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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의 길인생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生](22) 보성공연예술촌 오성완·이당금 부부

이원규 | 시인
ㆍ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기에 … “그래 우린 연극에 미쳐부렀어”

모든 걸 쏟아부었기에 후회는 없다. 무엇인가에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행복인 것 같다며 밝게 웃는 오성완(왼쪽)·이당금씨 부부. | 이원규 시인 촬영


한때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不狂不及)’는 말이 유행했다. ‘만약 네가 미치지 않는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뜻의 약여불광(若汝不狂) 종불급지(終不及之)를 줄인 말이다. 어떤 이는 “그 어디에도 출전을 찾아보기 어렵고, 한자를 모르는, 말도 안 되는 조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말이란 또 그렇게 시대적 배경 속에서 새로 태어나 회자되면서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의 본래 의도보다는 다국적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의 최고경영자 하워드 슐츠의 명언인 것처럼 알려지면서, 자본주의시대의 출세 지향적 측면만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지식인의 올곧은 내면세계와 결기는 고사하고 과정이야 어떻든 오직 ‘돈’으로 그 결과가 판가름나는 작금의 사태를 대변하는 뜻으로 축소된 것이다. 추사 김정희나 다산 정약용처럼 이치와 도리에 따라 천하만민을 위한 애민사상으로 학문을 탐구하고 펼치는 ‘광기에 가까운 열정’이 그들을 진정한 지식인의 반열에 오르도록 했으며, 예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재벌’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병든 기업가정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대학 강단의 연구와 창작 본연의 예술활동마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목적과 수단으로 전락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예술의 ‘상업주의’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서울 중심’ 혹은 ‘중앙’을 벗어나는 일은 곧 예술가에게 있어 ‘자살행위’를 의미한다. 만약 자살행위가 아니라면 ‘지독한 열정’ 혹은 ‘실로 무서운 광기’가 아닐 수 없다. 전남 보성군 노동면 학동리의 옛 학동분교에 가면 이처럼 ‘미친’ 연극인 부부가 살고 있다. 보성공연예술촌 ‘연바람’과 광주 ‘푸른연극마을’의 대표인 오성완씨(48)와 배우 이당금씨(42). 이들은 7년 전에 폐교된 지 10년이 지나 마치 귀신이 나올 듯한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광주의 푸른연극마을 전용 소극장 ‘연바람’을 폐쇄하고 간판을 떼어다 이곳에 단 것이다.

오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모두 미쳤다고 했지요. 광주에서도 연극이 살아남기 어려운데 시골의 폐교로 옮기겠다니 모두 손사래를 쳤지요. 다행히도 아내와 딸 새희도 기꺼이 동참하고 단원 21명 중 8명이 따라왔습니다. 사실 돈도 없고 눈앞이 캄캄했지만, 지역 연극계가 문화자본과 차별성을 갖기 위해서는 오히려 원시성 같은 것이 절실하다고 판단했지요. 어차피 관객이 많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연극쟁이로서의 첫 마음이라도 잃지 말고 새로 시작해보자는 배수진이었습니다. 날마다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좋당게, 우린 참말로 연극 자체에 미쳐부렀응게’ 하고 속마음을 다잡으며 생명력 넘치는 자연 속에서 시골 어르신들도 작품에 빠지게 해보고 싶었지요. 불모지의 시골학교 운동장에서 ‘문화공동체의 닻’을 올린 것이지요.”

단원들과 직접 교실 안팎을 황토색으로 칠하고 연습실·소품실·식당·숙소 등으로 개조했다. 꽃을 심고, 이순신 장군과 전혀 안 어울리는 반공소년 이승복 어린이도 그대로 두고, 철봉이 있던 운동장 구석자리 맨땅에는 ‘별빛 무대’ 터를 잡았다. ‘따로 무대를 만들지 않고 그냥 흙 위에서 연극을 하고 싶은 소망’으로 5000여평을 마치 아무런 손도 대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꾸몄다. 지금도 그대로다. 그해 8월에 나 또한 우연히 ‘연바람 여름축제’에 참가해 연극 <한여름밤의 꿈> 등을 마을 할머니·할아버지들 틈에 섞여 관람했다. 마을 어르신들은 김치와 삶은 돼지고기 안주에 막걸리 잔을 돌리며 전라도다운 흥겨운 추임새를 넣었다. 국악·노래·춤 등이 어우러진 대자연 속의 문화향연은 폐교 이전의 운동회날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이 북적였다. 평생 연극을 처음 보는 마을 어르신들도 금방 감정이입이 되어 울고 웃으며 수시로 극 중에 끼어들었다. 바로 이 마을사람들이 극 중의 주인공들이자 관객이었던 것이다. 그해 여름 연극을 보기 위해 자그마치 1500여명의 관객이 이 조용한 시골까지 찾아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연출·극본·연기 등 다재다능한 오 대표의 꿈이 현실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11월에 개촌 6주년 축제를 열었으니 마침내 자리를 잡은 셈.

오 대표는 1987년 대학에서 <새야 새야>를 처음 연출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광주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연극인이다. 89년 극단 ‘코스모스’로 출발해 93년 푸른연극마을을 창립하고, 96년에 연바람 소극장을 열었다. ‘연바람’은 자신의 고향인 곡성군 석곡면 연곡리의 마을 옛 이름이다. 지금까지 ‘연바람’이라는 명칭을 고수하는 것을 보면 내면 깊숙이 스며있는 그의 첫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꽃잎 져서 피> <그 여자 이순례> <그해 오월의 진혼곡> 등 50여편을 연출하는 등 광주의 대표적인 연극인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그는, 그러나 더 이상 도시에서의 작품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사실 한계가 아니라 환멸이요, 미칠 것만 같았지요. 쉬고 싶었고 재충전도 하고 싶었습니다. 연극이 바로 설 자리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갈수록 희망이 없었지요. 제 개인이나 우리시대 연극의 앞날이나 모두 캄캄했지요. 그리하여 선택한 게 여기 보성이었지요. ‘변방’이 곧 ‘중심’이다. 다시 시작하자, 시작하기 이전에 일단은 조금 쉬자.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재충전을 하고 작품을 쓰고 문화공동체를 만들기로 했지요. 당시 광주는 ‘문화예술중심도시’ 사업 등 세계적으로 거창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 혜택이야 우리 몫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더 멀리 왔지요. 그런데 이곳에 와서 더 바빠졌습니다. 바쁜데 참으로 신나게 바빠졌지요. <부용산> 등 이 지역 관련 작품과 토속적인 것도 많이 쓰고, 연출도 더 많이 했지요. 사라져가는 지역문화의 흔적을 찾아내고, 서울의 연극 문법이 아니라 광주·전남만의 문법과 독창적인 양식을 연구하고 지역민들의 문화 향유를 위해 노력했지요. 서울 연극이 흉내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연극세계를 선보이는 게 나와 우리 단원들의 꿈이었지요. 그러다보니 <사평역> <랑아 랑아 영랑아> 등으로 과분한 상도 많이 받았고요.”


2009년에는 국내 2대 연극제인 고마나루 전국향토연극제(한국연극협회 주최)에서 오 대표가 극본을 쓰고 연출하고 직접 주연으로 연기한 <랑아 랑아 영랑아>로 작품대상·연출상·연기대상 등 3관왕을 차지해 연극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사평역>으로 전국연극제에서 은상과 연기상·무대예술상을 받았고, 아내 이당금씨는 2008년 광주연극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내 이씨 또한 타고난 연기자가 아닐 수 없다. 이미 광주에서는 95년 신인연기상, 2000년과 2004년 최우수연기상 등을 받았으며, 출연작으로는 <영산강 비가> <하늘신랑 땅각시> <어미의 노래> <머슴새> <짬뽕> 등에 출연한 바 있다. 보성으로 내려온 뒤부터 모노드라마 <어미>에서 청산도의 여인으로 열연한 것처럼 “마침내 연기가 절정에 올랐다”는 평을 듣고 있다. 92년 직장생활을 하던 그녀는 김지숙의 모노드라마 <로젤>을 보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한다. “정말 이상했어요. 뭔가 가슴이 뭉클한 뜨거움이 확 올라오면서 무대에 뛰어오르고픈 욕망을 누를 수가 없었지요. 그때까지 살아왔던 삶을 송두리째 맞바꿀 만큼 강렬했어요. 순진하고 내성적으로만 살아왔던 내 인생에 설렘을 넘어 무당이 신열을 앓듯 그렇게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거지요.” 결국 93년 극단 ‘청춘’의 단원으로 들어가 연극배우로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된다. 처음에는 직장생활을 병행했지만 성에 안차 직장을 포기하고 전업연극인으로 나섰다. 어느새 19년차 중견 배우다. 물론 95년 1월1일 오 대표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서 잠깐 무대를 벗어난 적은 있지만 오직 연극에만 매달리며 ‘악바리 근성’의 배우로서 치열하게 살고 있다. 이씨는 주로 ‘잡초처럼 꿋꿋이 아픔을 감내하며 자식을 돌보는 강인한 역의 어머니’로 나와서 많은 관객의 심금을 울려왔다. 맡은 역에 따라 공연 며칠 전부터 금식을 하고 물만 마시기도 했다. “육체가 편하면 정신이 몽롱해져서 역할에 집중할 수 없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입술이 다 부르튼 투혼의 연기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남편이 연출자면 장단점이 있을 텐데”라고 운을 떼자 호탕하게 웃었다. “뭐, 다른 남자라면 다 좋지요, 하하. 장점은 공연이 끝나면 마음 놓고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언제나 다른 배우자들보다 내게 더 혹독하다는 것이지요. 처음엔 서운하기도 했는데, 세월이 갈수록 도반이 무슨 뜻인지 절감하게 됩니다. 사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 7년 된 이곳을 떠나려고도 했지요. 하지만 단원들과 굶어도 함께 굶자고 약속했지요.”

무엇인가에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진정 행복한 일이다. 결과 이전에 과정이 더 소중한 법. 미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다(不狂不幸). 보성공연예술촌 연바람에서 만난 오성완·이당금 부부는 광주 학동의 연습실로 가야 한다며 일어섰다. 광주연극제 초청작인 <매화연정>(오성완 작/연출)의 막바지 연습 때문이다. 공연은 21일 오후 7시30분, 광주문화예술회관 소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