절감한다. 이미 몸도 마음도 많이 늦었다는 것도 확연히 알겠다. 백척간두진일보는 그 얼마나 오랫동안 써먹어온 사치였던가. 다만 내가 찍어야 할 발자국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만이라도 마치 일생일대의 인감도장처럼 하나둘 찍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끝은 엄두도 못 내고 대신 전남 해남군 땅끝에 가보았다. 북위 34도17분38초, 동경 126도6분01초인 땅끝(土末)은 함북 온성군 남양면 풍서동 유원진(북위 43도0분39초)과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사선(斜線)으로 그어져 극남과 극북을 이루는 곳이다.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부르는 것도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1000리, 다시 서울에서 함북 온성군 유원진까지 2000리여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가볼 수는 있지만 한반도 북쪽 끝인 유원진에 가보는 것은 극한의 남북대결 속에서 꿈조차 꾸기 어렵다. 현실정치는 통일의 꿈은 고사하고 ‘가고 싶다’는 상상력까지 제한하는 것이다.
그나마 땅끝 해남에는 언제라도 가볼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땅끝은 말 그대로 내륙의 마지막이 아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니 사실은 언제나 세상의 처음이 되는 곳이자 ‘슬픔도 힘이 된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닫게 되는 곳이다. ‘역주행의 시절’에 더더욱 그리워지는 시인 김남주·고정희 선생의 생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마산 미황사 아래 아주 작은 마을의 한 농가에서 홀로 병마와 싸우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권정생 선생 이후의 가장 맑은 영혼’ 김태정 시인이 있기 때문이다.
‘민족시인’이자 ‘전사’였던 김남주(金南柱 1946~94) 선생의 생가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있으며, ‘여성운동가’ 고정희(高靜熙 1948~91) 시인의 생가는 삼산면 송정리에 있다. 두 살 차이인 그들의 고향은 논밭을 가로지르면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80년대 민주화투쟁에 있어서 아직 젊은 ‘문단의 거목’이자 ‘시대의 등불’이었던 두 시인의 큰 발자취는 새삼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전사’ 혹은 ‘투사’의 이미지가 강했던 김남주·고정희 시인의 품성은 사실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에 나는 문단의 막내로서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의 총무간사로 한동안 일했다. 그때 만난 김남주 시인은 언제나 환하게 웃는 ‘큰형님’ 같았으며, 고정희 시인 또한 언제나 자상하고도 부드러운 ‘누님’ 같았다.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니 ‘선생님’으로 호칭하는 게 마땅했으나 참으로 불손하게도 나를 비롯한 젊은 문사들이 ‘형님’ 혹은 ‘누님’으로 불러야 할 정도로 그 품이 넉넉했던 것이다.
김남주 선생은 79년 ‘남민전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88년 12월에 형집행정지로 9년3개월 만에 석방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94년 2월13일 췌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감옥 밖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5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투병생활까지 겹쳐 실제로는 자유를 제대로 맛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후배문인들과 생맥주집 등에서 밤을 새우며 노래를 부르고 ‘대중적 무기로서의 시’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김남주·고정희 시인 이후에 그 누가 있어 ‘세상 변혁의 열정’을 되살리고 있으며 또 그 누가 있어 ‘시로 세상을 바꾸려는 열망’을 품고 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나도록 문단은 내내 지리멸렬했으며, 어느 중견소설가의 지적처럼 “만약 선생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문단이 지금처럼 이렇게 나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선생의 모습이 바로 엊그제처럼 환하기만 한데 어느새 고정희 시인은 20주기, 김남주 시인은 17주기가 되었다. 이 쓸쓸한 봄날에 봉학마을과 송정마을을 둘러보며 에피소드 하나가 떠올랐다. 21년 전 초여름이었다. 서울 압구정동의 한길사인가 어디에서 행사를 마치고 뒷골목의 허름한 술집에 간 적이 있다. 함께하던 많은 무리가 자리를 뜨고 김남주·고정희 시인과 더불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실무자인 오현숙 간사와 나 그렇게만 남았었다. 비는 부슬부슬 오는데 고정희 시인은 바로 다음날 필리핀으로 1년 동안 떠났다가 돌아온다고 했다. 늦은 시간 밤비 소리에 센티멘털해진 것일까. 먼저 김남주 시인이 노래를 불렀다.
특유의 저음과 바이브레이션이 감동의 울림을 주는 목소리로 그의 애창곡인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불렀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중략) 똑딱선 프로펠러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들린다/ 물 위에 복사꽃 그림자같이/ 내 고향 꿈에 어린다.’ 1절의 가사에 두 사람 모두 고향을 떠올렸는지 노래를 부르는 김남주 시인이나 먼 길 떠나야 하는 고정희 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특히 3절까지 다 부르는 동안 2절의 가사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첫사랑 버린 고향이길래’는 묘한 울림을 주는 부분이었다. 잘은 몰라도 고향이 지척인 두 선생의 남모르는 흠모의 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마침내 고 시인이 답가를 하고, 다시 김 시인이 답가를 하는 등 무려 30여 곡은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노래와 노래가 모두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냥 답가가 아니라 화답이었던 것이다. 오래 듣다보니 그제야 오랜 세월 동안 차마 말과 행동으로 하지 못한 내밀한 고백들을 노래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 간사와 나는 자리를 피해줄 마음도 내지 못한 채 ‘감동의 도가니’ 속에 빠져 있었다. 새벽 빗소리 속에 정신을 차렸을 때 두 사람은 모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정신적인 사랑의 진수를 엿본 셈이었다.
그렇게 새벽에 헤어진 뒤 필리핀을 다녀온 고정희 시인은 91년 6월9일 그토록 사랑하던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해 유명을 달리하고, 김남주 시인은 끝내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94년 2월13일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그들의 나이 겨우 43세, 48세였으니 치열했지만 그래도 너무나 짧은 생이었다.
그런데 김남주·고정희 생가가 있는 삼산면 바로 인근의 송지면 미황사 아래 ‘순수’ 그 자체의 시인이 살고 있으니 이 또한 눈물겹지 않을 수 없다. 고정희 시인처럼 결혼하지 않고 살아온 김태정 시인(48)이다. 문단에 나온 지 13년 만에 겨우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낸 뒤 두 번째 시집은 또다시 감감무소식이다. 이 땅에 태어나 가장 죄를 적게 짓고 사는 시인이 있다면 지리산에서 혼자 살고 있는 박남준 시인과 7년 전에 달마산 아래 깃들여 사는 김태정 시인이다. 그런데 아마 ‘죄의 총량’을 재는 저울이 있다면 김태정 시인이 좀 더 가벼울 것이다. 나 또한 지리산에 살며 ‘자발적 가난’ 운운한 날들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아프다. 많이 아프다. 지난 연말 암 판정을 받았지만 이미 늦었다. 얼마나 홀로 고통을 견뎌왔으면 이미 골수 깊숙이 암세포가 다 번지고 말았을까. 대학병원에서는 3개월 못 넘길 것이라고 선고했지만 김태정 시인은 지금 외딴 농가에서 홀로 견디고 있다. “뭐 하러와. 그냥 조금 아프네. 난 괜찮아. 너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 하며 힘없이 웃는 그녀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보일러기름이나 떨어지지 않았는지 둘러볼 뿐이었다. 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에겐 죽음이 이토록 가까운 것일까. 아무래도 이들에 비해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모두 헛꿈이었으며 언제나 제자리였다. 얼마만큼 왔나 돌아보면 그 자리 그대로였다. 멀리 지리산까지 빈손으로 와 14년 동안 살아봤지만 돌이켜보면 목줄 매인 흑염소처럼 매애 매애애 울며 산기슭을 뱅뱅 돌기만 했다. 이따금 밧줄이 고무줄처럼 조금 늘어졌다 줄어들었을 뿐 환멸과 권태는 그대로이고, 지극한 연민의 마을 초입에도 가보지 못했다. 애당초 그릇이 작아서인지, 열망의 절대부족 때문인지, 매사에 인내심으로 포장한 우유부단함 때문인지, 날마다 참회가 모자라는 후안무치의 맨얼굴로 차마 거울을 바로 보지 못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았지만, 그마저 한 발 한 발 내디딘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바람에 등 떠밀린 것이다.
막 돌을 지난 아이가 겨우 한 걸음 내딛다가 넘어지듯이 다시 걸음마를 배워야 할 때가 왔음을 절감한다. 이미 몸도 마음도 많이 늦었다는 것도 확연히 알겠다. 백척간두진일보는 그 얼마나 오랫동안 써먹어온 사치였던가. 다만 내가 찍어야 할 발자국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만이라도 마치 일생일대의 인감도장처럼 하나둘 찍어야겠다는 마음뿐이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있는 고 김남주 시인의 생가 | 이원규 시인 촬영
그리하여 세상의 끝은 엄두도 못 내고 대신 전남 해남군 땅끝에 가보았다. 북위 34도17분38초, 동경 126도6분01초인 땅끝(土末)은 함북 온성군 남양면 풍서동 유원진(북위 43도0분39초)과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사선(斜線)으로 그어져 극남과 극북을 이루는 곳이다.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부르는 것도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1000리, 다시 서울에서 함북 온성군 유원진까지 2000리여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가볼 수는 있지만 한반도 북쪽 끝인 유원진에 가보는 것은 극한의 남북대결 속에서 꿈조차 꾸기 어렵다. 현실정치는 통일의 꿈은 고사하고 ‘가고 싶다’는 상상력까지 제한하는 것이다.
그나마 땅끝 해남에는 언제라도 가볼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땅끝은 말 그대로 내륙의 마지막이 아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곳이니 사실은 언제나 세상의 처음이 되는 곳이자 ‘슬픔도 힘이 된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닫게 되는 곳이다. ‘역주행의 시절’에 더더욱 그리워지는 시인 김남주·고정희 선생의 생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마산 미황사 아래 아주 작은 마을의 한 농가에서 홀로 병마와 싸우며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권정생 선생 이후의 가장 맑은 영혼’ 김태정 시인이 있기 때문이다.
‘민족시인’이자 ‘전사’였던 김남주(金南柱 1946~94) 선생의 생가는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있으며, ‘여성운동가’ 고정희(高靜熙 1948~91) 시인의 생가는 삼산면 송정리에 있다. 두 살 차이인 그들의 고향은 논밭을 가로지르면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80년대 민주화투쟁에 있어서 아직 젊은 ‘문단의 거목’이자 ‘시대의 등불’이었던 두 시인의 큰 발자취는 새삼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전사’ 혹은 ‘투사’의 이미지가 강했던 김남주·고정희 시인의 품성은 사실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에 나는 문단의 막내로서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의 총무간사로 한동안 일했다. 그때 만난 김남주 시인은 언제나 환하게 웃는 ‘큰형님’ 같았으며, 고정희 시인 또한 언제나 자상하고도 부드러운 ‘누님’ 같았다.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니 ‘선생님’으로 호칭하는 게 마땅했으나 참으로 불손하게도 나를 비롯한 젊은 문사들이 ‘형님’ 혹은 ‘누님’으로 불러야 할 정도로 그 품이 넉넉했던 것이다.
송정리에 있는 고정희 시인의 생가 | 이원규 시인 촬영
김남주 선생은 79년 ‘남민전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88년 12월에 형집행정지로 9년3개월 만에 석방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94년 2월13일 췌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감옥 밖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5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투병생활까지 겹쳐 실제로는 자유를 제대로 맛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후배문인들과 생맥주집 등에서 밤을 새우며 노래를 부르고 ‘대중적 무기로서의 시’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김남주·고정희 시인 이후에 그 누가 있어 ‘세상 변혁의 열정’을 되살리고 있으며 또 그 누가 있어 ‘시로 세상을 바꾸려는 열망’을 품고 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나도록 문단은 내내 지리멸렬했으며, 어느 중견소설가의 지적처럼 “만약 선생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문단이 지금처럼 이렇게 나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선생의 모습이 바로 엊그제처럼 환하기만 한데 어느새 고정희 시인은 20주기, 김남주 시인은 17주기가 되었다. 이 쓸쓸한 봄날에 봉학마을과 송정마을을 둘러보며 에피소드 하나가 떠올랐다. 21년 전 초여름이었다. 서울 압구정동의 한길사인가 어디에서 행사를 마치고 뒷골목의 허름한 술집에 간 적이 있다. 함께하던 많은 무리가 자리를 뜨고 김남주·고정희 시인과 더불어 민족문학작가회의 실무자인 오현숙 간사와 나 그렇게만 남았었다. 비는 부슬부슬 오는데 고정희 시인은 바로 다음날 필리핀으로 1년 동안 떠났다가 돌아온다고 했다. 늦은 시간 밤비 소리에 센티멘털해진 것일까. 먼저 김남주 시인이 노래를 불렀다.
특유의 저음과 바이브레이션이 감동의 울림을 주는 목소리로 그의 애창곡인 남인수의 ‘고향의 그림자’를 불렀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중략) 똑딱선 프로펠러 소리가/ 이 밤도 처량하게 들린다/ 물 위에 복사꽃 그림자같이/ 내 고향 꿈에 어린다.’ 1절의 가사에 두 사람 모두 고향을 떠올렸는지 노래를 부르는 김남주 시인이나 먼 길 떠나야 하는 고정희 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특히 3절까지 다 부르는 동안 2절의 가사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첫사랑 버린 고향이길래’는 묘한 울림을 주는 부분이었다. 잘은 몰라도 고향이 지척인 두 선생의 남모르는 흠모의 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인근 송지면 미황사 아래 김태정 시인의 집. | 이원규 시인 촬영
마침내 고 시인이 답가를 하고, 다시 김 시인이 답가를 하는 등 무려 30여 곡은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노래와 노래가 모두 연결되는 것이었다. 그냥 답가가 아니라 화답이었던 것이다. 오래 듣다보니 그제야 오랜 세월 동안 차마 말과 행동으로 하지 못한 내밀한 고백들을 노래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 간사와 나는 자리를 피해줄 마음도 내지 못한 채 ‘감동의 도가니’ 속에 빠져 있었다. 새벽 빗소리 속에 정신을 차렸을 때 두 사람은 모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정신적인 사랑의 진수를 엿본 셈이었다.
그렇게 새벽에 헤어진 뒤 필리핀을 다녀온 고정희 시인은 91년 6월9일 그토록 사랑하던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해 유명을 달리하고, 김남주 시인은 끝내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94년 2월13일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그들의 나이 겨우 43세, 48세였으니 치열했지만 그래도 너무나 짧은 생이었다.
그런데 김남주·고정희 생가가 있는 삼산면 바로 인근의 송지면 미황사 아래 ‘순수’ 그 자체의 시인이 살고 있으니 이 또한 눈물겹지 않을 수 없다. 고정희 시인처럼 결혼하지 않고 살아온 김태정 시인(48)이다. 문단에 나온 지 13년 만에 겨우 첫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낸 뒤 두 번째 시집은 또다시 감감무소식이다. 이 땅에 태어나 가장 죄를 적게 짓고 사는 시인이 있다면 지리산에서 혼자 살고 있는 박남준 시인과 7년 전에 달마산 아래 깃들여 사는 김태정 시인이다. 그런데 아마 ‘죄의 총량’을 재는 저울이 있다면 김태정 시인이 좀 더 가벼울 것이다. 나 또한 지리산에 살며 ‘자발적 가난’ 운운한 날들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아프다. 많이 아프다. 지난 연말 암 판정을 받았지만 이미 늦었다. 얼마나 홀로 고통을 견뎌왔으면 이미 골수 깊숙이 암세포가 다 번지고 말았을까. 대학병원에서는 3개월 못 넘길 것이라고 선고했지만 김태정 시인은 지금 외딴 농가에서 홀로 견디고 있다. “뭐 하러와. 그냥 조금 아프네. 난 괜찮아. 너도 이제 많이 늙었구나” 하며 힘없이 웃는 그녀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차마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보일러기름이나 떨어지지 않았는지 둘러볼 뿐이었다. 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에겐 죽음이 이토록 가까운 것일까. 아무래도 이들에 비해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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