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 시인
입력 : 2010-10-26 21:43:24ㅣ수정 : 2010-10-26 21:52:31
ㆍ낚시꾼도 올갱이도 모두 떠나고 없는 저 강이 정녕 강일까
지리산 정신의 사표로 경남 산청에 남명 조식 선생이 있다면 전남 구례에는 매천 황현 선생이 있다. 매천 선생은 100년 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絶命詩) 3수를 남기고 자결했으며, 남명 선생은 끝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은둔처사로서 신랄한 상소문을 올리며 후학을 양성하는 등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요즘 같은 ‘역주행의 난세’에 이분들의 기개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못해 자꾸 뒷골이 땅긴다.
참으로 고약한 시절에 뻣뻣해진 뒷골을 잠시나마 풀어준 가수가 있으니, 지난 23일 산청에서 열린 ‘제5회 지리산 문화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블루스 싱어송라이터 강허달림이었다. 나의 시낭송 바로 다음 무대에 올라온 그녀는 마치 늦가을 낙엽처럼 허스키한 목소리와 갈대꽃이 흔들리는 듯한 리듬으로 관객들을 휘어잡았다. ‘미안해요’ ‘기다림, 설레임’ 등 호소력 짙은 음색의 노래들이 온몸의 세포들 깊숙이 밤안개처럼 밀려들어왔다.
‘신촌블루스’의 마지막 여성 보컬 강허달림, 그의 본명은 강경순이다. “뽕짝이나 재즈도 내가 부르면 다 블루스가 된다”더니 정말 그런 가수다. 소설가 김별아에 따르면, 그녀는 전남 순천시 상사면 용계리 죽전마을의 가난한 농사꾼 강석구·허만순씨의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목포의 눈물’에 젓가락 장단을 곧잘 맞추고 동네 콩쿠르에 나가 ‘눈물 젖은 두만강’을 구성지게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고향은 수몰되고 말았다. 상사댐이 들어서면서 물속에 가라앉은 것이다. ‘끼와 낙천성을 물려준 아버지, 인생 최고의 친구이자 스승인 어머니의 성씨에다 흔들리지 말고 달려 나가자’는 뜻으로 가수 강허달림이 새롭게 태어났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위기에 처한 낙동강의 한 소녀를 떠올렸다. 환하게 웃을 때마다 보조개와 흰 이가 잘 어울리는 가무잡잡한 얼굴의 소녀, 낙동강변 오지마을에 사는 문경여중 1학년생인 강언나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생각났다. 나는 지리산문화제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바이크의 시동을 걸었다. 구름 때문에 음력 열엿새의 달빛마저 가려진 밤길을 천천히 달렸다. 선물로 받은 앨범 <기다림, 설레임>을 세 번 정도 다시 들을 즈음 구름 사이로 달빛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느새 언나의 낙동강이었다.
노래하는 열네 살 소녀 강언나. 처음 만난 것은 지난 봄 강마을 조사를 위해 경북 문경시 영순면 이목리 금포마을 회관에 사흘 동안 머물 때였다. 진주강씨 집성촌인 이 강마을은 북쪽의 천마산과 앞쪽의 낙동강이 에워싸고 있어 요새처럼 깊숙이 숨어있는 오지였다. 그리하여 낙동강 1300리 길을 두 번이나 걸었지만 강 건너 예천군 삼강주막과 풍양면 하풍리 쪽으로만 지나갔다. 낙동강의 주요 나루터였던 이 마을은 70년대까지만 해도 뱃놀이와 진달래 화전놀이가 유명했다고 한다.
고갯길이 확·포장되면서 문경·예천으로 가는 길은 좋아졌으나 외지인들에 대한 피해의식 또한 만만치 않았다. 특히 지난 봄의 도난사건이 그러했다. 마을기금 80만원을 들여 겨우 장만한 텔레비전이 선이 잘린 채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강치본 이장은 텅 빈 벽면을 보며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더구나 조상을 모시는 ‘금주정사’의 유물까지 훔쳐가려 한 데다 이웃의 백포마을에서도 이장의 생계 수단인 고깃배의 선외기(엔진과 프로펠러)마저 도난당했다. 이런 일을 처음 겪은 주민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하필이면 그 무렵에 찾아갔으니 처음엔 쉽사리 경계를 풀지 않은 게 당연했다.
이 마을의 언나는 이미 ‘트롯 신동’으로 소문난 유명인사였다. 학교에서만 유명한 게 아니라 텔레비전에도 출연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지난 5월에 대구 TBC의 휴먼다큐 <피아노>에 출연해 뭇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두 살 때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송아지’를 가르쳐 주면 어느새 가사를 바꿔 부르는가 하면, 동네 할머니들의 별명으로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언나를 만나자마자 “너 벌써 문경에서 가수로 유명하다며? 노래 한번 들을 수 있을까?” 말을 꺼내자마자 “예, 한번 불러볼까요?” 할 정도로 당당했다. 건강하게 잘 그을린 듯한 피부에 환한 미소,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더없이 해맑았다. “차 드실래요? 저 잘 끓여요” 하며 선뜻 차를 우려내 주기도 했다. 그러고는 “정말 불러볼까요?” 하면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사랑이란 다 그런 거다. 저마다 아픈 사연 가슴에 묻고 살지….” 거침없이 노래를 불렀다. 허스키하면서 탁 트인 목소리가 전율을 일으켰다.
뜻밖이었다. 작은 몸집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간들어지는 목소리, 애절하면서도 시원스럽게 넘어가는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박수에 환호성을 지르자 신이 난 듯 김용임의 ‘내 사랑 그대여’, 홍진영의 ‘사랑의 배터리’ 등 세 곡을 연이어 부르는 것이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듣는다면 도저히 중학교 1학년생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언나네가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화두인 다문화가정이기 때문이다. 언나네는 1996년에 국제결혼을 한 1세대다. 통일교에서 합동결혼 90쌍을 주선할 때 아버지 강언대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가난한 농촌 노총각이 장가를 가려면 농협에 빚을 내 베트남 필리핀에 가든지 통일교에 나가라”는 속설이 실감났다.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촌 곳곳에 이런 낯부끄러운 현수막이 나붙어 있었다. ‘국제결혼 도와드립니다. 후불제 가능!’, ‘베트남 신부 절대 도망 안갑니다!’ 등등 도저히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는 만행들이 ‘G20 정상회의’니 뭐니 하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언나는 아버지 강언대의 ‘언’과 필리핀 어머니 나르시사 옹아이의 ‘나’에서 이름을 따왔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강언대씨는 가난의 대물림으로 여전히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물려받은 땅 한 평 없으니 1주일에 5일 일하는 일당 3만3000원의 ‘희망근로’를 하고, 틈틈이 다른 집의 농사를 거든다. 나르시사 또한 가정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공부방이 따로 없을 정도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방 두 칸이 있지만 하나는 주방이니 한 방에 네 식구가 살고 있다. 지난 봄에는 공부방을 만들어주겠다며 공사를 하는 듯하더니 돈이 모자라 포기하고, 지금은 우선 아이들이 씻을 세면장을 짓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마저 쉽지 않은 듯했다.
다행히도 언나와 동생 경문이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명랑했다. 어머니 나르시사가 “그토록 노래를 좋아하는데 시디플레이어 하나 못 사줘서…” 하고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하자 “엄마, 괜찮아요. 진짜 가수가 돼서, 가수 장윤정처럼 돈 벌어서 엄마 아빠 집 지어줄게요” 하는 언나의 말이 가슴을 쳤다. 트로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언나에게 어울리는 또 다른 노래도 더 많이 잘 불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특히 다문화가정 1세대의 당당한 2세로서 언나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음악지도자나 작곡가로부터 지속적인 교육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피아노를 배울 수도 없는 형편이니 안타깝기만 했다. 문득 지리산 입산 이후 ‘애써 돈을 벌지 않겠다’던 맹세가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노래 부를 때만은 가난과 수몰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꿈을 꾸었다. 평생 노래하며 살겠노라고. 그래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던 가수 강허달림처럼 언나도 노래 하나로 험난한 길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언나네와 강변에 나갔다. 4대강 공사는 어느새 금포마을 앞까지 밀고 올라왔다. 마을 바로 아래인 영풍교 인근에는 청강부대 장병들이 투입된 지 오래다. 더 이상 조용한 강마을이 아니었다. 모래를 실은 트럭들이 가물막이를 건너와 마을 앞 너른 하천부지 농토에까지 드나들기 시작했다. 놀란 고라니 두 마리가 강 위쪽으로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머니와 물수제비를 뜨던 언나가 갑자기 침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내 흙탕물이 내려와서 올여름엔 수영도 못 했어요. 올갱이도 다 사라졌어요. 맛도 못 봤다니깐요.” 정말 그랬다. 강변에 텐트를 치고 상주하다시피 하던 낚시꾼들도 모두 떠나고 없었다. 낚시꾼도 없는 저 강이 강일까? 모두들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군부대도, 낚시꾼도, 고라니도, 물고기도, 올갱이도.
나도 모르게 강허달림의 노랫말을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지리산 정신의 사표로 경남 산청에 남명 조식 선생이 있다면 전남 구례에는 매천 황현 선생이 있다. 매천 선생은 100년 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絶命詩) 3수를 남기고 자결했으며, 남명 선생은 끝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은둔처사로서 신랄한 상소문을 올리며 후학을 양성하는 등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요즘 같은 ‘역주행의 난세’에 이분들의 기개를 생각하면 부끄럽다 못해 자꾸 뒷골이 땅긴다.
참으로 고약한 시절에 뻣뻣해진 뒷골을 잠시나마 풀어준 가수가 있으니, 지난 23일 산청에서 열린 ‘제5회 지리산 문화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블루스 싱어송라이터 강허달림이었다. 나의 시낭송 바로 다음 무대에 올라온 그녀는 마치 늦가을 낙엽처럼 허스키한 목소리와 갈대꽃이 흔들리는 듯한 리듬으로 관객들을 휘어잡았다. ‘미안해요’ ‘기다림, 설레임’ 등 호소력 짙은 음색의 노래들이 온몸의 세포들 깊숙이 밤안개처럼 밀려들어왔다.
‘신촌블루스’의 마지막 여성 보컬 강허달림, 그의 본명은 강경순이다. “뽕짝이나 재즈도 내가 부르면 다 블루스가 된다”더니 정말 그런 가수다. 소설가 김별아에 따르면, 그녀는 전남 순천시 상사면 용계리 죽전마을의 가난한 농사꾼 강석구·허만순씨의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목포의 눈물’에 젓가락 장단을 곧잘 맞추고 동네 콩쿠르에 나가 ‘눈물 젖은 두만강’을 구성지게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고향은 수몰되고 말았다. 상사댐이 들어서면서 물속에 가라앉은 것이다. ‘끼와 낙천성을 물려준 아버지, 인생 최고의 친구이자 스승인 어머니의 성씨에다 흔들리지 말고 달려 나가자’는 뜻으로 가수 강허달림이 새롭게 태어났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위기에 처한 낙동강의 한 소녀를 떠올렸다. 환하게 웃을 때마다 보조개와 흰 이가 잘 어울리는 가무잡잡한 얼굴의 소녀, 낙동강변 오지마을에 사는 문경여중 1학년생인 강언나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생각났다. 나는 지리산문화제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바이크의 시동을 걸었다. 구름 때문에 음력 열엿새의 달빛마저 가려진 밤길을 천천히 달렸다. 선물로 받은 앨범 <기다림, 설레임>을 세 번 정도 다시 들을 즈음 구름 사이로 달빛이 얼굴을 내밀었다. 어느새 언나의 낙동강이었다.
노래하는 열네 살 소녀 강언나. 처음 만난 것은 지난 봄 강마을 조사를 위해 경북 문경시 영순면 이목리 금포마을 회관에 사흘 동안 머물 때였다. 진주강씨 집성촌인 이 강마을은 북쪽의 천마산과 앞쪽의 낙동강이 에워싸고 있어 요새처럼 깊숙이 숨어있는 오지였다. 그리하여 낙동강 1300리 길을 두 번이나 걸었지만 강 건너 예천군 삼강주막과 풍양면 하풍리 쪽으로만 지나갔다. 낙동강의 주요 나루터였던 이 마을은 70년대까지만 해도 뱃놀이와 진달래 화전놀이가 유명했다고 한다.
고갯길이 확·포장되면서 문경·예천으로 가는 길은 좋아졌으나 외지인들에 대한 피해의식 또한 만만치 않았다. 특히 지난 봄의 도난사건이 그러했다. 마을기금 80만원을 들여 겨우 장만한 텔레비전이 선이 잘린 채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강치본 이장은 텅 빈 벽면을 보며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더구나 조상을 모시는 ‘금주정사’의 유물까지 훔쳐가려 한 데다 이웃의 백포마을에서도 이장의 생계 수단인 고깃배의 선외기(엔진과 프로펠러)마저 도난당했다. 이런 일을 처음 겪은 주민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하필이면 그 무렵에 찾아갔으니 처음엔 쉽사리 경계를 풀지 않은 게 당연했다.
이 마을의 언나는 이미 ‘트롯 신동’으로 소문난 유명인사였다. 학교에서만 유명한 게 아니라 텔레비전에도 출연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지난 5월에 대구 TBC의 휴먼다큐 <피아노>에 출연해 뭇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두 살 때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송아지’를 가르쳐 주면 어느새 가사를 바꿔 부르는가 하면, 동네 할머니들의 별명으로 노래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언나를 만나자마자 “너 벌써 문경에서 가수로 유명하다며? 노래 한번 들을 수 있을까?” 말을 꺼내자마자 “예, 한번 불러볼까요?” 할 정도로 당당했다. 건강하게 잘 그을린 듯한 피부에 환한 미소,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더없이 해맑았다. “차 드실래요? 저 잘 끓여요” 하며 선뜻 차를 우려내 주기도 했다. 그러고는 “정말 불러볼까요?” 하면서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사랑이란 다 그런 거다. 저마다 아픈 사연 가슴에 묻고 살지….” 거침없이 노래를 불렀다. 허스키하면서 탁 트인 목소리가 전율을 일으켰다.
뜻밖이었다. 작은 몸집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간들어지는 목소리, 애절하면서도 시원스럽게 넘어가는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박수에 환호성을 지르자 신이 난 듯 김용임의 ‘내 사랑 그대여’, 홍진영의 ‘사랑의 배터리’ 등 세 곡을 연이어 부르는 것이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듣는다면 도저히 중학교 1학년생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다문화 가족 강언나네. 4대강 공사 중인 마을 앞에서 언나가 물수제비를 뜨고 있다. | 이원규 시인 촬영
그런데 언나네가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화두인 다문화가정이기 때문이다. 언나네는 1996년에 국제결혼을 한 1세대다. 통일교에서 합동결혼 90쌍을 주선할 때 아버지 강언대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가난한 농촌 노총각이 장가를 가려면 농협에 빚을 내 베트남 필리핀에 가든지 통일교에 나가라”는 속설이 실감났다.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촌 곳곳에 이런 낯부끄러운 현수막이 나붙어 있었다. ‘국제결혼 도와드립니다. 후불제 가능!’, ‘베트남 신부 절대 도망 안갑니다!’ 등등 도저히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는 만행들이 ‘G20 정상회의’니 뭐니 하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언나는 아버지 강언대의 ‘언’과 필리핀 어머니 나르시사 옹아이의 ‘나’에서 이름을 따왔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강언대씨는 가난의 대물림으로 여전히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물려받은 땅 한 평 없으니 1주일에 5일 일하는 일당 3만3000원의 ‘희망근로’를 하고, 틈틈이 다른 집의 농사를 거든다. 나르시사 또한 가정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공부방이 따로 없을 정도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방 두 칸이 있지만 하나는 주방이니 한 방에 네 식구가 살고 있다. 지난 봄에는 공부방을 만들어주겠다며 공사를 하는 듯하더니 돈이 모자라 포기하고, 지금은 우선 아이들이 씻을 세면장을 짓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마저 쉽지 않은 듯했다.
다행히도 언나와 동생 경문이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명랑했다. 어머니 나르시사가 “그토록 노래를 좋아하는데 시디플레이어 하나 못 사줘서…” 하고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하자 “엄마, 괜찮아요. 진짜 가수가 돼서, 가수 장윤정처럼 돈 벌어서 엄마 아빠 집 지어줄게요” 하는 언나의 말이 가슴을 쳤다. 트로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언나에게 어울리는 또 다른 노래도 더 많이 잘 불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특히 다문화가정 1세대의 당당한 2세로서 언나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음악지도자나 작곡가로부터 지속적인 교육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피아노를 배울 수도 없는 형편이니 안타깝기만 했다. 문득 지리산 입산 이후 ‘애써 돈을 벌지 않겠다’던 맹세가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노래 부를 때만은 가난과 수몰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꿈을 꾸었다. 평생 노래하며 살겠노라고. 그래야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던 가수 강허달림처럼 언나도 노래 하나로 험난한 길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언나네와 강변에 나갔다. 4대강 공사는 어느새 금포마을 앞까지 밀고 올라왔다. 마을 바로 아래인 영풍교 인근에는 청강부대 장병들이 투입된 지 오래다. 더 이상 조용한 강마을이 아니었다. 모래를 실은 트럭들이 가물막이를 건너와 마을 앞 너른 하천부지 농토에까지 드나들기 시작했다. 놀란 고라니 두 마리가 강 위쪽으로 마구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머니와 물수제비를 뜨던 언나가 갑자기 침울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내 흙탕물이 내려와서 올여름엔 수영도 못 했어요. 올갱이도 다 사라졌어요. 맛도 못 봤다니깐요.” 정말 그랬다. 강변에 텐트를 치고 상주하다시피 하던 낚시꾼들도 모두 떠나고 없었다. 낚시꾼도 없는 저 강이 강일까? 모두들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군부대도, 낚시꾼도, 고라니도, 물고기도, 올갱이도.
나도 모르게 강허달림의 노랫말을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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