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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규의 길인생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7) 곡성 ‘지푸라기 소 할배’ 신남균

이원규 | 시인

ㆍ평생 고락을 함께했던 소가 그리워 ‘볏짚 황금소’를 키우다

이 땅의 모든 농부들은 예술가였다. “감잎 나올 때 콩 심어라.” 동네마다 조금씩 다른 ‘생의 시간표’를 온몸으로 아는 농사기술도 감동적이지만, 볏짚으로 새끼를 꼬아 멍석과 짚신을 삼을 줄 알았다. 지게·쟁기·물레방아를 만들며 초가지붕을 이거나 집을 지었다. 그 모두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수제작품들이었다.

농부의 아내는 된장과 간장, 다양한 김치·젓갈뿐만이 아니라 술도 담글 줄 아는 발효미학의 달인들이었다.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바느질·뜨개질로 옷을 만들고 수를 놓았다. 집집마다 웬만한 것들은 자급자족하는 생활예술의 극치들이 바로 삶 그 자체였다. 서울 명륜동의 짚풀생활사박물관(관장 인병선 시인)에 가보면 우리 짚·풀문화의 진경을 확인할 수 있다.

예전에는 농사의 절반은 소가 짓고 나머지는 농사꾼이 지었다. 소는 쟁기질을 하며 송아지를 낳고 거름까지 만드는 고마운 한 식구였다. 자식들의 ‘장학금’이자 문간방에 사는 ‘교육보험’이었다. 그러나 소를 대신해 농기계가 들어오면서 농부의 손은 오히려 퇴화됐다. 경운기·트랙터·콤바인 등으로 조금 더 편해졌지만 그만큼 빚만 더 늘어나고 손은 퇴화되고 행복지수는 떨어졌다. 이제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처럼 소와 동반자로서의 관계는 끝났다. 머지않아 동물원에서 조련사들이 소를 길들여 쟁기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데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이 속담을 한자로 쓰자면 천붕우출유혈(天崩牛出有穴)이라 하는데, 여기에서 ‘솟아날 구멍’은 바로 ‘소가 나올 구멍’인 것이다. 왜 하필이면 소였을까.

신남균씨가 아내와 함께 짚으로 만든 송아지를 아기처럼 안아 올리고 있다. | 이원규 시인 촬영


전남 곡성군 석곡면 염곡리 기동마을에 가면 소가 그리워 6년째 볏짚으로 소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 ‘지푸라기 소 할배’ 신남균씨(71). “나가 키우던 소들을 생각함서 겨울 내내 맨들았제. 외양간을 지날 때마다 자꾸 눈에 밟힌당께. 맴도 몸도 빈 소마구처럼 텅텅 비어불고.” 그는 2004년 경운기 사고로 크게 다치는 바람에 소를 다 팔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한때는 여덟 마리까지 키우며 농사도 짓고 해마다 새끼를 낳으면 그 송아지를 팔아 자식들을 다 키웠다.

염곡리 기동마을은 10여가구가 사는 아주 작은 마을로 ‘골짝나라’ 곡성군에서도 한동산과 천왕봉에 에워싸인 오지마을이다. 한때는 32가구까지 사는 마을로 한 집에 열 식구가 살기도 했으나 이제는 노인 혼자 살거나 부부가 사는 집이 반반이니 열댓 명이 전부다. 처음 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 신남균 할아버지의 집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을 중간의 허름한 창고 같은 건물에 ‘짚풀공예작품’이라는 노란 현수막이 걸려 있고, 바로 그 앞 길가에 웬 노인 한 분이 오래된 탈곡기를 고치고 있었다.

“할아버지, 뭐하세요? 혹시 소 할아버지 아니세요?” 하니 웃기만 한다. 가는귀가 먹은 것이다. 다시 큰소리로 물으니 “응, 나여. 이걸 고물상에서 3만원 주고 산 건데, 할망구 콩 타작할 때 쓰라고. 아따, 이제 다 고쳐부렀어.” 그는 2005년 겨울에 처음으로 ‘그리운 소’를 만들었다. 자식들은 객지로 떠나고 소까지 다 팔고 나니 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지만 아내 이차순씨(67)와 단둘이 보내는 폭설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도 적막했다. “근께 엄청나게 눈이 와부렀어. 마눌하고 단둘이 사는데 오도가도 못하고, 뭐 별로 할 일도 없고 까깝했제. 자꾸만 빈 외양간을 쳐다보믄 속이 아프고, 눈물도 핑 돌고, 그래서 문득 옛날 생각에 소를 맨들아봤제. 아이구, 쪼매 시원찮긴 해도 되더라구. 또 하다봉께 재미도 나고 밤을 새다시피 했당게.”

짚공예 작품 ‘쟁기질하는 소와 농부’ | 이원규 시인 촬영

아내 이차순씨는 그날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외양간에서 볏짚단을 가지고 와 물을 축이더란다. “저 냥반이 옛날부터 덕석이니 소쿠리니 이런 것들을 잘 맨들었지만, 그날은 뭐 요상한 것을 맨들어. 지푸락을 가져다 탈탈 털어 새끼줄을 꼬더만 또 한참을 생각허고 연방 담배를 피우더니 또 하고. 물어도 대답도 안 허니 나는 그만 지겨워 자버렸제. 근데, 며칠을 그러더니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깜짝 놀라 자빠질 뻔했당게요. 소가, 누렁소가 한 마리 방안에 떡하니 서 있더랑께요. 참말로 밤새 지푸락으로 생 씨름을 하더니 하이고, 글매 우리 집에서 키우던 소를 맨들아놓았더랑께요.”

그는 아내와 함께 이 ‘그리운 소’를 텅 빈 외양간에 들였다. 그 이후부터는 왠지 허전한 마음도 사라지고 속 깊은 가슴속의 멍울도 한순간에 풀렸다. 그리고 한 마리는 외로우니까 ‘집소’가 아닌 ‘짚소’를 더 낳아야 했다. “어미 소가 있으믄 송아지가 있어야 정답이제. 그래서 또 맨들고 하다봉게 어찌나 재미가 나던지 겨울이 어데 간 줄도 몰랐당게.”

그는 어릴 때부터 재주꾼이었다. 볏짚 등의 지푸라기는 너무나 익숙했다. 소꼴을 베는 것부터 볏짚·보릿짚 할 것 없이 농사꾼의 손에는 늘 지푸라기가 잡혀 있었다. 밀짚으로 여치집을 만들고, 소쿠리·덕석·망태기 등 못 만드는 것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초가지붕을 이러 다녔다. 제일 어렵다고 하는 용마름도 금방 배웠다. “우리 마을에 기술자가 있었는디, 내가 그 냥반 조수로 두 번 따라해 보고는 다 알았당게. 그 다음부턴 내가 기술자 행세를 했제. 예전엔 짚을 쌀 다음으로 애꼈지라. 겨우내 소여물도 줘야 하고 지붕도 새로 이야 하고 가마니도 짜야 하고, 짚이 없으믄 아무것도 못했제.”

그는 농사를 지어도 볏짚을 쓰기 위해 직접 낫으로 벤다. 남들은 콤바인으로 순식간에 베지만 그러면 볏짚에 손상이 많이 가는데다 짧아져서 못쓰기 때문이다. 직접 농사를 짓고 직접 베어 홀태로 훑는다. 그리고 볏짚을 말릴 때도 절대로 비를 맞지 않게 잘 단도리를 해야 한다. 볏짚에는 비가 치명적인 독약인 비상 같은 것이라 했다. 황금색의 볏짚이 잿빛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큰 소 한 마리를 만드는 데만 최소 20일은 걸리는 데다 그 볏짚을 만드는 과정까지 포함하면 ‘작품준비’를 잘 해야만 하는 딱 1년 농사인 것이다.

짚공예 작품 ‘외양간의 어미소와 송아지’ | 이원규 시인 촬영


그의 집에는 온통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 대문 밖의 헛간 전시장과 문간방, 그리고 외양간을 비롯해 온 마당에는 볏집으로 만든 소와 더불어 온갖 소재의 작품들이 널려 있다. 지난 여름에는 마당에다 물레방앗간을 복원했으며, 나무를 깎아 한 쌍의 새를 만들기도 했다. “맨들어야겠다고 마음 묵으면 기어코 만들어불제.” 볏짚으로 만든 ‘황금빛 소’를 한 번 만들고 나니 이제 척 보기만 해도 다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옛날에 키우던 강아지를 만들기도 하고, 텔레비전을 보다 캥거루가 나오면 그마저 바로 만들었다.

돼지, 사슴, 부엉이, 코끼리, 공룡, 문어, 쟁기질하는 소, 시집갈 때 타고 가는 가마, 말타는 이순신 장군, 할아버지의 조상인 신숭겸 장군, 인당수에 빠지러 가는 심청…. 소가 불러낸 그의 예술적 열정은 마치 ‘일소’처럼 끝이 없다. 겨우내 식을 줄 모른다. 말은 잘 하지만 귀가 어두운 그를 대신해 아내가 반쯤은 통역을 해줬다. “어떨 땐 저것들만 맨들고 있응께 화도 나지만 그래도 또 뭘 맨드까 신기하제라. 쟁기질 하는 소를 맨들면 꼭 우리 소맨치로 맨들어 더 생각나게 해불고. 당신 하고잔 대로 원없이 맨들다 가시라고 인자는 나도 많이 거든당께. 이 냥반이 한밤중에도 문어가 묵고 싶으면 벌떡 일어나 문어를 만든당께요, 호호호.”

신남균 할아버지는 곡성장에서도 유명인사다. ‘헛짓거리’인 줄 알았던 짚풀공예가 농업박람회나 심청축제 등에서 눈길을 끌면서 “손이 워처케 생겼가니 잘 맨드냐”며 인기가 많다. 얼마 전에는 볏짚으로 만든 ‘황금소’ 한 마리를 부산 사람에게 팔았는데, 거금 백만원이나 받았다고 한다. 물론 일당으로 쳐도 최소 20일은 해야 하니 밑지는 ‘순수예술’의 장사다. 하지만 마치 어미 소가 송아지라도 낳은 듯 “내 소를 꼭 가지고 싶다니 얼매나 좋소” 하며 흐뭇해했다. 그는 “손자녀석들이 우리 할아버지 짱이라며 명함도 만들어주었당께. 바로 이거여” 하며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명함에는 ‘금송아지 지푸라기 할배’라고 적혀 있었다. 문득 동네밴드 공연 때 노래로 만든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라는 내 시의 제목을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황금소가 된 그대여’로 바꾸고 싶어졌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그 종자를 베고 죽는다’고 했다. 오지마을의 농부이자 예술가인 신남균 할아버지를 만나고 바이크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자꾸 이명처럼 소울음 소리가 들렸다. ‘천지개벽의 대환란 시에는 소울음 소리에 귀의하라.’ 격암 남사고와 최제우 선생이 말한 ‘우성귀의(牛聲歸依)’의 때가 오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