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 시인
입력 : 2010-11-09 21:29:40ㅣ수정 : 2010-11-09 21:29:41
ㆍ‘생명의 소리’로 우는 천년수 품에서 시인들은 울고 또 울었다
시절이 하수상하다보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세상의 안부를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지리산이나 계룡산의 도사에게도 묻고 싶고, 곰팡내 나는 <송하비결>을 훔쳐보며 ‘산 아래 핏빛이 돈다(山下血光)’는 등 경인년(庚寅年)의 불길한 예언 ‘백호쟁명살’에 한 갑자 전인 한국전쟁 때와 비슷한 위기의 국운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치는 것이다.
예언은 그저 불운과 불행의 경계일 뿐이라지만, 당대의 큰 어른들이 다 떠나고 온 산하가 위기에 처한 불통의 시절에 도대체 누구의 무릎 아래 엎드려 길을 물어나 볼 것인가. ‘사람만이 희망’이 아니라 요즘의 실세 위정자들처럼 ‘사람만이 절망’이라면 이를 어찌할 것인가.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몇 말의 ‘땀을 흘린다’는 경남 밀양의 표충비(表忠碑)를 찾아갈 것인가, ‘소울음 소리로 운다’는 충북 영동 천태산 영국사(寧國寺)의 천년수 은행나무를 찾아갈 것인가. 허허로운 심정으로 세상을 둘러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늦가을의 단풍잎마저 나의 두 눈에는 ‘자연의 경고장’인 옐로카드로 보이고, 떨어지는 낙엽마저 자꾸 레드카드로 보였다.
때마침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대표 양문규 시인)에게서 초대장이 왔다. 제목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환해지는 ‘2010년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詩祭)’를 지낸다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남한의 중심에 위치한 충북 영동은 내게 있어 감나무 가로수와 올갱이해장국으로 그 풍경과 얼큰한 맛이 깊이 각인돼 있다. 사람으로는 20여년 전 민족문학작가회의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실무자로 나와 함께 일하던 양문규 시인과 그의 동생 양선규 시인이 먼저 떠오른다.
2002년 서울살이를 청산한 양문규 시인이 머물던 영국사는 자궁형의 산세 한 가운데 들어앉아 있는데, 규모는 작아도 충북에서 속리산 법주사 다음으로 많은 문화재가 있는 명찰이다. 만월사(滿月寺)·국청사(國淸寺)로 불리던 영국사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들어왔을 때 노국공주와 천일기도를 한 끝에 난을 평정했다고 하여 ‘나라를 평안케 하는 절’이란 뜻의 영국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영국사로 오르는 오솔길은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의 백미였다.
특히 천연기념물 223호인 천태산 영국사 은행나무는 국가의 재난이 있을 때마다 크게 울었다는 신목(神木)으로 높이가 31m, 가슴 높이 둘레만 11m일 정도로 거대한 천년수다. 절 입구 고갯길을 넘어서며 채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에 첫눈에 확 다가서는 은행나무의 신비로운 수형과 거대한 풍모에 눌려 나도 모르게 합장부터 해야 했다. 과연 ‘천태산 영국사의 부처님’으로 불릴 만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노거수 은행나무로는 용문사와 더불어 금산 보석사와 낙안읍성 등에도 있지만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의 이 나무가 훨씬 더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천년 세월을 넘어 아직도 해마다 은행이 세 가마니 정도 열리는 데다 가지 한 가닥이 늘어져 땅에 닿았다가 거기서 다시 순이 돋아 또 한 그루의 새끼나무로 대를 잇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나는 그동안 틈나는 대로 신목을 찾아다녔다. 당산나무 등 노거수들을 찾아가 마치 투정을 부리듯 세상사를 고하고 끝내 한마디 말도 없는 나무의 훈계를 들으면서도 그 품에 안겨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기도 했다. 남해군 창선면의 왕후박나무, 송광사 천자암의 쌍향수, 상주군 은척면의 뽕나무, 고창군 대산면의 이팝나무, 지리산 뱀사골 와온마을의 천년송 등은 마치 어머니처럼 스리슬쩍 가지를 뻗어내려 뒤늦게 새벽잠에 든 나의 등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지리산 천년송의 오뉴월 바람소리로 ‘솔바람 태교(胎敎)’를 했다는 말만 들어도 온통 생명의 소리로 가슴이 설렜다. 4대강의 내장이 다 파헤쳐지는 무지막지한 시절에 아직 태어나기 전의 아이에게도 솔바람소리로 태교를 하던 어머니의 마음을 어디에서 되찾을 것인가.
천 년의 세월동안 생명을 품어온 자연 그대로의 은행나무가 슬피 울면 그것은 곧 국가적 환란과 재난을 예고한다는 전설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천태산 자락에 ‘이젠 모든 것을 비워두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마련한 여여산방(如如山房)에 둥지를 튼 양문규 시인은 이 은행나무의 울음소리를 새롭게 해석했다. 경고나 두려운 예지의 울음소리로 보기보다는 “그 울음은 희망을 노래하는 전령, 미혹의 세계에서 각성의 세계로 오는 생명의 소리”라며 훨씬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내 것이 아닌 자리에 욕심 부리지 않고, 남의 생명을 다치지 않게 하며, 타인을 나처럼 소중히 여기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실천하려는 자세와 맞닿아 있다.
그리하여 지난 11월6일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누교리 주민들이 주최한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가 열린 것이다. 이번에는 시낭송과 더불어 사화집(詞華集)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전국의 시인 218명이 자신의 시와 마음을 모아 <시를 부르는 은행나무>를 펴냈다. 은행나무에게 바치는 시와 당대의 짧은 명시·명문의 선집으로 고은 신경림 천양희 도종환 안도현 문인수 이재무 공광규 시인 등이 참여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시제는 천태산 옛길 따라 걷기와 영동 풍물굿 윤슬사위의 비나리, 양문규 시인의 고유제 축문 낭독, 김종찬 영동난계국악단원의 대금연주, 시인들의 시낭송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10월18일부터 천태산을 오르는 길목부터 은행나무 주변 곳곳에 사화집에 담긴 218명의 시로 우리나라 최대의 걸개 시화전을 열었다. 행사 1주일 전의 기습한파로 노란 은행잎들이 다 지는 바람에 조금은 아쉬웠지만, 마을주민들이 정성껏 준비한 국밥과 막걸리와 국수로 잔칫상을 차리니 마음만은 은행잎처럼 환했다.
아마 한 나무에게 200여명의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바친 것은 전 세계에 없는 일일 것이다. 누대에 걸쳐 좌절과 절망을 제 울음으로 감싸고 있는 은행나무의 큰 품에 시를 바친 것이니, 이는 신작이든 발표작이든 관계없이 은행나무가 ‘생명의 소리로’ 울고 또 울어 시인들을 부르고 또 시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금 되새겨보아야 할 일이 있다. 특이하게도 하필이면 이명박 정권 시절에 시인들이 나서는 일이 몇 번 더 일어났다는 점이다. 먼저 한반도대운하 반대를 위한 203인의 공동시집 <그대로 놔두라 쓰라린 백년 소원 이것이다>가 있다. 시인 203명의 신작시와 화가·서예가 11인의 작품을 한데 모은 이 공동시집은 한국의 문화예술인들이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사업에 일대 반기를 들고, 작품을 통해 대국민 호소에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그리고 또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를 통해 시인 262명이 저마다 하나씩의 ‘작은 비석’들을 세웠으며, 이시영 황지우 이성부 안도현 등 시인 157명이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뒤에 쓴 헌정시를 주축으로 <님이여, 우리들 모두가 하나 되게 하소서>를 펴내기도 했다.
천태산 은행나무와 4대강, 고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바치는 시집들은 모두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 나무에 대한, 한 인간에 대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헌정과 추모시 모음집으로서는 지금까지 한국문학사는 물론 세계문학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신동엽 시인의 시처럼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는 시절은 오기나 할 것인가. 신동엽의 금강이 울고 금강을 따라 은행나무도 다시 울고 4대강이 커렁커렁 울고, 남한강으로 귀촌한 홍일선 시인이 울고 또 다른 시인들이 얼마나 더 울어야 제정신을 차릴 것인가.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이제는 우리 모두 온 국토의 파수꾼이 될 때가 왔다. 이미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의 대운하반대 종교인 순례 때 나온 얘기처럼 4대강에도 인간띠를 이을 때가 온 것이다. 조금은 늦었지만 우리 모두 강변에 나아가 쓰레기를 줍고 야생화 씨를 뿌리며 일시적인 저항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당당하고도 떳떳하기 위해서다. ‘민족의 성지’이자 ‘생명의 어머니’인 강의 자식으로 돌아가 저마다 1m씩의 강을 가꾸고 지키는 주인으로서 스스로 ‘명예분양자’가 되는 것이다. 1200㎞의 강에 120만명이면 충분하다. 가족 소풍을 가도 그곳으로 가서 사진을 찍고, 여의도 광장에 모여 그 사진을 다 이으면 또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강이 되어 흐를 것이다.
시절이 하수상하다보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세상의 안부를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지리산이나 계룡산의 도사에게도 묻고 싶고, 곰팡내 나는 <송하비결>을 훔쳐보며 ‘산 아래 핏빛이 돈다(山下血光)’는 등 경인년(庚寅年)의 불길한 예언 ‘백호쟁명살’에 한 갑자 전인 한국전쟁 때와 비슷한 위기의 국운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치는 것이다.
예언은 그저 불운과 불행의 경계일 뿐이라지만, 당대의 큰 어른들이 다 떠나고 온 산하가 위기에 처한 불통의 시절에 도대체 누구의 무릎 아래 엎드려 길을 물어나 볼 것인가. ‘사람만이 희망’이 아니라 요즘의 실세 위정자들처럼 ‘사람만이 절망’이라면 이를 어찌할 것인가.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몇 말의 ‘땀을 흘린다’는 경남 밀양의 표충비(表忠碑)를 찾아갈 것인가, ‘소울음 소리로 운다’는 충북 영동 천태산 영국사(寧國寺)의 천년수 은행나무를 찾아갈 것인가. 허허로운 심정으로 세상을 둘러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늦가을의 단풍잎마저 나의 두 눈에는 ‘자연의 경고장’인 옐로카드로 보이고, 떨어지는 낙엽마저 자꾸 레드카드로 보였다.
지난 6일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누교리 주민들이 함께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詩祭)를 지냈다. 국가의 재난이 있을 때마다 크게 울었다는 신목(神木), 천년의 세월 동안 생명을 품어 온 거목(巨木) 앞에서 그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고자 기원해 본다. | 이원규 시인 촬영
때마침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대표 양문규 시인)에게서 초대장이 왔다. 제목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환해지는 ‘2010년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詩祭)’를 지낸다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남한의 중심에 위치한 충북 영동은 내게 있어 감나무 가로수와 올갱이해장국으로 그 풍경과 얼큰한 맛이 깊이 각인돼 있다. 사람으로는 20여년 전 민족문학작가회의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의 실무자로 나와 함께 일하던 양문규 시인과 그의 동생 양선규 시인이 먼저 떠오른다.
2002년 서울살이를 청산한 양문규 시인이 머물던 영국사는 자궁형의 산세 한 가운데 들어앉아 있는데, 규모는 작아도 충북에서 속리산 법주사 다음으로 많은 문화재가 있는 명찰이다. 만월사(滿月寺)·국청사(國淸寺)로 불리던 영국사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들어왔을 때 노국공주와 천일기도를 한 끝에 난을 평정했다고 하여 ‘나라를 평안케 하는 절’이란 뜻의 영국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영국사로 오르는 오솔길은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의 백미였다.
특히 천연기념물 223호인 천태산 영국사 은행나무는 국가의 재난이 있을 때마다 크게 울었다는 신목(神木)으로 높이가 31m, 가슴 높이 둘레만 11m일 정도로 거대한 천년수다. 절 입구 고갯길을 넘어서며 채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에 첫눈에 확 다가서는 은행나무의 신비로운 수형과 거대한 풍모에 눌려 나도 모르게 합장부터 해야 했다. 과연 ‘천태산 영국사의 부처님’으로 불릴 만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노거수 은행나무로는 용문사와 더불어 금산 보석사와 낙안읍성 등에도 있지만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의 이 나무가 훨씬 더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천년 세월을 넘어 아직도 해마다 은행이 세 가마니 정도 열리는 데다 가지 한 가닥이 늘어져 땅에 닿았다가 거기서 다시 순이 돋아 또 한 그루의 새끼나무로 대를 잇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나는 그동안 틈나는 대로 신목을 찾아다녔다. 당산나무 등 노거수들을 찾아가 마치 투정을 부리듯 세상사를 고하고 끝내 한마디 말도 없는 나무의 훈계를 들으면서도 그 품에 안겨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기도 했다. 남해군 창선면의 왕후박나무, 송광사 천자암의 쌍향수, 상주군 은척면의 뽕나무, 고창군 대산면의 이팝나무, 지리산 뱀사골 와온마을의 천년송 등은 마치 어머니처럼 스리슬쩍 가지를 뻗어내려 뒤늦게 새벽잠에 든 나의 등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지리산 천년송의 오뉴월 바람소리로 ‘솔바람 태교(胎敎)’를 했다는 말만 들어도 온통 생명의 소리로 가슴이 설렜다. 4대강의 내장이 다 파헤쳐지는 무지막지한 시절에 아직 태어나기 전의 아이에게도 솔바람소리로 태교를 하던 어머니의 마음을 어디에서 되찾을 것인가.
천 년의 세월동안 생명을 품어온 자연 그대로의 은행나무가 슬피 울면 그것은 곧 국가적 환란과 재난을 예고한다는 전설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천태산 자락에 ‘이젠 모든 것을 비워두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마련한 여여산방(如如山房)에 둥지를 튼 양문규 시인은 이 은행나무의 울음소리를 새롭게 해석했다. 경고나 두려운 예지의 울음소리로 보기보다는 “그 울음은 희망을 노래하는 전령, 미혹의 세계에서 각성의 세계로 오는 생명의 소리”라며 훨씬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내 것이 아닌 자리에 욕심 부리지 않고, 남의 생명을 다치지 않게 하며, 타인을 나처럼 소중히 여기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실천하려는 자세와 맞닿아 있다.
그리하여 지난 11월6일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누교리 주민들이 주최한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가 열린 것이다. 이번에는 시낭송과 더불어 사화집(詞華集)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전국의 시인 218명이 자신의 시와 마음을 모아 <시를 부르는 은행나무>를 펴냈다. 은행나무에게 바치는 시와 당대의 짧은 명시·명문의 선집으로 고은 신경림 천양희 도종환 안도현 문인수 이재무 공광규 시인 등이 참여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시제는 천태산 옛길 따라 걷기와 영동 풍물굿 윤슬사위의 비나리, 양문규 시인의 고유제 축문 낭독, 김종찬 영동난계국악단원의 대금연주, 시인들의 시낭송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10월18일부터 천태산을 오르는 길목부터 은행나무 주변 곳곳에 사화집에 담긴 218명의 시로 우리나라 최대의 걸개 시화전을 열었다. 행사 1주일 전의 기습한파로 노란 은행잎들이 다 지는 바람에 조금은 아쉬웠지만, 마을주민들이 정성껏 준비한 국밥과 막걸리와 국수로 잔칫상을 차리니 마음만은 은행잎처럼 환했다.
아마 한 나무에게 200여명의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바친 것은 전 세계에 없는 일일 것이다. 누대에 걸쳐 좌절과 절망을 제 울음으로 감싸고 있는 은행나무의 큰 품에 시를 바친 것이니, 이는 신작이든 발표작이든 관계없이 은행나무가 ‘생명의 소리로’ 울고 또 울어 시인들을 부르고 또 시를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금 되새겨보아야 할 일이 있다. 특이하게도 하필이면 이명박 정권 시절에 시인들이 나서는 일이 몇 번 더 일어났다는 점이다. 먼저 한반도대운하 반대를 위한 203인의 공동시집 <그대로 놔두라 쓰라린 백년 소원 이것이다>가 있다. 시인 203명의 신작시와 화가·서예가 11인의 작품을 한데 모은 이 공동시집은 한국의 문화예술인들이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사업에 일대 반기를 들고, 작품을 통해 대국민 호소에 직접 나섰다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그리고 또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를 통해 시인 262명이 저마다 하나씩의 ‘작은 비석’들을 세웠으며, 이시영 황지우 이성부 안도현 등 시인 157명이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뒤에 쓴 헌정시를 주축으로 <님이여, 우리들 모두가 하나 되게 하소서>를 펴내기도 했다.
천태산 은행나무와 4대강, 고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바치는 시집들은 모두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 나무에 대한, 한 인간에 대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헌정과 추모시 모음집으로서는 지금까지 한국문학사는 물론 세계문학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신동엽 시인의 시처럼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는 시절은 오기나 할 것인가. 신동엽의 금강이 울고 금강을 따라 은행나무도 다시 울고 4대강이 커렁커렁 울고, 남한강으로 귀촌한 홍일선 시인이 울고 또 다른 시인들이 얼마나 더 울어야 제정신을 차릴 것인가.
‘천태산 은행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이제는 우리 모두 온 국토의 파수꾼이 될 때가 왔다. 이미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의 대운하반대 종교인 순례 때 나온 얘기처럼 4대강에도 인간띠를 이을 때가 온 것이다. 조금은 늦었지만 우리 모두 강변에 나아가 쓰레기를 줍고 야생화 씨를 뿌리며 일시적인 저항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당당하고도 떳떳하기 위해서다. ‘민족의 성지’이자 ‘생명의 어머니’인 강의 자식으로 돌아가 저마다 1m씩의 강을 가꾸고 지키는 주인으로서 스스로 ‘명예분양자’가 되는 것이다. 1200㎞의 강에 120만명이면 충분하다. 가족 소풍을 가도 그곳으로 가서 사진을 찍고, 여의도 광장에 모여 그 사진을 다 이으면 또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강이 되어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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