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또 전쟁이 난다카는데, 마캉 그 혓바닥을 다 묻어야돼”
말을 너무 많이 한 날은 혓바닥이 돌처럼 뻣뻣해지는 느낌이 든다. 거짓말을 했거나 아는 것 이상을 말했거나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옛말에 ‘한 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지만 그 반대로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 했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입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귀는 둘이고 입은 하나다. 절묘한 비율이 아닌가. 경청의 전제 없이 하는 모든 말은 비판이든 칭찬이든 안 하느니만 못하다. 구약성서 잠언에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고 경고한 지 실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 이전과 이후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 베지 않은 콩밭 너머로 방치된 ‘말무덤’이 보인다. 이원규 시인 촬영
‘말’을 묻으니 다툼이 없더라
- 예부터 마을 문중간 싸움 그칠 날 없어 미움의 씨앗 ‘말’을 사발에 담아 묻으니 그 후론 욱하다가도 말무덤 보며 참아 -
내가 아직 어렸을 때는 고향 사투리가 부끄러웠다. “뭐 해여?” “어디 가여?” “그래여, 안 그래여?” 등 ‘여’자로 끝나는 문경·상주·김천 지역의 특이한 사투리가 어디서나 눈길을 끌었으며, 나 또한 도시 친구들에게 많은 놀림을 받기도 했다. 시낭송을 하더라도 ‘그’가 ‘거’로 발음되고, ‘에’가 ‘애’로 발음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혀의 구조도 콤플렉스였다. 그런데다 이런 사투리가 경북의 보수 혹은 수구적인 사고와 맞물려 대통령 선거 때마다 여당후보를 찍지 않는 이는 곧바로 ‘빨갱이’로 몰려야 하는 ‘레드콤플렉스’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고향 사투리가 정겨워지고 자꾸 그 쪽으로 귀가 쏠린다. 참으로 웃기는 말이지만 “이리 둔누봐여(드러누워봐), 오빠를 거키(그렇게) 못믿어여”라는 남자들의 유혹과 흑심의 말마저 살갑게 다가오는 것이다.
솔직히 내 젊은 날의 인생에 있어 한 번도 써먹지 못한 고백이라 생각하니 참으로 아쉽기도 하다. “내 아를 낳아도”라는 직설적인 청혼의 말처럼 어찌 이토록 서투르고 투박한 고백이 세련된 말보다 더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것일까.
이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우스갯소리를 더 하자면 이렇다. 얼마 전 전라도 장흥에 갔을 때 화가 친구 몇 명과 술 마실 기회가 있었다. 으레 첫 잔을 따를 때는 나이순으로 따르는데 서로 비슷하다보니 “내가 호적이 틀려서 그렇지 너보다 형이랑께” 등 즐거운 승강이가 벌어졌다. 바로 그 때 한 화가가 해결사로 나섰다. “그라믄 이렇게 하지라. 자 입관 순서대로!” 허걱, 나이 많은 순서를 입관(入棺) 순서로 한 순간에 바꾸다니! 그 입담 한 마디에 폭소가 터지면서 서로 빈 잔을 빼는 것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으면서도 즐거운 말의 재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비트겐슈타인은 ‘말은 곧 행위다’라고 정의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듯이 때로는 비수가 되어 상대방을 찌르는 무자비한 폭력이 되기도 한다.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내면과 인격을 가늠할 수 있다. 요즘처럼 망언과 폭언과 욕이 판을 치는 시절도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오염된 언어는 ‘불통’을 넘어 협박에 가깝다. ‘화는 입에서 나오고 병은 입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바로 이러한 전쟁불사의 시절에 문득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한대마을) 앞의 말무덤이었다. 애마(愛馬)를 묻은 곳이 아니라 ‘말씀의 무덤’인 언총(言塚)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무덤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처음 이곳을 찾아간 것은 4년 전 우연히 경향신문의 ‘별난 곳 별난 일’에 소개된 기사를 읽은 직후였다. 순간 ‘바로 이것이다. 이제서야 내 시의 한계를 알겠다. 그곳에 오래 전부터 말없는 스승이 한 분 계셨구나’ 하는 예감이 왔던 것이다. 실제로 ‘혀무덤’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비석 앞면은 한글로 ‘말무덤’(작은 사진), 뒷면은 한자로 ‘言塚(언총)’이라 새겨져있다. 이원규 시인 촬영
- 4대강 몸살 앓는 말무덤 보니 속 쓰려 망언과 욕이 난무하는 ‘말 많은 곳’에‘말무덤 처방’을 내릴 때가 아닐는지 -
예부터 이 마을에는 김녕김·밀양박·김해김·진주류·경주최·인천채씨 등 많은 성씨들이 살았는데 문중간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큰 싸움으로 번지는 등 말썽이 잦자 마을 어른들은 그 원인과 처방을 찾기에 골몰했다. 어느 날 한 과객이 이 마을을 지나다 산의 형세를 보고는 “좌청룡은 곧게 뻗어 개의 아래턱 모습이고, 우백호는 구부러져 길게 뻗어 위턱의 형세라 마치 개가 짖어대는 형상을 하고 있어 마을이 항상 시끄럽다”며 예방책을 일러주고 떠났다.
실제로 대죽리를 둘러싸고 있는 야산은 그 형세가 마치 개가 입을 벌리는 듯해 ‘주둥개산’이라 불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과객의 말에 따라 개 주둥이의 송곳니 위치인 논 한가운데에 날카로운 바위 세 개를 세우고, 개의 앞니 위치인 마을길 입구에는 바위 두 개로 재갈바위를 세웠다. 그리고는 마을사람 모두에게 사발을 하나씩 가져오게 한 뒤 주둥개산에 큰 구덩이를 파놓고는 “서로에 대한 미움과 원망과 비방과 욕을 모두 각자의 사발에 뱉어놓으라”고 했다. 싸움의 발단이 된 말(言)들을 사발에 담아 깊이 묻은 말무덤을 만든 것이다. 이런 처방이 있은 뒤부터 싸움이 없어지고 지금까지 두터운 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마을 앞 주둥개산에는 400~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말무덤이 지금도 남아있다. 1990년에 출향인사들이 세운 비석은 숲속에 방치된 채로 앞면에 한글로 ‘말무덤’, 뒷면에 한자로 ‘언총’(言塚)이라 쓰여 있다. 비석이 있는 콩밭 옆에 왕릉처럼 커다란 말무덤이 있는데 얼핏 보면 바위가 있는 언덕처럼 보인다. 바로 그 아래쪽에는 누군가의 무덤이 있다. 재갈바위는 경지정리와 진입로 공사로 마을회관 앞 등으로 옮겨졌으나, 관련기록이 없어 예천군청도 전설 형태로 소개하고 있다. 50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말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나는 예천이나 안동을 갈 때는 꼭 이곳에 들르는데 때로는 텐트를 치고 야영하기도 했다. 이번에 갔을 때 만난 김경철 할아버지(78)는 “내가 원래 이 마을이 안태 고향이라. 우째 말무덤을 다 알고 찾아왔능교?” 하며 반색을 했다. “인자 우리는 안 싸워. 홧김에 욱하다가도 말무덤을 보며 참는다카이. 다 늙은이들끼리 뭐하러 싸우겠노. 하이고, 또 전쟁이 난다카는데, 마캉 혓바닥을 뽑아다 묻어야돼. 텔레비에 나오는 세상만 날마동 지랄발광이지, 허허.” 위태위태한 시절에 대죽리 마을사람들의 지혜가 절절하게 다가온다.
말무덤 앞에서 두 번째 들깨 타작을 하는 할머니는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의성에서 시집와 30년 전에 남편을 잃고 혼자 산다는 최옥분 할머니(80). 혼자 농사짓고 소를 키우며 억척스럽게 삼남매를 키웠다고 한다. “비오고 눈 온다카이 빨리 털어야제. 아들은 마카 도회지에 가고 나 혼자 살아. 사는 기 심들어 겨우 아들 하나만 공부 시켰어. 그래도 내 아들이 선생이여.”
여든 살에 아직도 허리가 꼿꼿한 할머니는 겨울에는 아들 집에 갔다가 설 지나 온다고 했다. “말무덤이 면이 마이 났나부지. 콩밭 옆에 무덤은 맹 그대로 있는데 인차는 제사도 안지내여. 뭐 싸울 일도 없고, 아이고 너무 오래 살아 걱정이여. 올개(올해)는 저래 4대강인가 뭔가 공사한다고 농사도 못 짓게 해. 보조가 좀 낫게 나온다지만, 아이고 2년 농사 못 짓지어. 농사꾼이 농사 안 짓고 사먹을라믄 참말로 마뜩 찮아요.”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주둥개산 앞은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마을 앞 지방도 건너가 바로 낙동강인데 그곳에도 4대강 사업을 벌이는 트럭들이 마치 전차군단처럼 들락거리며 논바닥에 야적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보다 더 소름끼치는 소음과 흙바람이 주둥개산 말무덤을 휩싸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죽이기’가 ‘살리기’로, ‘불공정’이 ‘공정’으로, ‘전쟁불사’가 ‘평화’로 변질되는 정권차원의 ‘말 바꾸기’와 ‘말의 독점’이 서슬 시퍼렇게 퍼지고 있었다.
이제 말무덤을 옮길 때가 된 것 같다. ‘말 많은 집안은 장맛도 쓰다’고 했다. 청와대와 국회 앞에 ‘세치 혀의 무덤’을 하나 팔 때가 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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