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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의 길인생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9) 남원의 ‘칼 만드는 여자 대장장’ 정길순

이원규 | 시인

ㆍ“시린 세상과 사람을 살리는 나만의 활인검 만들고 싶어”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무색하다 못해 처참한 시절이다. 칼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렇다고 아예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칼자루를 쥔 자의 정신 상태에 따라 애국자가 될 수도 있고 요리사가 될 수도 있는 반면, 위험천만한 망나니나 망국의 역적이 될 수도 있다. 일찍이 고려왕검의 제조명장 이상선 선생은 “왜놈의 칼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지만, 고려의 칼은 나라를 지켜내고 사람을 살리는 칼”이라고 했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화덕에서 붉게 달아오른 쇠를 꺼내 커다란 쇠망치로 내려치며 담금질하는 여자 대장장이 정길순씨. 강철을 마치 떡 주무르듯 해 부엌칼·생선회칼·꼬막칼·낫·도끼·작두·곡괭이를 만들어낸다. 그녀가 벼려내는 칼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정교함이 곁들여져 찾는 사람이 많다. | 이원규 시인 촬영

그런데 작금의 금수강산엔 온통 핏빛 살인검이 판을 치고 있다. 칼 자체에는 본디 선악이 존재하지 않지만 명의의 손에 쥐어지면 사람을 살리는 칼이 되고, 포악한 자의 손에 쥐어지면 살인도가 되는 법. 사람의 목숨을 구하여 살리는 활인검(活人劍), 스스로를 해치고 남도 해치는 칼이 아니라 끊임없이 갈고닦아 번뇌망상과 탐진치 삼독(三毒)을 과감히 베어버리는 지혜의 칼, 반야의 칼인 활인검은 어디에 있는가. ‘실천하는 지성’ 리영희 선생의 영전에 엎드려 뼈아프게 ‘칼보다 강한 펜’과 활인검을 생각한다.

지난 봄에 집들이 선물로 부엌칼을 받은 적이 있다. 전남 구례의 문수골에 살다가 경남 하동의 섬진강변 마을로 이사 올 때 전북 남원의 복효근 시인에게서 받은 것이다. 처음에는 내 생애 처음 받는 식칼인데다 아무래도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속으로는 적잖이 놀랐다. 빈집을 전전하며 살다보니 제대로 집들이를 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나는 그제야 칼 선물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아주 좋은 풍습의 하나로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지키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때 받은 것이 바로 한국 최고의 ‘남원 칼’이다.

예로부터 남원에는 널리 알려진 세 가지 명품이 있다. 광한루의 성춘향과 옷칠 등의 목기, 그리고 매끈하고 단단하기로 유명한 남원 식도(食刀)다. 2008년 남원시는 전통산업인 식도(食刀)의 이미지를 통합하는 공동브랜드를 결정했다. ‘남원 춘향골에서 생산되는 뛰어난 식칼’이라는 의미를 담은 ‘남향일도(南香逸刀)’. 성춘향의 칼날 같은 지조와 아름다움을 대장간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이름의 명품 칼을 내놓은 것이다. 남향일도는 현대식 공장의 기계를 쓰기보다는 전통적 대장간 일곱 군데에서 빼어난 솜씨의 장인들이 손으로 직접 만들어낸다.

남원에는 가야문화권의 철기문화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남원 칼이 더욱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22년 오늘날의 산업제품경진대회라고 할 수 있는 ‘조선부업공진대회’에서 남원 노암동에 살던 한영진씨가 출품한 부엌칼이 금상을 받으면서부터다. 그는 이발소에서 사용하는 면도칼의 원리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칼의 날이 얇고 날카로워 큰 호응을 얻었다. 70년대엔 남원 광한루 일대의 성냥간(대장간) 골목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80년대까지 부흥기를 맞았으나 사출기를 이용한 대량생산과 스테인리스 같은 신소재가 보급되면서부터 전통방식의 남원식도는 점차 쇠퇴했다. 하지만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유명 드라마 <대장금>에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 한상궁이 요리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다소 투박하고 묵직해 보이며 거무튀튀한 모습의 그 칼’이 바로 전통 방식으로 강철을 직접 두드려 만든 남원 칼이다. 남원 식칼은 소칼·중칼·대칼로 나뉘는데 이 제품들은 아홉 번을 벼리는 과정을 거치며 재질의 밀도와 유연성이 조화를 이룬다. 전국 최고의 명성을 이어가는 남원 식칼이 전통식도 부문 전국 소비량의 70%를 차지한다고 한다. 요리전문가 임종연씨는 “칼이 손에 딱 잡히고 써는 데도 힘이 하나도 안 든다. 전통 칼은 숫돌은 물론 질그릇에만 갈아도 날이 살아난다”며 ‘남원 칼은 세계 최고의 부엌칼’이라고 말했다.

땅 따당, 망치로 쇠를 내려치는 소리가 경쾌한 대장간. 두꺼운 장갑을 끼고 화덕에서 붉게 달아오른 쇠를 꺼내어 커다란 쇠망치로 내려치며 담금질하는 여자가 있다. ‘부흥식도’(남원시 어현동) 대장간의 여자 대장장이 정길순씨(60). 이른 아침부터 강추위가 몰아쳤지만 강철을 마치 떡 주무르듯 하는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단단한 체구에 얼핏 보면 남자처럼 짧게 커트머리를 한 그녀는 남자도 하기 힘들다는 대장간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30여년간 칼을 만들고 있는 유일무이한 여장부 대장장이다.

1973년 남원시내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던 남편을 만나면서 운명처럼 칼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물세 살 춘향이처럼 꽃다운 나이에 신혼의 단꿈은커녕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대장간 일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그마저 행복한 날들이었다. 2001년 남편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식구들을 부양하는 가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대장간 일을 도맡아 하는 본격적인 대장장이가 된 것이다. “하루 종일 쇳가루 먹어가며 칼을 만드는 일이 너무 힘들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만두고 싶었지. 한여름이면 대장간 온도가 50도를 넘어가요. 하지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살 길이 막막해 결국 다시 쇠망치를 잡을 수밖에요.”

그녀가 만들어내는 칼의 종류는 부엌칼·생선회칼·꼬막칼 등 10여 가지나 되며 낫·도끼·작두·곡괭이 등 못 만드는 것이 없다. 이 모두는 최고의 재질로 인정받는 기차 레일만을 재료로 삼아 2000도에 달하는 무연탄 화로에 달군 뒤 칼날을 물에 식히며 손으로 직접 담금질하는 전통기법으로 생산한 것들이다. 특히 그녀의 칼이 눈길을 끄는 것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정교함이 곁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화덕에서 시뻘겋게 달궈진 칼을 집게로 꺼내 모루 위에서 망치로 칼을 벼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풀무질·메질·담금질·날 갈기 등 남자도 하기 힘들다는 쇳일이지만 여자라고 괄시받거나 그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아 요새도 밤잠을 설쳐가며 연구해. 사내새끼들은 넣을 줄만 알았지 근기가 없어. 우리 집에 온 일꾼들도 좀 배울 만하면 가버려. 이랬다저랬다 저지르기만 하지.” 한평생 쇠를 다룬 여장부답게 정길순씨의 걸쭉한 입담도 일품이다. “피곤한 몸, 한밤중에 꿈을 꾸어도 칼 만드는 꿈을 꾼다니까. 살다보면 슬프고도 힘든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어? 하지만 시뻘겋게 달군 쇠를 탕타당 강약을 조절하며 망치로 두드리고 치지직 담금질을 하다보면 걱정거리가 싹 사라져. 턱 하니 앉아 칼날을 그라인더에 갈다보면 세상 근심이 순식간의 불꽃처럼 훨훨 날아가 버려. 그 맛에 또 일을 하지.”

요즘 부흥식도 대장간에는 그녀의 든든한 후원군이 두 명 더 있다. 바로 친언니인 정옥순씨(63)와 사위 고종호씨(33)다. 대장간의 모든 일을 전수받고 있는 사위와 칼자루에 부흥식도 불도장을 찍는 등 잡일을 거들어주는 언니가 찰떡궁합이다. 인근 대산면에서 농사를 짓는 언니는 잠시라도 틈만 나면 대장간으로 출근해 동생을 도우며 월급도 받는다. 또 남동생도 남원에서 전업사를 운영한다고 하니 기술자 집안이다. 정길순씨가 만드는 칼은 대장간 앞과 광한루 앞의 판매장에서도 팔지만 거의 모두 전국적인 도매상으로 넘어간다. “먹고살기 위해 시작했지만 내가 만든 칼이 전국의 식당이나 가정집에서 쓰인다니 얼마나 가슴이 뿌듯해. 갈수록 재미와 성취감이 더 커진다니까. 남을 해치지 않고, 온갖 잡귀들을 몰아내고 집집마다 행복을 가져오는 그런 좋은 칼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세상을 살리는 나만의 활인검을 만들고 싶어” 하며 호탕하게 웃는다.

몇 년 전부터 남원의 식도 생산업체들은 ‘춘향골 남원식도협의회’를 구성하고 ‘남향일도’의 명품 활성화를 모색해왔다. 널리 알려진 ‘칼의 장인’으로는 남성식도의 대장장이 곽용섭씨(68)와 삼대째 이어온 은성식도의 대장장이 박판두씨(64) 등이 있다. 이들의 칼이 좋다고 소문이 나자 엉뚱하게도 “날이 긴, 일명 조폭용 칼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아무리 거금을 준다고 해도 절대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을 살리는 남원 칼의 자부심이다.

벽암록에 취모검(吹毛劍)이라는 말이 나온다. 칼날 위에 머리카락을 올려놓고 입으로 불면 끊어지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칼로 고대의 명검을 말한다. 예산안 처리를 앞두고 꼼수를 부리거나 어정쩡한 국회의원들에게 취모검은 아니더라도 꼭 선물하고 싶은 칼이 있다. 4대강 죽이기 예산 등 혈세 낭비를 단칼에 베어버릴 활인검으로 남원 식칼을 숫돌에 잘 갈아 한 자루씩 택배로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